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치어의 바다 - 4
새벽 6시에 맞춰둔 휴대폰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간밤에 자다가 발치가 걸리적거려서 이것저것 발로 찼는데, 휴대폰이 거기 섞여 있었나 보다. 싸한 기분에 벌떡 일어나 침대 바닥에 나뒹구는 휴대폰을 집어 드니 오전 7시다! 나는 튕기듯 이부자리를 박차며 부리나케 해원 언니를 깨웠다.
“언니! 언니, 일어나! 7시 넘었어!”
“음…… 뭐?!”
벌떡 일어난 언니가 어쩔 줄을 모른다. 해원 언니는 뭘 할 때 남들보다 두 배는 느린 사람이다. 배낭 짐만 싸는데도 한 시간 이상 걸린다. 나는 휴대폰, 노트북, 여권과 지갑이 든 복대만 잘 챙기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서 대충 가방에 쑤셔 박는다. 반대로 해원 언니는 배낭 물품 리스트를 일일이 대조해가며 짐을 싼다. 사실 새벽 6시 알람도 해원 언니를 위해 맞춰둔 것이다.
우린 씻는 것을 포기하고 7시 30분쯤 짐만 챙겨 숙소를 나왔다. 숙소 여주인이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입에 문 채로.
다하브행 버스는 8시 15분에 출발한다. 숙소와 투르고만 버스 정류장 간 거리는 가깝지만 하필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은 구간이다.
우린 버스 대신 택시를 탔고, 8시쯤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택시 기사의 운전 실력 덕분이다. 차도와 인도를 구분할 의지가 전혀 없는 보행자와, 횡단보도는 심심한 교통공무원의 낙서쯤으로 여기는 운전자들 틈바구니에서 현란한 곡예운전(…)을 선보인 기사는 정류장 입구에 우릴 딱 내려주었다. 하얗게 질린 해원 언니는 택시에서 냅다 뛰어 내렸다.
투르고만 정류장은 시설이 제법 현대적이고 좋다. 우린 다하브행은 지하 플랫폼에서 출발한다는 전광판을 확인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플랫폼은 한산하다.
“다하브까지 얼마나 걸린댔지?”
“5시간.”
“한숨 자면 도착하겠네.”
“응. 금방이네.”
생각 없이 대꾸하고 보니 재밌다. 대체 언제부터 이동시간 5시간이 금방이라 느껴지기 시작했을까?
해원 언니는 버스에 타자마자 꾸벅꾸벅 존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좌석이 하나둘씩 채워지더니, 곧 복도의 입석까지 꽉 찬다.
버스 에어컨에서 얼음장 같은 냉기가 몰아친다. 이러다가 사막 한복판에서 얼어 죽는 게 아닐까? 졸던 해원 언니도 추운 모양인지, 바하리야에서 산 베두인족의 구트라를 스카프 대신 얼굴에 뒤집어쓰고 본격적으로 자기 시작한다. 나도 내 것으로 무릎을 덮었다.
차에 타는 사람들 마다 꼭 한 번씩 우릴 흘끗거린다. 버스 승객 중 외국인, 더구나 동양 여자는 나와 해원 언니 달랑 둘이다. 다하브로 가는 여행자가 많다길래 버스에서 좀 만날 줄 알았는데……. 왠지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갈 때 른진과 함께 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물렸던 벼룩 자국들도 덩달아 기억나는 바람에 의자 시트에서 흠칫 몸을 뗐다.
악명 높은 이집션 타임에도 불구하고,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출발하고서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잠들었다가 다시 깨보니 막 정오를 지나는 중이다. 예정대로라면 앞으로 45분 정도 후, 다하브에 도착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창 커튼을 살짝 들추었다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삼켰다.
밖은 황무지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기암괴석의 절벽이 무심히 도로를 에워싸고 있다. 영겁의 세월을 이어졌을 사나운 풍파는 녹음을 휩쓸어간 자리마다 모래의 빛깔을 뒤덮었다.
사막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풍요롭다고 말하던 아메르가 떠오른다. 텅 빈 여백이 이뤄낸 사막은 경이롭다. 하지만 나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인지할 수는 있어도 이해하진 못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은 필요 이상으로 다양한 색과 물질이 범람하는 습한 세계이므로.
“다 왔어?”
해원 언니가 부스스 눈을 뜨며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차창 밖을 보여주었다. 해원 언니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1시간쯤 더 달려, 드디어 다하브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멀찍이 바다가 보인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무척 짙고 검푸른 빛인데, 어째서 눈부시게 밝아 보일까?
나와 해원 언니는 끈질긴 차량 호객꾼들을 뿌리치며 바다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바다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정류장과 바다 사이에는 아무것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으니까.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입은 옷과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린다. 각막이 순식간에 메말라 눈을 오래 뜰 수 없다. 해변 코앞까지 오자 급기야 광풍이 몰아친다. 해원 언니가 트렁크를 질질 끄는 와중에 이대로 계속 걷기는 아무래도 무리다.
우린 마침 지나가던 픽업트럭을 세워 얻어 탔다. 트럭은 우리가 가려던 게스트하우스의 후문 입구에 멈췄다. 우릴 발견한 숙소 직원이 곧장 오너를 불러왔다. 온몸을 덮는 갈라비야 위로 맹꽁이처럼 배만 불룩 튀어나온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앗살람 알레이쿰.”이라며 인사를 했다.
“두 분이신가요?”
“네. 방은 있죠?”
“그럼요. 며칠이나 묵을 예정입니까?”
“열흘 이상이요.”
“물론입니다. 혹시 두 분 다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 때문에 오신 겁니까?”
“아뇨. 저는 아니고, 이 분만.”
나는 해원 언니를 가리켰다. 오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를 리셉션 룸으로 데려가 시원한 블랙티를 내왔다. 리셉션은 스쿠버 다이버들의 사진과,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붙여놓은 팁 노트, 사진들이 가득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오너가 돌아왔다.
“어떤 방을 원하십니까?”
“저렴하고 깨끗한 방이면 돼요.”
“두 분만 쓰시나요?”
“도미토리라도 상관없어요.”
“잘됐군요. 마침 스쿠버 다이빙 강습생 전용 도미토리가 있습니다. 신축이라 넓고 깨끗해요. 에어컨도 됩니다. 두 분이 첫 손님이니 며칠간은 두 분이서만 쓰실 수도 있을 겁니다.”
“좋아요.”
딱 마음에 들어 동시에 답하자, 오너가 열쇠를 직원에게 건넨다. 스태프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더니 앞장서서 2층으로 올라간다.
우리의 숙소는 2층에 있었다. 숙소 입구 복도는 탁 트인 형태로, 왼편은 가슴이 탁 트이는 홍해의 절경이 펼쳐진다. 1, 2층 처마는 옆의 게스트하우스 1층 지붕과 곧장 연결되며 허공에 길을 만든다. 그곳에선 홍해가 더 멀리까지 보인다. 바다가 얼마나 가까운지 손을 뻗으면 파도의 결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도미토리는 6인실이다. 2층 침대는 없고 싱글 침대만 6개인데 그래도 좁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르다. 벽을 터서 객실 두 곳을 하나로 합친 구조다. 문 바로 옆이 화장실 겸 욕실이고, 한복판에는 간단한 요리가 가능한 간이 조리대도 있다. 화장실 변기 상태가 좀 께름칙하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나는 창가에서 두 번째 침대에 짐을 던져놓고 1층 마당으로 내려왔다. 이제 막 바다에서 돌아온 다이버 한 명이 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본다. 깔끔한 이목구비의 그는 나와 같은 동양인이다. 그의 옆엔 비쩍 마르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동양인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다.
나는 오너를 찾아 바다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오너는 우리가 들어온 정문과 반대 방향인 후문 입구를 가리킨다. 나는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그렇지만 후문을 벗어나자마자 발이 뚝 멎는다.
바다. 광활한 바다.
사진에서나 보던 홍해가 숙소 후문 바로 앞부터 시작된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만다. 바람과 볕에 부딪히며 순간순간 다른 색으로 반사되는 바다는 그야말로 빛의 향연이다.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부푼다. 내 발끝을 덮어오는 파도의 흰 포말이 눈부시다.
아름다운 것은 바다만이 아니다. 눈 닿는 곳마다 어여쁘지 않은 곳이 없다. 깨끗한 거리 곳곳을 장식한 유럽풍 가로등이 우아하다. 바다를 향한 채 해변을 따라 죽 늘어선 식당들은 카페테리아에 베두인 족의 좌식 테이블을 두고 주위는 알록달록한 쿠션과 방석들을 둘렀다. 어느 식당이건 테이블 중앙에는 총천연색 종이 갓을 씌운 등을 놓았다.
이렇게까지 색이 난무하면 과장되거나 촌스럽게 여겨질 법도 하건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 장식된 이곳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재밌는 물건을 잔뜩 진열한 기념품 상점들이 보석함을 장식한 보석처럼 거리 여기저기 콕콕 박혀 있다. 공예품부터, 종이 갓, 각종 액세서리, 용도를 알 수 없으나 신기한 조개껍질 장식품과 천연염료로 물들인 옷감, 아라베스크 무늬의 카펫까지…….
나는 보물섬에라도 당도한 걸까? 여기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하고 흥미로운 것들이 어우러져 완성한 세계다.
“우와, 정말 근사하다!”
언제 뒤따라 나온 건지, 나만큼 들뜬 해원 언니가 뒤에서 탄성을 터뜨린다.
“딴 세상이다. 그치, 재인아.”
“응. 여기는 우리가 알던 그 이집트가 아닌데?”
우린 들뜬 기분 그대로,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이 워낙 많아, 고르고 고르다 선택한 곳은 숙소 바로 앞 중식당이다. 아시아권 음식은 오랜만이라 깜짝 반갑다.
바다와 인접한 노천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너 가지 메뉴를 한 번에 시켰다. 스프링롤이며, 탕면이며, 볶음밥이며…….
젊은 중국인 청년이 주문을 받고는 느릿느릿 주방으로 돌아갔다.
손님은 우리뿐이다. 파도가 테라스 난간 밑까지 밀려왔다가 밀려나가길 반복한다. 내륙에 비해 공기는 습하지만 바닷바람은 제법 선선하다.
그나저나 주문한 식사는 30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그간의 여행으로 아런 상황이 익숙한 나완 달리 해원 언니는 초조하게 주방을 곁눈질한다.
“왜 이렇게 늦지? 재료를 바다에서 잡아오나.”
“때 되면 나오겠지.”
어디선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길고양이의 이마를 긁어주며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고픈 언니는 주방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1시간을 넘기기 전, 양손에 접시를 든 청년이 휘적휘적 돌아왔다. 해원 언니는 접시를 내려놓는 청년에게 “만만디! 만만디!” 하고 외친다. 청년은 해원 언니를 멀뚱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버린다. “못 알아들은 거야?” 울상인 해원 언니를 보자 웃음이 터진다. 당연히 알아들었겠지. 그래 놓고 못 들은 체하는 거다.
음식 맛은 모두 훌륭했다. 우린 접시 바닥까지 싹싹 훑은 후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객실로 올라가려는데 오너가 우릴 불러 세운다.
“지금 돌아오십니까?”
“네.”
“마침 잘됐네요. 이쪽은 같은 객실을 쓰실 분입니다. 함께 올라가시면 되겠군요.”
오너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청년이 배낭을 메고 서있다. 숙소 후문을 나가기 전에 잠깐 봤던 동양인 다이버다. 그리고 어디로 보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한국인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역시나 명확하고 분명한 한국어가 돌아온다. 억양은 언뜻 들으니 딱 부산이다.
“어머, 한국인이에요?”
한눈에 알아본 나완 달리, 해원 언니는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넨다.
“난 박해원이에요. 이쪽은 윤재인. 그쪽은 어떻게 돼요?”
“서태윤입니다.”
“태윤 씨. 만나서 반가워요.”
해원 언니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민다. 무뚝뚝한 시선으로 그 손을 보던 태윤이 언니의 손을 맞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