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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님 말고

소은

by 마음의 온도

"나무 교실 주인이세요?"


2층 계단을 오르고 오른쪽 복도로 들어섰을 때, 흐릿한 형상 하나가 보였다. 복도 창문에 반사된 햇빛에 씻겨 상체는 흐릿했고, 두 발만 동동 떠 있었다. 마치 영화 '사랑과 영혼'의 한 장면처럼, 하늘의 부름을 받고 천천히 사라져 가는 순간 같았다.


"나무 교실 주인이세요? 아니면 사장님?"


햇살 조명을 거두고 드러난 얼굴엔 '젊은이'라는 이름표가 빛나고 있었다.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펑퍼짐하게 신발을 덮고 있는 벌룬 와이드 바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를 향해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커다란 크로스백엔 '청춘'이라는 명함이 가득 담겨있을 듯했다.


"들어오실래요?"


도어록 뚜껑을 열자,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는 마지막 신호음과 동시로 몸을 돌렸다. 햇살에 찌푸린 눈을 그대로 품은 채.


"나무교실, 승주라고 해요."

"저 오늘 할 수 있을까요? 지금요. 아님 말고요."


오늘은 예정된 일정이 없는 날이다. 나무 냄새를 맡으며 혼자 보낼 하루에 아침부터 마음이 급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다섯 권의 책을 한꺼번에 에코백에 쓸어 담았다. 서랍에서 아끼던 나무색 툴러를 담고, 필사노트도 챙겼다. 소풍날 아침 들뜬 아이처럼, 가방을 싸는 동안 차오르는 흥분에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마음의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종종거리는 발걸음, 얼음만 남아 덜그럭거리는 빈 컵을 든 그녀의 손놀림은 누군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커피메이커에 빨간 불이 켜지고, 한 방울 두 방울 커피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테라스에 나가봐도 되냐고 물었고, 고개를 끄덕이자 폴딩도어를 활짝 열었다. 햇살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윤슬처럼 빛난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퍼진다. 후---하고 보내는 하늘의 날숨을 흡수하려는 듯 그녀의 어깨가 한 뼘은 솟았다가 사뿐히 가라앉는다.


"소은이예요. 이소은."


긴 호흡 끝에 뱉은 그녀의 한마디였다. 상담도 등록도 모두 건너뛰기로 한다.

커피가 제 빛깔을 내며 차올랐고, 소은 씨는 얼음만 남은 컵에 뜨거운 커피를 부었다. 뜨거운 커피를 맞이한 차가운 얼음이 미세한 신음을 낸다.


오늘 생각해 볼 한마디는,

아님 말고

소은 씨가 피식- 웃으며 빨대에 입을 모은다. 뽀로록 뽀록, 빨대에서 나는 소리를 따라 입가에 보조개 우물이 파이는 것을 바라본다. 그녀의 입은 말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럴 땐 내가 입을 열어야 한다.


"피구 아시죠? 어렸을 적 체육시간이면 운동장에 커다란 주전자로 물을 흘리며 네모를 그려놓아요. 손바닥을 뒤집어 편을 나누죠. 한 편은 네모칸 안에 들어가고, 상대편은 공을 던져 사람들을 맞추기 시작해요. 나는 운동 신경이 없고 겁이 많은 아이였어요. 공이 날아오기도 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죠. 그러다 보니 나는 상대편의 성공 타깃 1순위이었고, 같은 편에서는 실패의 아이콘이었어요. 얼굴을 가리고 웅크리고 있는데 공이 피해 가는 날이 있어요. 빨리 공을 맞고 사망신고를 하고 빠져나오고 싶은데 그조차도 안 되는 날이죠. 그럴 때는 운동장 흙에 젖은 선이 빨리 마르기를 바랐어요. 저한테 피구는 공식적으로 이해받은 폭력이었어요. 게임이라는 보호 아래 허락받은 폭력. 나는 '아님 말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피구 게임에서 등을 세게 맞고 울지도 못하던 그때가 떠올라요."


[아님 말고]

어떤 말이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을 때 하는 말. 어떤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는 뜻.

얼마 전 선거를 치를 때 지겹게 들었던 말이다. 확인되지 않은 근거 없는 가짜뉴스, 루머를 퍼트리고 거짓임이 밝혀졌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약속한 듯 뱉었던 말. 아님 말고.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아님 말고 병'에 걸린 듯, 무심코 사용한다. 아님 말고, 오케이?






"오늘 커피는 소은 씨가 사 오기로 하지 않았나? 아님 말고."


처음에 소은 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그다음에는 기억력을 의심했다고 한다. 회의실 문을 닫으며 김대리가 던진 말에 다들 웃었다. 소은도 따라 웃었다. 그 말이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출입문에 부딪힌 듯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저녁 미국 지사에서 메일 받는 데로 바로 공장에 연락해야 하는데, 누가 좋을까. 별일 없으면 소은 씨가 수고 좀 해줄까? 뭐 아님 말고."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님 말고 뒤에 숨은 또 다른 한마디 '너 아니어도 상관없어'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일 아침 회의자료 카피를 깜빡했네. 어쩌나. 우리 중에 누구 집이 가깝더라? 소은 씨? 아님 말고."


퇴근 후 늦은 밤 울리는 알람은 늘 불청객이었다. 팀 단체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소은 씨를 따라다니는 가벼운 말들. 그들에게는 지나가는 바람이었지만 소은 씨에게는 숙제가 되었다. 일을 처리해야 하는 과제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는 숙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저만 무거운 게 문제 같아요. 혹시 사내 누구랑 사귀냐? 아님 말고, 부모님이 대기업 임원이라며? 아님 말고. 어제랑 옷이 똑같은데 집에 안 들어갔나 봐. 아님 말고. 내가 그들의 말속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제가 장난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들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내가 조금씩 소멸되는 기분. 진짜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말이 왜 남의 가슴에 칼이 되는지 소은 씨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들은 당당한 MZ세대 카테고리에서 바라보지만, 자신감도 자존감도 하위권에서 발버둥 치고 있기에 더욱 가볍게 튕기는 한마디에 중심을 빼앗기고 있었다.

말이란 게 그렇다. 한쪽에서는 아무 일도 아니지만, 다른 쪽에서는 긴 밤을 통째로 빼앗아가는.

가벼운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퇴사 갈림길에서 헤매게 하는 것임을, 그녀의 커다란 가방이 말해주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있던 소은 씨가 일어나 테라스로 향한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얼음 하나를 입안에 넣고 와그작 깨문다.



아님 말고, 입술 앞에 세워놓는 '작은 방패'다.

말은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선언. 말을 던진 뒤 자기를 보호하려는 얕은 방어막이다.


언뜻 들으면 캐주얼한 농담 같지만, 그 한마디 말 안에는 많은 것들이 숨어있다.

확신 없는 마음, 책임지고 싶지 않은 본심, 누군가의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무의식의 오만.


이 작은 방어막은 가벼워 보이지만 상대의 가슴에는 무게로 남는다.

나의 책임을 미루는 문장 다음에, 그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말을 던지고 책임은 부인하는 회피의 언어.

그렇기에 던진 사람은 쉽게 잊고 버리지만, 받은 사람은 오래 기억하고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말은 뱉는 순간 그저 흘러가지만, 말의 흔적은 그 자리에 남는다.

특히 뱉은 사람보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오래 눌어 앉는 말이 '아님 말고'인 것이다.



아니면 아니고
말면 마는 거지

"소은 씨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요."

"네?"

"아까 저 처음 만났을 때 한 말, 기억하시나요?"


때로는 민망해서 때로는 쑥스러워서 자신에게 씌웠던 가벼운 방패였던 한마디 말이, 상대에게는 뾰족한 화살이 되어 심장을 찌르기도 한다.

'아님 말고'

남에게 하면 폭력이 될 수 있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려 나에게 사용해 보기로 한다.

처음 의미 그대로, 내게 사용하는 '작은 방패'를 만들어보기로 한다.


쌓이는 걱정 앞에서 "어떡하지?" 대신 "못 먹어도 고" "아님 말고"를 꺼내본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도, "되면 땡큐" 아니면 "아님 말고"를 외쳐본다.

오늘은 이쯤 해도 충분했다고. 아니어도 괜찮다고, 주문을 걸어보는 것이다. 이건 무책임이 아니라 휴식의 권리다.


남 눈치 보느라 하고 싶지 않은 부탁을 들어준 적이 있는가,

사소한 말 한마디에 며칠 동안 잠을 설친 적이 있는가,

실패할까 봐 시도조차 못 해본 적이 있는가,

저 사람 왜 저래? 분석하고 헤집으며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님 말고.'가볍게 털어버리는 거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무책임한 말 한마디였는데, 내가 나한테 사용하니 주문이 되네요. 내일부터는 아닌데요. 못 할 것 같아요. 내 마음을 얘기해야겠어요. 끙끙 앓아봤자 나만 손해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퇴사하면 되죠. 해보고 아니면 마는 거죠."



아님 말고.

내가 나에게 주는 '작은 허락'이다.

이 한마디 주문으로 내일은 조금 더 견고해질 수 있기를.

무심코 남에게 사용할 때는 뾰족한 화살이, 나에게는 '마법 같은 주문'이 된다는 것을.

누군가의 말에 주저하지 않기로 한다. 가볍게 어깨를 펴기로 한다.

말은 늘 말하는 사람의 편이다.

남의 입에서 나오면 상처가 되지만, 내 입에서 나를 향하면 용서가 되기도 한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아님 말고. 이 한마디로 우리 자신을 조금 쉬게 해 주어도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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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가방을 챙기는 소은 씨에게 인사말을 건네본다.


"다음에는 다른 회원님들과 함께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님 말고."


"생각해 볼게요.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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