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은 과장
4개월 동안 쉴 새 없이 몰아친 업무와 과제로 체력은 바닥난 상태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들게 들어 올리며 어김없이 출근 준비를 했다. 거울을 쳐다보기 싫을 정도로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초췌한 얼굴을 가리기 위한 안경, 무채색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를 입고 에코백을 들었다. 단정한 블라우스와 검정 슬랙스, 핸드백 그리고 정성 들인 화장은 나에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이 출근했던 8월의 어느 날, 우리 팀에 비딩 제안이 들어왔다. 예고 없이 시작된 비딩으로 8월 과제 발표 날짜가 미뤄졌다. 하루라도 빨리 과제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비딩이 시작되었다는 건 곧 제시간에 퇴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8월 중순부터 9월 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주였다. 평균적으로 비딩을 준비하기에 촉박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더욱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9월 9일 황금 같은 연차를 반납했다. 계획하고 있었던 여행을 취소하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서러움을 꾹 참아내며 ‘연차 취소 결재 서류’를 올렸다.
주임님부터 팀장님까지 비딩 업무에 집중하는 동안 나와 매니저님은 기존 프로젝트 업무를 소화해 내고 있었다. 과장님은 오늘은 더 이상 너희가 할 일이 없다며 할 일 다 하고 일찍 퇴근하라고 말씀하셨다. 약간의 눈치는 보였지만 예의상 거절하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퇴근 준비를 하던 중 대리님은 뭐 하나라도 더 도우라며 발길을 붙잡았다.
대리님은 “9시 전까지 끝내고 갈 수 있지? 우리는 저녁 먹고 올 테니까 다 하고 가”라는 말과 함께 일을 던져주고는 사라졌다. 저녁 9시 이후까지 야근 시 식비가 제공되는데 굳이 밥 먹지 말고 그전까지 끝내라는 말이었다. 순간 그녀가 악마로 보였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우리는 9시까지 업무를 끝내지 못했고, 결국 저녁도 못 먹고 10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밤낮없이 비딩 업무를 위한 야근은 계속됐다.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된 아이디어 회의는 밤 11시가 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꽉 막힌 작은 회의실에 앉아 몇 시간째 아이디어만 내고 있으니, 머릿속은 점점 더 텅 비어 가고 미칠 지경이었다.
회의가 시작할 때쯤 과장님은 아이디어 제안이 익숙지 않았던 신입 둘에게 미리 일러둔 것이 있었다. 헛소리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요즘 마케팅 트렌드와 실제 광고 사례를 열심히 찾아보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공유했다. 정말 헛소리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그냥 던지고 봤다. 아이디어 회의는 원래 이런 식으로 하는 거라고 배워왔다.
“이모티콘을 활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벤트 당첨자에게는 무료로 제공하기도 하고...”
“핸드폰 게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작은 미니 게임 같은 느낌으로..”
“이벤트를 어떤 식으로 할 건데? 아무 말이나 하랬더니 대책 없이 진짜 막 뱉네”
“그런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몇 번 말해”
대리님과 과장님은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자 또다시 속에 있는 악마 본성을 꺼내 들었다. 나와 매니저님이 어떤 아이디어를 제시하든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꼭 한마디씩 거들었다. 애초에 우리 아이디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솔직한 심정은 회의실을 뛰쳐나와 못 해 먹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프로젝트를 잘하고 싶은 욕심과 열정이 단 한 스푼도 없었다.
당시 회의 안건은 ‘디지털 마케팅’을 중심으로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디어는 점점 산으로 갔고, ‘인생네컷’, ‘게임 행사’ 등 오프라인 관련 아이디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기존 주제에 국한되지 않으려 디지털이 아닌 소규모 팝업 행사를 제안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과장님이 자신의 입을 한 손으로 가리고 나를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디지털이라고 씨X 왜 그러냐, 진짜”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평소에도 언행이 거칠고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더니 드디어 선을 넘어 버린 것이었다. 내가 들은 건 분명하게 욕이었다. 항상 실실거리며 웃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하다 하다 욕설까지 퍼붓는 그의 행동은 충격 그 자체였고, 그 이후로 나는 입을 닫아버렸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아이디어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다짐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