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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Jul 27. 2022

블랙베리의 계절

여덟 번째 이야기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5월이었다. 하얀 실로 짠 솜 장갑 같은 뭉게구름들이 새파란 하늘 위로 둥실 떠 있었다. 공기는 청명했고 햇볕에 적당히 덥혀진 대기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마치 이방인이 된 듯해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던 당시의 나 조차도 마음이 설렐 만큼 이곳의 봄은 아름다웠다. 나는 점심을 먹고 나면 개를 데리고 아주 긴 산책을 나가곤 했다. 개를 키우는 장점은 여기서도 크게 발휘하는데 산책시킨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동네를 아주 샅샅이 탐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풍경은 낯설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우리의 산책을 방해하는 존재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길가에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가시로 뒤덮인 덩굴 식물이었다. 그것들은 따뜻한 봄이 가져다주는 발랄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기운을 뿜으며 도처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 식물의 줄기 위로 촘촘히 돋아있는 가시는 어찌나 굵고 날카로운지 걷다가 덤불에 발목이나 종아리를 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당장에 생채기를 입기 일쑤였다. 시청에서 나온 직원들이 주기적으로 가지를 전기톱으로 쳐냈지만 생명력은 너무나 강해 단 며칠 만에 줄기들은 쑥쑥 자라 인도를 침범하곤 했다. 영특한 내 개들은 그 위로 걸음을 딛었다가 발바닥을 몇 번 찔려보더니 바닥에 늘어져 있는 가시넝쿨은 밟지 않고 빙 둘러 가거나 그 위로 점프하듯 넘어 다녔다. 개가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넝쿨을 귀신같이 잘 피해 다니는, 그 신중함이 묻어나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어쨌거나 그 가시덤불은 우리의 산책길에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행인들에게 그토록 위험한 나무가 길가에 우거지는데도 왜 뽑아버리지 않고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불평하곤 했다. 6월에 접어들었을 때, 가시덩굴에서는 자잘한 꽃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하얗고 작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6월 말에서 7월 초, 마침내 더위가 성큼 들어서자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작고 검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고 그것이 익어가자 들큼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 거친 가시넝쿨은 다름 아닌 야생 블랙베리 나무였던 것이다. 나는 검고 탐스러운 열매를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두어 개 따서 맛을 보았다. 크기가 작고 딱딱한 것은 아직 영글지 않아 시큼했지만 엄지손톱보다도 크고 만졌을 때 살짝 말랑말랑한 것은 놀랍도록 달콤했다. 나는 이 광경이 놀랍고 신기했는데 탐스러운 베리가 길가에 흐드러지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광경이 너무나 익숙한지 관심을 가지고 구경하거나 감탄하는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어 보였다. 야생에서 자라는 열매들은 환경보호를 위해 채집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가끔 공원 등지에서 장갑을 낀 노인들이 그것을 한 아름씩 따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도로에 차를 대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경찰도 딱히 제지하거나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 시즌이 되면 마트와 과일 가게에서도 일제히 농장에서 재배한 블랙베리를 팔기 시작했다. 야생의 것은 과육이 적고 딱딱한 씨들이 많이 씹히는 반면 파는 것들은 도토리 마냥 길쭉한 타원형에 크기가 훨씬 컸으며 과육 또한 더 풍부했다. 하지만 특유의 들쩍지근한 향은 야생의 것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할머니도 한때 여름마다 야생 블랙베리가 열리면 그것을 따다가 술을 담갔다고 했다. 본인은 전혀 마시지 않았지만 그렇게 술을 몇 병씩 만들어 두었다가 가끔 성당 사람들 식사를 집에서 대접할 일이 생기면 음식과 곁들여 내놓거나 한국에서 온 가족이나 친척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하지만 만드는 양에 비해 줄어드는 양이 턱없이 적었고 팬트리 선반의 여유공간이 부족해지자 몇 해 전부터는 술 담그는 일을 그만두었다. 

어느 늦은 밤, 학교 과제를 하던 중 맥주나 와인 같은 술 한잔이 절실했던 언니는 부엌을 뒤지다가 검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팬트리 선반 구석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뚜껑을 열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그것은 예상대로 발효가 된 과실주였다. 언니는 액체를 조심스레 국자로 퍼서 잔을 채웠다. 할머니에게 맛을 봐도 좋은지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는 이미 잠자리에 든 지 오래였다. 언니는 그 술이 달짝지근하니 입맛에 썩 잘 맞았다고 했다. 이후로도 언니는 종종 밤에 할머니가 자러 들어가면 술을 한잔씩 덜어 야금야금 마시기 시작했다. "일부로 할머니 몰래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어." 언니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 술의 존재를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린 것 같았고 혹시나 술 마신다고 잔소리 들을 것 같아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할머니가 오래전 담가 두었던, 마지막 한병 남아 있던 그 과실주가 바닥을 드러냈을 때 문득 정신을 차린 언니는 할머니에게 등짝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빈병을 몰래 갖다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크고 멀쩡한 유리병을 버렸다고 나중에 더 큰 타박을 들을 것 같아 그것을 그냥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다.

"이 큰 병을 네 혼자 어찌 다 먹었냐?" 다음날 아침 병을 발견한 할머니는 놀란 눈치로 물었다.

"저 원래 술 잘 먹어요."

언니의 대꾸에 할머니는 "늬 할아버지가 술주정꾼이었는데 그 피를 네가 물려받았구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전혀 채근하는 투는 아니었고 허허 웃으며 흡족한 표정까지 지었다.

그리고 여름이 되어 야생 블랙베리가 지천으로 열리자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 그 검은 열매를 며칠에 걸쳐 한 바구니씩 따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한동안 담그지 않았던 술을 그해 처음 언니를 위해 담갔다. 오전 내내 열매를 따와 싱크대 위에 올려둔 채 낮잠을 자러 들어가면 손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양심껏 자기가 알아서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 채반에 받쳐 놓곤 했다. 열매의 물기가 날아가면 큰 양푼에 쏟아 넣고 설탕을 부어 잘 섞었다. 언니가 술이 더 달달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설탕을 원래 비율보다 더 넉넉히 넣었다. 혼합물이 담긴 양푼에 뚜껑을 덮어 실온에 하루 정도 놔두면 설탕에 절여진 열매에서 즙이 나왔다. 그러면 할머니는 커다란 유리병에 열매와 과즙을 넣고 그 위로 소주를 부었다. 그리고 삼일 정도 틈틈이 유리병을 열어 설탕이 잘 녹도록 액체를 휘저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언니는 아주 일심동체가 되어 술 만들기에 몰입했다고 한다. 언니가 입맛을 다시며 이 술은 도대체 언제 마실 수 있냐고 묻자 할머니는 술은 숙성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마실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열매를 채집하고 술을 담그는 데까지 걸린 일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할머니는 다른 때와 달리 아주 활기에 넘쳐 보였다고 언니는 말했다. 그때 할머니는 일 년이 지난 후 그 술병을 열어 손녀에게 맛을 보여줄 순간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해에 블랙베리가 열리면 또 술을 담가야겠다고, 댓 병의 술을 곧잘 마시는 손녀가 있으니 더 넉넉히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녀와 처음으로 함께 만든 그 술이 채 익기도 전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고 얼마 뒤 블랙베리의 계절이 돌아왔을 때 그 술들도 마침내 개봉할 때를 맞이한 것이었다. 언니가 커다란 술병을 식탁에 올려놓고 조심조심 잔에 따르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그 정체에 궁금증을 가졌다. 사실 나는 팬트리 구석에서 술이 담긴 유리병들을 보았을 때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터였다. 그 검은 액체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자 언니는 그제야 술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마음이 좀 먹먹해지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맛을 보겠냐는 언니의 물음에 평소에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지만 그러겠다고 답했다. 받아 든 술잔에서는 야생 블랙베리 나무 주변에서 맡았던 들큼한 향이 났다. 언니와 나는 각자의 술잔을 앞에 두고 마주 본 채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세상을 뜬 할머니를 기리는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말없이 그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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