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웃자고 한 소리

소은 그리고 수진

by 마음의 온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공기는 유난히 얇다.

하얀 A4용지를 닮은 바람이 가냘픈 틈 사이로 종이비행기처럼 비행하고 있다. 창문에서 던져진 종이비행기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한 바퀴 선회하다가 바닥 가까이 곤두박질치듯 내려오더니, 다시 갑자기 하늘로 떠오르는 것처럼.

추위를 타는 바람은 오들오들 떨며 앙상해진 나뭇가지 사이에 잠시 몸을 숨긴다. 그 기척에 놀란 단풍잎 하나가 튕겨 나오듯 비행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툭--

붉은 얼굴의 단풍잎이 테라스 위에 힘겨운 듯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승주가 쪼그려 앉는다.

누워 있는 걸까, 엎드려 있는 걸까.

이제 할 일은 다 마치고 태평하게 누워 있는 것 같기고 하고, 떠날 시간이 다가와 엎드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승주는 단풍잎을 들어 조심스레 교실로 데려온다. 티슈 한 장을 뽑아 반으로, 또 반으로 접어 작은 러그를 만든다. 이제 쉬렴. 작은 손님에게 딱 맞는 자리가 완성되었다.


ChatGPT Image 2025년 12월 1일 오후 06_43_51.png


"흠. 흠."


소은 씨가 얕은 기침처럼 목을 가다듬는다. 긴장하면 목구멍 어딘가가 잠기는 듯, 말이 걸리기 전에 작은 소리가 먼저 나온다.

그와 반대로 맞은 편의 수진 씨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소은 씨를 바라보고 있다.

피하고 싶은 시선과 다가가고 싶은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반가워요. 저는 최수진이에요. CH그룹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흠... 아, 네. 저는 소은입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커피를 따르던 승주의 손길이 아주 미세하게 빨라졌다.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오늘 생각해 볼 한마디는요..."



웃자고 한 소리


그 말을 듣자 수진 씨의 눈동자가 반짝 커진다.


"와, 오늘 재밌겠다."


그 말에 소은 씨의 표정도 아주 조금 반짝였다. 눈, 코, 입이 동시에 미세하게 움직인다.


"저는 이 말 자주 써요. 오늘만 해도 두 번... 아니, 세 번? 네 번인가? 암튼 꽤 많이 했던 거 같은데요. 이게 왜요? 재밌잖아요. 분위기도 좀 살고."


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볼까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수진 씨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냥 별거 아니었어요. 출근했는데 막내 얼굴이 핼쑥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밤에 뭐 했어?' 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확 빨개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웃자고 한 소리인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했고요. 회의하는데 다들 아이디어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월급쟁이가 젤 좋지?'라고 했더니 한 직원이 '저희도 할 만큼 하고 있어요.'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뭐라 했게요? '아니 웃자고 한 소리인데 뭐, 죽자고 달려들어?' 제가 오히려 당황했다니까요."


소은 씨가 다시 한번 아주 작은 소리로 시동을 건다.


"흠, 흠... 저는 조금 반대예요, 저는 '웃자고 한 소리' 때문에 오히려 상처받는 쪽이거든요."


"상처요? 웃자고 한 소리에 뭐가 들어있다고 상처를 받아요? 날카로운 단어 하나도 없는데. 진짜예요?"


소은 씨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회사 윗분 중에 '오늘 왜 이렇게 초췌해.' '안색이 왜 이래.' 툭툭 던지고 가는 분이 있어요. 제가 뭐라고 대답할지를 몰라 가만히 있으면 '아유, 다 웃자고 한 소리야. 뭘 또 이렇게 정색을 해.' 이렇게 말해요. 회사만이 아니에요. 친구 중에도 있어요. '너 어디 아파?'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친구요. 저는 안 아픈데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냥 웃자고 한 소린데 뭘~' 이렇게 넘겨요. 저는요...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


승주는 일어나 커피를 채운다. 어디부터 이 이야기를 열어야 할까.


웃자고 말하는 사람


'웃자고 한 소리'라는 말은 정말 웃기려고 한 말일까.

이 말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사실 웃기려는 의도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분명 있다. 그 말을 직접 꺼내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목구멍 끝에서 자꾸만 걸린다.

결국 농담이라는 얇은 포장지를 씌워 툭 던지고 만다.

배드민턴 서브를 넣듯 '통통' '가볍게' 던지면 문제없겠지. 나는 가볍게 말했으니 당신도 가볍게 받아주겠지.


하지만 말은 연체동물이 아니다. 모든 말에는 뼈가 있다.

어떤 말은 척추처럼 중심을 잡아주고,

어떤 말은 손목처럼 유연하게 돌고,

어떤 말은 생선 가시처럼 마음에 콕 박혀 며칠을 쓰라리게 한다.

농담이라는 포장 아래 숨어있는 뼈대를 따라가다 보면 대부분의 말에는 버릴 수 없는 '의도'가 있다.


'밤에 뭐 했어?'는 성실함을 은근히 건드리는 말일 수 있고,

'왜 이렇게 초췌해?'는 자기 관리를 지적하는 말일 수도 있다.

말의 뼈대를 따라 마음까지 찾아가 보면, 의미 없이 시작된 말은 거의 없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진 씨의 얼굴이 어색하게 움직인다.


"엥... 전 진짜 웃자고 한 농담이었는데요? 아니, 그렇게까지 심각할 일이냐고요."


가볍게 던진 공이 생각보다 멀리 튀어갔다는 듯한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켜듯 마신다.



웃지 못하는 사람


웃자고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웃기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말의 통뼈에 맞을 때도 있고, 가시에 걸릴 때도 있지만

특히 마음의 면역력이 떨어져 약해져 있을 때,

지금 삶이 버겁거나 자존감이 바닥일 때는 말 한마디도 그대로 심장에 닿는다.


상사, 선배의 장난은 아랫사람에게 농담이 아니라 지시처럼 들리기도 하고,

친구의 가벼운 말은 마음이 무거운 사람에게는 찌르는 말이 되기도 한다.


바이러스가 몸속의 약한 곳을 공격하듯,

가벼운 농담이라도 민감한 곳에 닿으면 '상처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자고 달려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움츠러들며 숨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웃자고 한 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기보다, '나만 웃지 못했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소은 씨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 말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어요. 마치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요."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금방 전까지 공중을 떠돌던 말들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는 먼지처럼 가라앉는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수진 씨였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요."


그녀가 컵을 천천히 돌리며 말한다.


"저도 말에... 뼈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직원이 좀 밉상이거든요. 오늘도 괜히 말 한마디로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같고.. 제가 던진 농담이... 진짜 농담은 아니었네요."


소은 씨가 고개를 들었다.


"전 반대였어요. 제가 너무 약하다는 게 제일 한심했어요. 왜 그 말마다 이렇게 휘청거리지? 왜 이걸 농담으로 못 넘기지? 그게... 계속 속상했어요."


두 사람의 말이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 고요히 내려앉았을 때, 승주가 숨을 고른다.



말은 입이 아니라
온도로 전해진다


말에는 뼈도 있고, 가시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온도'다.

말의 온도는 그 말을 던지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어 듣는 사람의 마음으로 건너간다.

같은 문장이라도 걱정의 온도로 건네면 위로가 되고, 의심의 온도로 건네면 상처가 된다.

친구가 "너 어디 아파?"라고 말할 때, 그 말에 따뜻함이 실리면 진심이 되고, 차갑게 떨어지면 "비꼬는 건가?"의심이 생긴다.


'웃자고 한 소리'의 온도를 구분하는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웃음이 나온다면 그건 웃자고 한 소리이고, 웃음이 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

웃음은 마음의 가장 솔직한 버튼이기 때문이다.

.

.

.

.

승주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웃자고 한 소리는... 듣는 사람도 웃어야 완성되는 거죠."


그러자 수진 씨가 가방 안을 뒤적이며 중얼거린다.


"마스크가 있었는데... 아, 여기 있다. 저는 지금부터 이거 쓰고 있을게요. 제가 말을 던지면 자꾸 멀리 튀어나가서요. 입구를 좀 막으려고."


소은 씨가 피식 웃었다.

오늘 처음 나온, 작은 진짜 웃음이었다.


냅킨 러그 위의 단풍잎도, 어느새 웃음을 베고 있었다.

단풍잎도 붉은 얼굴을 살짝 말아 올렸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