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마켓에 들렀다. 물건을 사고 계산대로 가는데 어떤 과일을 박스 채 쌓아놓고 팔고 있다. 매대에 꽂힌 팻말에 Yellow dragon fruit(노란 용과)이라고 적혀있다.
용과를 여기선 드래건 프룻(Dragon fruit)이라고 부른다. 과일은 무척 이국적인 생김새를 가졌다. 삐쭉삐쭉한 진분홍 껍질을 두르고 있고 반으로 가르면 하얀 속살에 까만 씨가 점점이 박혀있다. 보라색 속살을 가진 종도 있으나 하얀 것이 흔하다. 화려한 생김새에 비해 아무 맛이 안나는 게 특징이다. 맛이 있다 없다를 떠나 특별한 향이나 맛 자체가 없다. 정확히 무(無) 맛이다.
중국 사람들은 용과를 즐겨 먹는다. 중국마켓에 가면 용과는 사시사철 있다. 딱히 가격이 저렴하지도 않다. 다른 과일에 비하면 비싼 편이다. 그런데도 잘들 사간다. 예전에 중국인 동료 교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용과를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사실 용과는 꽤 맛있는 과일이지만 내가 운이 나빠 설익거나 맛없는 것에 걸린 건가 싶어 물어봤다. 동료는 용과는 원래 그런 맛이라고 했다.
특별한 맛이 없는 맛.
중국사람들은 용과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 먹는 것이지 맛 때문에 먹는 건 아니라고 했다.
붉은 용과만 봤지 노란 용과는 본 적이 없다. 호기심에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일고 여덟 개의 주먹만 한 용과가 가지런히 들어있다. 진짜 노란색이다.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다. 중국말이어서 처음에는 못 알아차렸는데 내게 하는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푸근한 인상을 한 중국인 아줌마가 뭐라 뭐라 말한다.
"미안합니다. 나는 중국어를 못 합니다."
영어로 대꾸하자 그제야 아줌마도 영어로 말한다.
"미안. 네가 중국사람인 줄 알았어. 이제 보니 한국 사람이구나?"
출신 국가를 밝히지 않았는데도 용케 알아차린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용과를 먹어본 적 있니?"
"아니요. 빨간 것만 먹어봤어요. 노란 것은 맛이 다른가요?"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에 좋은 기회다 싶어 아줌마에게 묻는다.
"오, 그렇다면 꼭 먹어봐. 정말 맛있어."
"그런가요? 붉은 용과는 영 맛이 없더라고요."
"붉은 용과와는 차원이 다르지. 아주 달콤해. 노란 용과는 자주 나오지도 않아. 가격도 이 정도면 꽤 싸게 나온 거야. 오늘처럼 기회가 있을 때 먹어보렴. 내가 하나 골라줄께."
아줌마는 정답게 말했다. 꼭 엄마뻘 되는 한국의 아줌마같다. 용과 볼 줄 모르는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아줌마는 신중히 상자들을 둘러보더니 하나를 집어 내게 내민다.
"이게 좋아 보이네. 크기도 크고."
"감사합니다."
"천만에."
아줌마는 내 용과 박스를 골라주고 자신의 카트에 세 박스나 담아 가지고 자리를 떠난다.
해외 살이를 하다보면 종종 느낀다. 동양 사람끼리만 통하는 묘한 편안함이 있다. 나라와 언어가 다른 것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서양 사람과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정서적 공감대가 있다.
집에 와서 용과를 먹어본다. 아줌마의 말처럼 맛있다. 아주 달고 과즙이 풍부하다. 과육이 말랑하고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부드럽다. 두꺼운 껍질도 살짝 칼집만 내 손으로 잡아당기니 훌렁훌렁 잘 벗겨진다. 빠작빠작 씹히는 검은 씨의 질감마저 재밌다.
음, 용과란 이런 매력이 있구나.
친절한 중국아줌마 덕분에 노란 용과를 맛봤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용기가 없는 나로서는 들여다만 보고 사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번에 혹시나 노란 용과 앞에서 살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을 본다면 나도 말해줘야겠다. 중국 아줌마가 내게 한 것처럼 친절하고 다정하게 알려줘야겠다. 정말 맛있답니다. 꼭 먹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