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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Aug 03. 2022

검은 나비 그림에 대한 추억

아홉 번째 이야기


4월의 막바지였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마침내 물러가고 봄이 완연해지면 오로지 날씨만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겨우내 집안에 갇혀 지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고 그맘때쯤이면 스프링 마켓(Spring market)이라 불리는 노천에 펼쳐지는 장터가 여기저기 열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부스를 열거나 테이블을 펼쳐놓고 빈티지 그릇과 오래된 레코드판 같은 중고 수집품이나 직접 만든 비누와 향초, 집에서 구운 파이와 과일잼 등을 내다 팔았다. 근방의 로컬 농장이 차려놓은 부스에서는 예쁜 꽃다발과 수확한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과일과 채소, 직접 채집한 벌꿀 같은 것을 살 수 있었다. 나는 한동안 주말이면 이런 마켓을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일에 푹 빠져 있었다. 가끔 꽤 소장 가치가 있는 빈티지 물품을 싼 가격에 득템 하거나 마음에 쏙 드는 수제품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꼭 숨은 보물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터에서 파는 것 중에는 간혹 다소 조악하거나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영혼과 꼭 닮은 독특한 개성이 묻어 나오곤 했다. 나는 것을 이른바 '북미 감성'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멋과 분위기를 통칭하여 내 멋대로 붙인 별칭이었는데 유럽이 화려하고 섬세한 귀족 같은 이미지라면 이쪽은 뭐랄까, 약간 투박하지만 단단한 안정감이 느껴지는, 과하게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묻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감성이 참 좋았다.






벌꿀 농장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농장 옆으로는 딸기를 포함하여 블루베리, 라즈베리, 블랙베리 등 다양한 종류의 베리를 재배하는 광활한 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기르는 수만 마리의 꿀벌이 밭에서 기르는 과실나무의 꽃과 근방 숲 속의 야생화에서 꿀을 따오면 그것을 채집해 파는 곳이었다. 농장에 딸린 가게에는 다양한 종류의 꿀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어떤 꽃에서 따온 꿀이냐에 따라 빛깔과 향이 달랐고 매우 신선했으며 맛이 좋았다.

4월이 끝나갈 무렵,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그 농장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입구 가장자리에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주말 동안 농장 앞의 주차장에서 봄맞이 마켓이 열린다는 광고였다. 나는 오랜만에 꿀도 구입하고 장터도 구경할 겸 그 주 토요일에 언니와 함께 그곳을 방문했다. 한가로운 주말의 오후였고 뺨에 닿는 바람은 따뜻했다. 농장에 딸린 상점 앞 널찍한 주차장 한편에 노천 장터가 열려 있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적당히 붐볐고, 공짜 팝콘을 나눠 주는 수레 앞에는 아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와 언니는 장터 안 작은 부스들을 천천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얇은 면사와 털실 따위로 짠 컵받침과 주머니와 레이스 깔개 같은 것들을 팔고 있는 테이블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가로길이가 30센티가 채 되지 않는 아담한 사이즈의 캔버스에 통 검게 칠한 바탕 위로 화려한 나비와 꽃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바탕의 나비라니, 그 조합은 어딘지 모르게 생뚱맞아 보였다. 큼지막한 나비는 너무도 정직하게 정 가운데에 그려져 있어서 구도적으로도 그다지 세련돼 보이지 않았다. 털실로 만든 편물 사이, 그림은 주변의 어떤 것과도 섞이지 못한 채 혼자 뻘쭘하게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은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미워할 수 없는 애교랄지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 교태는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고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나를 데려가 주세요." 그림이 내 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언니가 코바늘로 짠 물병 주머니에 관심을 갖자 물건을 팔고 있던 붉은 머리의 중년 백인 여자가 다가와 자신이 직접 뜬 것이라며 물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팔고 있는 편물과 그림은 완전히 동 떨어진 것이었으므로 나는 이것이 파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장식용으로 세워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자에게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그림은 판매하는 것인가요?"

색깔 별로 물병 주머니를 꺼내 보이며 언니에게 호객 행위를 하던 여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잠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물론 파는 것이지." 여자는 여전히 좀 당황스러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화가인 내 친구가 직접 그린 그림이야. 그녀에게 얼마에 팔고 싶은지 지금 전화로 물어볼게."

여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동안 나는 그림을 집어 들었다. 가격을 듣기 전이었지만 그림을 사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그걸 사려고?" 의아한 표정으로 언니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네가 방수도 안되고 그다지 튼튼해 보이지도 않는 털실로 짠 물병 주머니를 사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유야."

언니는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통화를 마친 여자가 돌아왔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친구가 30달러에 팔겠대."

참으로 소박한 가격이었다. 그림 값을 치를 때 그녀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저 그림을 가지고 다녔지만 사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니 내 친구가 아주 기뻐했어."






집에 들고 온 그림을 나는 책상 한쪽 벽에 기대어 세워두었다. 그림이 내게 부탁했던 것처럼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가져다 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책상에 앉을 때마다 항상 볼 수 있는 자리에 세워져 있다. 그림을 볼 때면 그날의 찬란했던 봄 날씨가 떠오른다. 작은 야외 장터의 북적이던 활기와 알 수 없는 설렘 같은 것이, 손으로 만든 물건들을 늘어놓은 테이블마다 느껴지던 다정한 진심 같은 것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던 그림이 팔렸다고 하자 기뻐했다는 화가가 떠오르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속삭이던 그림의 수줍은 자태가 떠오른다. 나는 어느새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다. 좋은 기운을 가진 물건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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