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직

죽으란 법은 없어

by 예니

광고 회사가 줄줄이 폐업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작은 중소기업 하나쯤 무너지는 건 일도 아닐 만큼 경제 상황은 많이 안 좋았다. 즉 취업 시장도 똑같이 어렵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회사가 나를 내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채용 공고 찾기, 자기소개서 작성, 포트폴리오 수정.. 서류 작업만 하다가 하루를 보내다 보니 내일이 오는 게 싫었다. 빨리 취업하지 못하면 본가로 내려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몇 번째 하고 있는 언니는 내 스트레스를 더 돋우었다. 남자 친구는 ‘괜찮아. 잘하고 있어, 곧 될 거야.’라며 쉼 없이 나를 응원했지만 안타깝게도 위로가 되진 못했다. 그만큼 불안했고, 자신이 없었다.




서류 작업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내고자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평일 낮, 좁은 자취방에 슬그머니 찾아온 햇빛을 받으며 깨끗해진 집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꽤 괜찮아진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그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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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번에 면접 보셨던 OO회사입니다. 혹시 아직 구직 중이실까요?”


2주 전, 유일하게 면접 봤던 회사에서 합격 전화가 온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연락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 전화를 또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네네..! 아직 구직 중입니다!”


“나는 OO회사 대표예요. 시간이 좀 지났지만, 혹시 아직 구직 중이시면 출근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연락했어요.”


회사 인사팀이 아닌 대표님이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셨다. 당황스러우면서도 궁금했다.


“우리 회사에 얼마 전 OO컴퍼니에서 이직한 직원이 있어서 혹시 예니 씨 아냐고 물어봤더니 이전 회사에서 일을 아주 잘했었다고 그러면서 적극 추천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직접 연락하게 되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전 회사 1팀 대리님이 그 회사로 이직을 한 것이었고, 나랑 같이 일한 적은 없지만 제삼자에게 들었던 말을 통해 나를 추천해 주신 것이었다. 대표님이 말씀하시길 최종적으로 내 이력서는 후보에 들지 못했었는데 신뢰 하나로 나를 채용하는 거라고 하셨다. 살다 보니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싶었다.


전 직장에서 내 평판이 정말 좋았다는 걸 새삼 느끼며 선임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옥 같은 회사 생활이었지만 꾹 참고 내색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대견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들었다. 그래도 다 괜찮았다.




사원 수는 전 직장의 3배였고, 대형 광고주를 여럿 보유하고 있는 괜찮은 회사였다. 심지어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 있는 곳이었고, 대표님까지 나를 좋게 봐주셨다. 기적같이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표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당장 2주 뒤인 2월 17일 월요일, 첫 출근을 하기로 했다. 약 4개월 동안의 취준 기간을 끝으로 드디어 이직에 성공했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잔뜩 상기된 기분으로 얼른 이 기쁜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대표님과의 통화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다. 평소엔 무뚝뚝하던 아빠가 크게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나 정말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나 보다.


나는 다시 신입의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8개월 동안 배운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다짐과 열정을 장착했다. 애매한 경력으로 중고 신입에 대한 기대와 부담감을 안고 시작하는 것보다 오히려 신입으로 들어가 다시 배우는 입장이라고 마음을 놓으니 한결 편했다.


맘 편히 즐기지 못했던 백수 생활의 끝자락, 남은 2주 동안은 본가에 내려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엄마랑 단둘이 여행도 다녀오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늦잠도 잤다. 그렇게 몸 건강, 마음 건강을 다시 회복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이직한 회사에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좋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 사람 때문에 많이도 울었던 지난날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없이 무심한 세상에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걸까. 새롭게 시작한 회사 생활은 첫 단추부터 헐렁하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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