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로 이주한 뒤 극장에서의 영화감상은 여가라기보다는 강도 높은 노동에 가까워졌다. 자막 없이 영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다. 낯선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 몇 시간을 집중하다 보면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영화관 가기는 점차 꺼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두 번은 의식을 치르듯이 영화관에 간다. 오로지 한국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사실 한국에 살 때 한국 영화는 그다지 즐겨 보지 않았다. 캐나다에 와서는 일부러 영화관까지 가서 보는 것이다.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은 옆 도시에 있다. 그래봤자 사는 동네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닿을 정도로 가깝다. 그곳에는 코리아 타운이 있다. 덕분에 근방의 멀티플렉스 극장에 가끔 한국 영화가 올라온다.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홍보는 전무하고 정확히 며칠에 개봉하는지 하루 몇 회 상영하는지 미리 공지하는 법도 없다. 한국 영화의 개봉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한인 인터넷 커뮤니티다. 어떤 영화가 몇 월 며칠 어느 지역 극장에서 개봉한다더라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카더라 통신 같지만 대부분 정확하다. 영화관 공식 홈페이지에도 뜨지 않는데 누가 어떤 경로로 알아내는지는 모른다. 일단 개봉일을 알더라도 정확한 상영 스케줄은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번주 목요일이 개봉인데 삼일 전인 월요일이 되어서야 예매 링크가 뜨는 식이다. 그러니 몇 주 전에 예매하기란 불가능하다. 영화가 상영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작은 상영관 하나에서 길어봤자 2주다. 이 짧은 기간조차 유동적이다. 일주일 치 스케줄만 올렸다가 반응이 좋으면 한주 정도 더 연장하거나 하루 상영 횟수를 약간 늘리는 식이다. 시스템이 뭔가 원시적이다. 시골 동네의 작은 영화관도 아니고 캐나다 전역에 체인을 가진 대형 멀티 플렉스 극장인데도 그렇다. 그러니까 한국 영화를 캐나다 극장에서 보려면 관객 입장에서 수고를 많이 해야 한다. 개봉유무와 날짜도 자체적으로 알아봐야 하고 도깨비 시장처럼 열렸다 닫히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가 잽싸게 보러 가야 한다. 그런 와중에도 한국사람들은 알음알음 잘도 알고 찾아온다. 배 타고 한 시간 반 걸리는 근처 섬 도시에서도 영화를 본다고 일부러 오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우연히 파묘의 예고편을 봤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소재가 무척 흥미로웠다. 영화가 옆 도시 극장에서 개봉될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뷰를 보니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물은 아니라고 했다.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터넷 한인 커뮤니티에도 파묘를 보러 가겠다는 글이 많았다. 주말에 영화를 보려면 예매를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개봉하는 날짜 일주일 전부터 극장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는데 영화와 관련한 어떤 정보도 뜨지 않았다. 딱 3일 전 저녁에 접속해 보니 예매 링크가 떠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저녁 시간의 영화를 예매하려는데 좋은 좌석은 이미 죄다 매진이었다. 다들 언제 그렇게 빨리 예매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일요일 점심 12시 영화를 겨우 예매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애매하지만 별수 없었다.
일요일, 영화 시간에 맞춰 극장을 찾았다. 영화관은 겉으로 봤을 땐 어마무시하게 크고 번쩍번쩍하다. 좌석은 그다지 편하지 않다. 조금만 움직여도 양 옆의 의자까지 흔들리기 때문에 한번 앉으면 자세를 바꾸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중간 크기 정도의 상영관이 꽉 찬다. 관객의 대부분은 한국인이다. 익숙한 언어가 사방에서 들린다.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다. 마치 한국의 영화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마음이 한순간 편안해진다. 경직되고 굳어있던 감정의 끈 몇 개를 툭 놓게 된다.
긴장하며 지낸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무리 속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이 심리적 안정감이 그리워 한국에서조차 잘 보지 않던 한국영화를 보러 이국 땅의 극장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최신 한국영화를 외국 현지의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한인이 많이 사는 대도시나 되니 가능하다. 불친절한 상영방식과 형편없는 좌석에 불만을 터뜨리다가도 어쨌거나 화제성 있는 한국 영화라면 귀신처럼 알고 틀어주니 극장에도 감사할 일이다.
영화 속 무덤을 파내고 굿을 하는 장면은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인파가 극장을 빠져나간다. 무의식 속 긴장의 각을 세우고, 낯섦이 익숙한 이국의 일상으로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