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줄곧 흐리고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반갑다.
모처럼 따스한 햇살을 느끼자 이 가을이 너무나도 아쉬워졌다.
지난여름 내내 간절했던 선선한 이 계절이 금세 겨울로 변해버릴까 봐서 더 그런가 보다.
내 어릴 적 기억들이 많아서일까
지금보다는 가을을 제법 길게 누렸던 것만 같다.
도시락통을 들고 가을소풍을 가는 날이면
당시 심각한 편식으로 김밥을 먹지 못하던 나를 위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도시락을 싸주셨다.
그래서 매 가을마다 나는 친구들의 알록달록한 김밥들이 가득한 도시락 사이에
계란말이와 동그랑땡이 들어있는 내 도시락을 의기양양하게 펼쳐놓고 밥 한톨 남기지 않고 먹었다.
가을 소풍을 다녀오면 또 부지런히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날다람쥐 같은 체력을 연료삼아 열심히 뛰어다니고
청팀이든 백팀이든 우리 팀이 이기라며 함성을 질렀다.
응원하다 지치면 운동장 한 편의 나무 밑으로 들어가 친구들과 함께 노닥거렸다.
한아름으로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나무는 그늘도 아주 널따랗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면 어른어른 움직이던 그림자를 구경하다가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떠오르는 가을 추억들이 참 많다.
찢어지지 않고 빨간색이 잘 물든 단풍잎들을 주워
그중에서도 예쁜 것들만 골라 앨범 속에 조심히 끼워 넣은 가을이라거나,
만발한 코스모스를 뒤로하고 뛰어다니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잠깐 멈춰 서서는 눈이 부셔 찡그린 얼굴로 사진을 찍었던 가을,
아빠를 따라 산에 오르면 내 머리에 뾰족한 밤송이가 떨어질까 봐 위를 힐끔거리면서도
발로 열심히 밤송이를 비벼서 밤알을 꺼내던 가을 등등이다.
더위가 한풀 꺾이자마자 나는 아이들과 함께 가을을 즐기러 열심히 돌아다녔다.
외출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 눈에도
나가지 않으면 너무 아까울 만큼 하늘빛이 새파랬다.
이달 초에는 처음으로 과수원에 배따기 체험을 하러 갔는데
노란 배들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이 이렇게 예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들도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수확하는 경험을 무척이나 즐거워해서
한 번 더 오고 싶은 생각에 언제까지 체험을 진행하는지 여쭸더니
폭염으로 배가 낙과를 많이 하는 바람에 본디 계획한 일정보다 일찍 끝나게 되었다고 했다.
아쉬움과 동시에 지구 온난화가 성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첫째는 요즘 학교에서 지구와 환경에 대한 교육을 받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책상에서 한참을 꼼질거리더니 ‘지구’라고 큼직하게 쓴 소책자를 만들어 들고 왔다.
내 앞에서 한 장 한 장 펼치며 지구를 위해서 분리수거와 텀블러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뉴스를 전달하는 기자처럼 힘주어 얘기하고 갔다.
나는 환경운동가도 아닐뿐더러 자연이 금방 회복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들조차 적응하기 힘든 날씨 변화에도
바지런히 등하교를 하는 아이들 모습이 안쓰러운 건 나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구를 낫게 해주고 싶은 아이들이 내가 기억하는 사계절을 온전히 누리면 좋겠다.
아이들도 나처럼 가을에 대한 추억이 많았으면 싶다.
가을을 떠올릴 때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그 잠깐 사이가 아니라
아이들 몸과 마음에 뚜렷한 추억으로 새겨지는 계절이 되기를 바란다.
그 바람으로 오늘도 나는 분리수거를 하면서 누군가 집 앞에 버린 쓰레기들을 치워낸다.
내년 가을이 조금만 더 길어지라고.
덧. 어린 시절과 다르게 이제 나는 김밥을 매우 좋아한다.
다행히 아이들도 잘 먹어줘서 이번 달에만 김밥을 세번 싸서 소풍도 보내고 나들이도 다녀왔다.
김밥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라도 역시 가을은 길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