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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Apr 16. 2024

묘지에서

할머니가 묻힌 곳은 가든 오브 겟세마네(Garden of Gethemane Cemetery)라는 가톨릭 신자를 위한 공동묘지였다. 그곳은 내가 사는 도시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전 이곳에다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사두었다. 할머니가 묻히지 않았다면 이국의 공동묘지를 가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묘지입구의 거대한 철문을 들어서면 광대한 잔디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전체가 무덤이다. 봉분을 쌓지 않는 문화라 평평한 땅 위에 비석만 있다. 비석을 묻은 방식직사각형의 청동이나 대리석 패널을 바닥에 눕혀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비석을 세로로 세워 땅에 박은 전형적인 방식의 무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바닥에 눕힌 쪽이 훨씬 보기가 좋다. 비석이 세로로 서 있는 무덤이 있는 구역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묘지는 이름대로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작은 호수도 있고 장미덩굴이 뒤덮힌 아치와 말끔히 전정된 나무와 꽃이 심어진 화단이 곳곳에 있다. 잘 다듬어진 푸른 잔디밭 위 일정한 간격으로 유족이 가져다 놓은 꽃다발과 화분이 놓여 있다. 멀리서 보면 꽃밭 같다.

장례식을 위한 아담한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내부가 아름답다. 아이보리 색 벽과 나무 바닥은 따뜻하고 단정하다. 적당히 마모된 옅은 갈색의 나무 벤치 아랫부분에는 경첩이 달린 받침대가 접혀 있다. 기도할 때 펼쳐서 무릎을 꿇는 용도로 보인다. 단상의 구석에는 작은 오르간과 부드러운 빛깔의 도자기로 된 성모 마리아상이 놓여있다. 정면 벽 중앙에는 주변을 스테인드글라스로 두른 커다란 십자가가 박혀 있다. 유리타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에 십자가가 영롱하게 빛났다. 앉아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공간이다.

성당 밖으로 나오면 특이한 건축물이 하나 있다. 지붕은 있으나 출입문도 창문도 없다. 봉안담이다. 벽면은 칸칸이 유골함을 넣어 두었다. 대리석으로 봉인되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대리석 타일이 묘비의 역할을 한다. 타일 위에 사망자의 이름, 출생일과 사망일이 새겨져 있다. 칸마다 작은 고리가 박혀 있다. 누군가는 꽃 한 송이를 꽂아놓았다. 어떤 칸은 손바닥만 한 작은 인형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어린 아기의 봉안함이다.

묘지를 둘러보면 나이 많은 사람의 무덤만큼이나 어린이나 젊은이의 무덤이 많다. 태어나 고작 몇 달을 살다 간 아기도 있고 십 대 혹은 이십 대의 꽃 같은 청춘에 절명한 이도 있다.

죽음 앞에 인간은 하찮고 나약할 뿐이다. 하찮고 나약한 존재의 생은 가벼워야 마땅하다. 하지만 왜 이다지도 무겁게 다가오는 것일까? 살아 숨 쉬는 행위 자체가 어쩐지 쓸쓸하다.





드넓은 대지는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각 구역마다 가톨릭 성자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어떤 구역에는 세인트 패트릭의 동상이, 어떤 구역에는 세인트 프란체스코의 동상이 있는 식이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동상도 눈에 띈다. 세인트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것이다. 이민자의 나라답게 성자의 동상마저 국적과 인종을 다양히 하여 세워놓았다. 구역의 동상을 보고 무덤의 위치를 가늠한다. 할머니의 무덤은 세인트 니콜라스 동상 근방에 있다.

할머니의 묘는 캐나다에 사는 십 년 간 네다섯 번 도 찾았다. 아빠가 한국에서 캐나다를 방문할 때마다 함께 왔었다. 이번에는 형부 어머니의 묘지를 계약하러 왔다. 암 말기인 형부의 어머니는 몇 달 전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갔다. 조만간 초상을 치르게 될 것이다. 죽음이 예정된 이의 무덤을 준비하는 과정은 무척 낯설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고 지독하게 쓸쓸하다.

형부가 사무실에 들러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동안 나와 언니는 할머니의 무덤에 들렀다. 특별히 하는 의식은 없다. 무덤 앞에 서서 묘비 위 새겨진 할머니의 출생일과 사망일을 반복해 읽을 뿐이다.

1925. 8~2013.12

88년을 살다 가셨다. 너무 짧지도, 그렇다고 백세를 넘길 만큼 길지도 않은 삶. 그 정도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을 떠올리면 영영 오지 않을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 너무 일찍 죽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늙어 꼬부라진 채로 길게 살고 싶지도 않다. 몇 살까지 사는 것이 적당할는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 아, 이 정도 살았으면 됐다. 이제 그만 죽어도 되겠다, 그런 생각을 담담히 할 수 있을는지도 도무지 모르겠다. 아직 많이 늙지 않은 내게 죽음은 그저 혼돈이고 미지의 영역이다.





멀리 한 남자가 보인다. 백발이 성성한 남자는 무덤 옆에 캠핑용 의자를 펴놓고 책을 읽고 있다. 먼저 떠난 부인의 묘일까?

주말이면 사랑하는 이가 묻힌 묘 옆에 앉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책을 읽다가는 남자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려본다. 헤아려본들 그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남겨진 사람이 떠난 이를 추억하는 모습이 가슴 먹먹하면서도 아름답다, 정도다. 다정하지만 슬프고 평화롭고 쓸쓸하다. 상반된 감정이 마구 뒤섞이지만 혼란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미움과 원망과 나쁜 기억은 흐릿해지고 대부분은 용서와 연민과 그리움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죽은 뒤가 아니라 사는 동안 그런 마음을 가지면 좋을 텐데라는 뻔한, 알면서도 절대 실천에 옮기지 못할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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