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원 권고사직
9월 초, 나를 괴롭게 했던 비딩 업무가 끝이 났다. 3년 같은 3주가 지나가고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리와 과장에 대한 악감정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대리님은 까탈스러운 말투는 기본,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꼬투리 잡기 일쑤였다. 나에게 욕했던 과장님이랑은 말 한마디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하는 농담, 잔소리, 업무 지시 다 듣기 싫었다. 지난주, 나와 매니저님께 커피 심부름 다녀오는 김에 담배 한 갑도 사 오라는 말을 듣고 증오라는 감정을 느꼈다.
일상으로 돌아가 기존 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어느 날, 과장은 나와 매니저님을 회의실로 불렀다.
“이번 비딩 업무를 하면서 솔직히 너희에게 실망 많이 했다. 아이디어 하나 제대로 못 내면 어떡하니? 신입들이 아이디어를 잘 내줘야 선배들이 그걸 써먹을 수 있는 거야”
잘 되면 내 덕, 안 되면 남 탓. 본인도 제대로 된 아이디어 하나 못 냈으면서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결국 내 발작 버튼을 눌렀다.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해도 너희들은 아무렇지 않지? 요즘 애들 특징인가, 항상 보면 헤헤거리면서 웃고 있고, 무슨 말을 해도 긁히지도 않는 것 같아. 아니야?”
지금 생각해도 과장님이 어떤 의미에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잘 모르겠다. 본인한테 혼날 때마다 기죽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아니면 당신 말 듣기 싫다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대들지 않아서?
회사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절대 티 내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이라 배웠다. 이건 기본적인 상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인데 회사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혼나는 게 맞나 싶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사무실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푹 쉬고, 상사에게 혼이 나면 다른 직원에게 괜히 짜증 내는 본인처럼 해야 했나?
“과장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런 말 들으면 긁혀요. 멘탈도 잘 깨지고 집 가서 혼자 힘들어하고 그래요. 근데 회사에서는 그걸 티 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맞잖아요.”
나도 모르게 순간 욱해서 과장님 말에 토를 달았다. 하지만, 이 말 마저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사회생활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업무적인 잔소리는 참을 수 있었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바로잡고 싶었다. 과장은 나의 솔직한 발언에 살짝 놀란 듯 보였다. 급히 3주 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잠시 소강상태였던 과제 이야기도 오갔다. 9월 말쯤 중간 점검 후, 발표 날짜를 다시 잡아보자는 과장님의 말에 잊고 있었던 스트레스가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과제 일정까지 언급하는 것이었다. 벌써 다음 달 과제를 생각해 놓은 그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과제를 그만두겠다는 나와 매니저님의 굳은 다짐은 말 한마디 못 해보고 물거품이 됐다.
비딩 결과가 발표됐다. 예상한 대로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그들 앞에서 나도 함께 아쉬운 척을 했다. 그들과 함께 한 프로젝트에 ‘정’도 ‘열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절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또 다른 비딩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저 아찔했다.
그리고 9월의 마지막 날, 9월 30일
아침부터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대표님과 본부장님이 회의실을 드나들고 팀장님들 또한 분주해 보였다. 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구나 싶었다. 요 근래 퇴사자와 동시에 신규 입사자가 늘어 어수선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지는 오래됐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근데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우리 팀과 3팀 회의 시간이 겹쳤다. 한 번도 이런 불상사가 발생한 적이 없었는데 모두가 의아해했다. 그렇게 모든 직원이 하나의 회의실에 모였다.
그때 대표님과 본부장님까지 회의실에 들어오셨다. 직원들은 영문도 모르고 서로를 곁눈질하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직원들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후 본부장님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었다. 그 내용은 다소 공격적이었다.
“ 어.. 이렇게 다 모인 건 처음이네요..ㅎㅎ 조금 놀랐을 수도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부터 회사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어서 전전긍긍해 봤는데 잘 안됐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가 갑작스럽게 폐업 신청을 하게 됐어요”
다들 너무 놀라 커진 눈으로 한 번 더 서로를 쳐다봤다. 아마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사무실 계약도 올해 11월까지고 당장 올해 안으로 회사가 정리될 것 같아요. 새로운 직원들과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기존 직원들의 부재가 컸던 것 같습니다. 모든 직원은 권고사직 처리가 될 것 같아요. 미안합니다.”
복잡한 심경을 가득 안고 자리로 돌아와 현재 상황을 정리해 봤다. 그러니까 회사가 망해서 전 사원이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고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당장 10월 말까지 정리해서 나가라는 것. 내게 남은 시간은 단 한 달이었다.
사무실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이제 더 이상 수군댈 것도 없었고 다들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된 나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 했고, 퇴직금은 꿈도 못 꿨다.
퇴사하고 싶다고 외쳤던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던 걸까, 하늘이 ‘그래 너 혼자 잘해봐라.’ 하면서 나에게 벌을 내린 걸까. 잘 살지 말고 고생 좀 더 하라고?
하루하루가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