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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이라도

영애 그리고 준수

by 마음의 온도

커피메이커를 열어 필터를 끼우고, 막 갈아온 커피 가루를 넣는다.

커피머신을 둘까 하다가, 커피 메이커를 택했다. 향이 오래 머물렀으면 했다.

다들 샷 추가를 외쳐대며 누가 누가 독하나 내기를 하듯 진한 것이 취향이 된 요즘,

우리에겐 적당한 맹맹함이 필요하다.

너무 진한 맛, 독한 맛에 무뎌진 우리, 조금은 희석하는 습관이 필요하지 않을까.


커피메이커 유리포트가 밀물을 만난 듯 차오를 즈음, 문에 걸린 풍경종이 울린다.

문이 슬로모션으로 열리며 얼굴만 빼꼼하니 들어온다. 영애 씨다.

영애 씨는 전업주부 25년 기념으로 은혼식 대신 한마디 교실을 등록했다.

2주 전 상담을 왔을 때 파마가 풀려 푸실거렸던 머리를 보고 '미용실을 추천할까' 생각했는데. 그 사이 꼬불꼬불 파마를 하고 왔다. 어느 미용실에서 했냐고 묻고 싶다. 비싼 돈을 주고 했다면 어쩌나 싶었다.


"커피 드릴까요?"

태어나 두 번째로 만나는 낯선 공간에서, 태어나 두 번째 보는 얼굴을 마주한 영애 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으세요. 대신 의자들의 사이즈가 다름을 안내한다.

영애 씨는 66 사이즈인데 88 사이즈 의자에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옷도 딱 맞게는 못 입는다며, 딱 맞는 건 어긋나고 밀려날까 봐 불안하다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이곳에서는 그러기로 해요.


약속시간인 11시가 되었다.

영애 씨가 혼자냐며 88 사이즈 의자에 앉아서 불안해한다. 그때 풍경종이 급하게 울린다. 준수 씨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비릿한 숨 냄새와 맨즈 코롱 향이 바람을 타고 교실 한 바퀴를 돈다.

딱 맞춰 오셨네요. 눈치를 보는 준수 씨에게 안심을 전하며 물 한잔과 커피 한잔을 함께 내준다. 준수 씨가 벌컥벌컥 생수 원샷을 마치고, 호흡이 잔잔해지며 커피잔을 드는 것을 확인한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오늘 생각해 볼 한마디는,


빈말이라도

[교실, 나무]는 자기소개가 없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떤 일을 하는지를 생략하기로 한다.

살면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을 만날 때마다 꾸역꾸역 해야 하는 소개를 여기서까지 유지하는 건 피하기로 한다. 어차피 알게 될 사람은 어떻게든 알게 되는 법이니까.

이력서를 읊듯 나에 대해 몇 마디로 소개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느끼게 되는 건 다른 사람의 몫이고, 이 공간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상대는 내 소개를 받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어야 하니까.


영애 씨의 호흡이 갑자기 빨라지는 것과 반대로, 느릿하게 소심이 가득한 손을 든다.


"빈말이라도. 이 말은 제가 25년간 하루에 최소 두 번은 중얼거리는 말이에요. 우리 집 식탁의 고정멘트죠. 남편은 아침, 저녁은 꼭 집에서 먹어요. 저는 결혼을 하고 쭉 전업주부로 있었기에 지금까지 남편에게 차린 밥상은 18,250 끼니, 식간의 참까지 포함하면 1만 9천 끼니는 차렸을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한 번도, 맛있다. 오늘 음식 최고다.라는 얘기를 안 해요. 단 한 번도요! 그러면서 또 먹기는 엄청 먹어요. 그냥 빈말이라도 한번 정도는 맛있다. 수고했다.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커피메이커에서 김이 올라온다. 애써 참으며 모아 왔던 숨을 토해내듯이.


준수 씨가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열려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이곳을 오는 길 내내 그 생각을 하면서 왔어요.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오늘 월차를 내야 했거든요. 제 성격이 원래 충동적이지는 않은데 어제 1층 문구점에 왔다가 나무교실 간판을 보고 얼떨결에 들어와서 상담을 하고 등록을 하게 되었죠. 밤새 고민을 했어요. 부모님이 아프시다고 해야 하나, 친척 중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리며 한번 더 장례식을 치러야 하나. 아침에 팀장에게 월차 계획서를 메일로 보내고 전화를 드렸어요. 몸살이 심하다고. 목소리도 최대한 바닥으로 깔고 기침도 하고요. 근데 팀장님의 한마디는 오늘 결재 올려야 할 서류 마무리해서 메일로 보내라. 4시 넘기면 안 된다. 진짜 그러면 죽는다.라는 거예요. 물론 제가 거짓말은 했지만, 그래도 아프다는 사람에게 몸은 좀 어떠냐. 한마디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빈말이라도. 괜찮냐고."


준수 씨의 숨소리가 빨라지는 비트에 맞춰 영애 씨의 고개가 빠르게 끄덕인다.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을 마시니, 두 사람도 함께 커피 잔을 감싸 쥔다.



[빈 말] 그대로 풀이하면 '비어있는 말'이다.

주변에 비어있는 것을 찾아본다. 다 먹은 과자 빈 봉지, 재활용 수거날을 기다리며 구석에 처박혀 있는 빈 상자. 다 빼서 쓴 티슈 곽. 이들의 다음 행선지는 결국 버려지는 것들이다.

왜 우리는 쓰레기통에 가야 할 ‘빈 말’을 이토록 애타게 원하는 걸까?


"빈 말이라도! 제발 빈 말이라도, 힘들었겠다. 한마디만 해주면 안 돼?"


그녀는 악다구니 치듯 소리를 지르던 그날들이 떠올랐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이슈가 있던 날도 아니었다.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 핸들은 자꾸 집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고, 낯선 길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한숨을 받은 그는 이유를 물었다. 출근이 힘들다고, 사람들이 싫다고. 하지만 그는 사건의 발단과 이유를 찾아내기에 바빴고, 결국 그녀는 빈 말이라도 내 마음을 묻지 않는다고 폭발했다.

일방적인 폭탄 투하는 거친 불꽃을 일으키고, 그녀와 그는 불길 속에서 화상을 입는 소리를 질러댔다.



봇물이 터진 영애 씨의 다음 주인공은 시어머니였다. 일 년에 총 여덟 번의 제사를 지내왔고, 맏며느리로 설에는 손만두를, 추석에는 송편을 빚으며 3박 4일의 손님치레를 당연히 감당했다.

역시 한 번도 수고했다. 네가 있어서 이 큰일을 치렀다. 그 한마디는 못 들었다. 시어머니 임종을 바라보며 빈말이라도 애썼다는 한마디를 간절히 원했지만, 어머니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을 감으셨다.


준수 씨는 이어달리기를 하듯 회사 사람들을 소환한다. 계약직이라 야근이 많은 편인데 정시 퇴근하는 정직원들은 이번 달 야근 수당 짭짤하겠어. 한턱 내. 굴러온 축구공을 차버리듯 한 마디씩 던지고 간다고.

빈말이라도, 수고하세요. 그 말이 그렇게 어렵냐고?



우리는 왜 그토록 빈말을 바라는가?


TV 관찰프로그램 [이혼할 결심]에 출연한 부부가 있었다. 전업주부 아내와 바깥 일이 바쁜 남편, 대화가 단절된 부부가 상대에 대한 서운함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드라마도 아닌데 마치 대본처럼 단골멘트가 아내 입에서 터져 나온다,

"아이들 함께 못 챙겨서 미안하다. 수고했다. 그 한마디를 못해주는 거야? 빈말이라도!"

"또 그 말할 줄 알았다. 내가 놀다 왔냐고!"



우리가 원했던 것은 힘들었겠다. 수고했다. 애썼다.라는 말 안에 담긴 '위로와 공감'이었을 것이다.

마음은 교과서처럼 기승전결이 매끈하고, 공식을 대입하면 정답이 튀어나오는 문항이 아니다.

어떤 날은 잘 빚어진 찰흙처럼 단단한 모양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파도 한방에 무너지는 모래성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을 하트로 그리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 하트모양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제는 새초롬하게 앙 다문 조개 같은 마음이, 말 한마디에 입을 벌리고 뽀얀 속살을 내보이기도 하고,

바짝 말린 미역처럼 건조했다가도, 열 배로 불어나는 생명력을 발산하기도 한다.

우리 마음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한마디 '위로'였을 것이다.

상황을 분석하고 이유를 찾아 잘잘못을 따지는 계산이 아닌, 빈말이라도 "그랬구나" 공감 한 스푼을 얹은 위로 한마디.


영애 씨의 남편은 잘했다는 점수를 줄 만큼 반찬이 입맛에 안 맞았을 수도 있다.

준수 씨 상사도 일이 급한데 갑작스러운 월차는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빈말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빈말이 사전의미 그대로 '실속 없이 헛된 말'이기에 필요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


다정한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뱉는 말에 O/X 푯말을 고르지 않는다.

그 사람을 한번 바라보고 생각해 보는 것, 그 시간은 오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애 씨 남편이 식탁에 앉아 밥상을 차리는 영애 씨를 5초만이라도 바라봤다면,

준수 씨 상사가 전화를 받는 동안 아파서 병원 가는 준수 씨를 5초만이라도 떠올렸다면.

그들의 입에선 '빈말' 한마디가 참지 못하는 기침처럼 쿨럭이며 나왔을지도 모른다.



빈말이라도
그 말을 빼 보면 어떨까?


빈말이라도 '수고했다고' 한마디 해주지.

빈말이라도 '괜찮냐고' 한마디 해주지.

빈말이라도 '힘들었지' 한마디 해주지.


우리는 이 말들에 그토록 원했던 '빈말'을 빼보기로 했다.


(빈말이라도) 수고했다고 한마디 해주지.

(빈말이라도) 괜찮냐고 한마디 해주지.

(빈말이라도) 힘들었지 한마디 해주지.


"치사하게 빈말을 바라지 말고, 그냥 달라고 해야겠네요. 여보. 수고했다, 한마디 해 줘요.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선심 쓴다 생각하고 한마디 해줘요. 수고했다고. 맛있다고."


각오를 다지듯 주먹 쥔 손과 달리 영애 씨의 두 발이 의자 밑에서 앞뒤로 그네를 탄다.

그 모습을 준수 씨는 부러운 듯 바라본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괜찮냐고, 수고했다고 한마디 해주세요. 이건 쫌.."

이때, 영애 씨가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든다.

"과장님, 저 괜찮냐고 걱정 한마디 해주시면 다 나을 것 같습니다. 이건 어때요?"



이렇게 첫 시간을 함께 했고, 스스로 방법을 찾았다는 뿌듯함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분해된 듯 가벼워진 얼굴로 인사를 한다.

그녀는 다음 주에 보자는 인사를 하며 나서는 영애 씨에게 빈 말을 던져본다.


"영애 씨, 헤어스타일 바뀐 거 좋아요. 지난번보다 훨씬 어려 보이세요."


사춘기 소녀처럼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영애 씨를 본다.

무심코 던진 빈 말이었지만, 입에서 나가는 순간 '진심'이 되어버렸다.

진짜로 영애 씨가 예뻐 보이고, 파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빈말이라도, 그 말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말이 비어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비워둔 마음을 채워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말도 동전처럼 앞뒤의 두 얼굴이 있다. 던지는 순간, 어떤 말은 횡재처럼 마음을 채우고

어떤 말은 벌칙처럼 상처를 남긴다.


'빈말이라도'


속마음을 감추고 던지면 잔인한 말이 되지만, 진심을 담는 순간에 그 말은 마음의 문을 연다.

말은 입에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굴러가는 동전이다.

앞면, 뒷면, 어느 쪽이 보일지는, 그 마음이 정한다.

말의 진심이 방향을 바꾸는 것. 말은 결국,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굴러간다.


결국 내가 그토록 바라던 '빈말이라도'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는 바라지 않기로 한다. 대신 먼저 말을 건네보기로 한다.

"수고했어요"

"괜찮나요?" 진심이라도, 그렇게 마음을 채워주는 말이 되길 바라며.



영애 씨가 문을 나서다 말고 뒤돌아보며 웃는다.

"생각해 보니 저도 인색했던 것 같아요. 오늘은 저도 남편한테 먼저 빈말을 던져봐야겠어요.

세상 무뚜뚝한 인간이 웃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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