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나 성실히 일기를 쓰는 학생이었다.
타고나길 생각이 많고 감성적이었던 나에게 일기장은 대나무숲 같았다.
크고 작은 일상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 그에 대한 감상을 풀어놓는데 열심이었던지라,
지금도 친정에는 그림일기로 시작해서부터 줄 노트에 이르는 내 일기장들이 책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오랫동안 나의 일기장은 늘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듯 학업에 바빴고 또 취직 후에는 일에 치여 일정용 다이어리만 썼을 뿐 일기는 한참을 쓰지 못했다.
내가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는 아이를 갖고 태교일기를 쓰면서부터이다.
태교일기는 아이에 대한 사랑과 행복을 기록하는 것이 보통의 인식이지만,
안타깝게도 내 첫 태교일기는 생각보다 꽤 다른 감정들이 함께 채워지게 되었다.
당시 내게 미지의 존재에 가까운 뱃속 아이에 대한 애정표현이 낯설어서였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쓰는 일기가 도피처 같아서일까.
나는 일기에 임신으로 인해 마주친 어려움들을 써 내려가게 되었다.
멀미도 하지 않는 내가 처음 입덧을 겪고 끝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야기,
갑자기 생긴 소양증으로 인해 온몸에 덮인 흉터와 새벽까지도 잠 못 드는 밤들,
여러 이슈들로 여기저기 병원을 다니던 일을 일기로 남기던 어느 날,
나는 문득 태어날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아이가 나중에 이 일기를 보고 속상해하면 어쩌지?
‘태교’ 일기인데 행복이 아닌 내 감정을 너무 솔직하게 쓴 건 아닐까? 하고.
그 태교일기의 주인공은 어느덧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그림일기장을 건네주면서, 나는 내심 아이가 행복한 이야기들을 가득 채우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근거리며 마주한 아이의 첫 일기는 나에 대한 서운함으로 가득했다.
동생과의 다툼에 편을 들어주지 않은 엄마 이야기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 중 그 어느 편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기 편이 아니어서 서운했던 모양이다.
누구 아들인지 야무지게 자신의 속상함을 열심히 적어놓은 첫 일기를 보며 나는 속상했을 그 마음을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아이는 그다음 일기에 또 서운한 일을 쓰려고 들었다.
즐거웠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태권도 띠도 승급하고 사촌들이랑 모여 놀고 왜 그런 일들은 다 제쳐두는 걸까? 하는 생각에 나는 결국 잔소리를 참지 못했다.
“일기에 속상한 일만 가득하면 어떡해. 속상한 것보다 행복한 것들을 기억하려고 해야지.“
그야말로 과거의 나를 홀딱 잊은 말이었다.
잔소리를 내뱉음과 동시에 내 태교일기가 스치듯 떠올랐고
늘 아이에게 역지사지를 얘기했던 엄마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음을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멈칫하던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일기에 뭐든 써도 돼. 속상한 걸 쓸 수도 있고. 그런데 즐거운 일들도 같이 쓰는 건 어때? 어제 다 같이 소풍 갔던 이야기라거나.. 나중에 일기를 볼 때 속상한 이야기만 있는 것보다 즐거운 기억들을 읽게 되면 기분이 좋을 것 같거든.“
그날 아이는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나도 그에 대해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잠든 아이 곁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하며
아이가 일기에 힘든 일을 쓰더라도 그건 아이만의 영역임을 인정해야 했음을 반성했다.
그리고 아이가 즐거운 감정을 더 기억할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태교일기에 ’태교‘라기보다 나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채웠지만, 그 일기 속에는 나의 괴로움만 있지는 않다.
임신을 알고 손이 떨릴 만큼 기뻐했던 기억,
뽀글뽀글 미약하게 느껴진 첫 태동에 신기하고 반가웠던 감정,
초음파를 보러 갈 때마다 만날 날을 기대하던 사랑도 함께 담겨있다.
책장 속 내 일기장에도 태교일기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슬픔과 잔잔한 즐거움이 뒤섞여있지만
지금 어른이 되어 그 일기들을 읽는 나는
일기 속 감정들 중에서 슬픔보다는, 천진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행복을 건져내 올린다.
언젠가 아이가 내 일기를 읽게 될 때에도 아이에게 내 사랑이 먼저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아이는 다음 일기에 자전거를 타다가 민들레 씨앗을 퍼트렸던 이야기를 썼다.
‘내가 불어서 날아간 민들레 씨가 꽃밭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문장이 내게 깊이 남았다.
꽃밭을 꿈꾸는 아이의 마음에 나도 긍정적인 마음의 씨앗들을 많이 불어 넣어 주어야겠다.
이제 시작하는 아이의 일기에 행복한 이야기들이 많이 피어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