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골목 어귀, 노란색 간판을 단 작은 채소가게가 있다. 인도인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주인장은 오십이 훌쩍 넘은 키가 크고 풍채가 다부진 남자로 말수가 적다. 반면 부인은 계산을 할 때마다 일일이 안부를 묻고 단골손님과 곧잘 수다를 떤다. 가게는 아침 일곱 시에 문을 열고 밤 열 시에 닫는다. 주말은 물론이고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에도 장사를 했다. 주인 부부의 근면성실함 덕분인지 낡고 허름한 가게는 늘 손님으로 붐볐다. 채소와 과일 가격이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하기도 하지만 그곳을 떠올리면 소박하고 정다웠고 어떤 안정감이 느껴졌다.
퇴근길에 채소가게에 들른다. 오늘은 어떤 과일과 채소가 나와있는지 둘러본다. 가게에 들여오는 청과는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똑같은 품목이라도 어느 날은 싸고 어느 날은 비싸다. 싱싱할 때도 있고 시들시들할 때도 있다. 갈 때마다 어떤 물건이 싱싱하고 가격이 좋은지 살펴본다. 장을 볼 때는 대개 필요한 품목을 미리 생각했다가 구입하지만 이 채소 가게의 경우는 랜덤이다. 이곳에서 구입한 식재료에 따라 그날의 저녁 메뉴가 정해진다. 오늘은 줄기 토마토가 싱싱하고 가격이 싸다. 팔뚝만 한 가지도 한 개에 일 달러가 조금 넘을 뿐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딸기상자가 쌓여 있다. 철은 좀 이르지만 딸기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든다. 3월도 막바지다. 조만간 찬 기운이 완전히 물러가고 봄이 오겠지. 캐나다의 딸기는 시고 뻣뻣하여 평소에 잘 먹지 않지만 오늘은 한 상자 집어든다.
가게에는 이국적인 식재료가 많다. 눈길을 끄는 건 각종 인도 향신료다. 큰 통에 담긴 가루를 원하는 양만큼 봉지에 담아 살 수 있다. 종류가 스무 가지도 넘는다. 사람들은 통 옆구리에 매달아 놓은 작은 국자로 가루를 퍼서 비닐봉지에 담아 간다. 인도사람들은 각자의 레시피가 있어서 같은 요리라도 향신료의 배합을 달리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김장을 할 때 집집마다 첨가하는 재료와 담그는 방식이 따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향신료를 어떤 용도로 어떻게 배합해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 이미 혼합되어 있는 커리 가루 한통을 집어 들었다. 인도 커리 가루는 한국의 분말 카레와는 달리 설탕이나 전분이 섞이지 않아 맛과 향이 순수하고 진했다. 한국 음식에도 이 커리가루를 첨가하면 풍미가 사는 음식이 있다. 닭볶음탕을 만들 때 티스푼으로 하나 정도 넣으면 잡내를 잡고 맛이 풍부해진다. 떡볶이에도 조금 넣는다. 소스가 진해지고 약간 이국적인 맛이 된다.
계산대 옆쪽으로는 빵을 팔고 있다. 식빵이나 사워도우 같은 서양식 빵도 있지만 그저 구색을 갖추기 위함이고 매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인도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로티와 난, 그리고 짜파티다. 세 종류의 빵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내 눈에는 두께가 얇거나 두껍거나 크기가 크거나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둥글고 넓적한 밀가루 반죽을 부쳐낸 형식은 비슷해 보인다.
계산을 하려고 줄을 선다. 앞에 선 터번을 쓴 남자의 장바구니를 힐끔 들여다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잎채소와 얄팍하고 노르스름하게 부쳐낸 짜파티 한 봉지, 향신료 파우치 몇 개가 들어있다. 저 재료로 뭘 만들어 먹는 지 궁금하다.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지평선 끝 해가 걸쳐져 있는 경계 주위로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번졌다. 장을 본 사람들은 바삐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하면 방금 산 재료로 따뜻하고 소박한 저녁을 차리겠지. 식탁에 둘러앉아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털겠지.
나도 그만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지와 줄기 토마토를 넣어 파스타를 만들 작정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개를 데리고 산책도 나가야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어제 읽다만 책을 몇 장 더 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