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더는 못하겠다.

억압된 시간들

by 예니

지난 5월, 나와 B셀 매니저님에게 과제 하나가 주어졌다. 신입사원 트레이닝을 목적으로 과장님 두 분이 내주신 업무 외 과제였다. 각자 서포트하고 있는 브랜드와 관련된 영문 기사를 읽고 PT자료를 만들어 오는 것. 대학시절 질리도록 했던 과제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료 준비부터 발표까지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다.


당근과 채찍이 오가는 과장님들의 피드백을 듣고 과제는 끝이 났다. 이후 매니저님과 나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과제가 주어질 것이며, 이제부터는 개인 과제가 아니라 팀플이라는 것이다. 실무를 빠르게 익히고 앞으로 선배들을 더 잘 서포트 하라는 것이 이 과제의 목적이었다.


6월, 7월.. 회차를 거듭할수록 과제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매월 하나의 브랜드 혹은 제품을 임의로 지정하여 실제로 비딩을 하듯이 PT자료를 만들어 가야 했다. (*비딩이란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광고주가 제시한 프로젝트를 입찰해 오는 것을 말한다.) 시장조사, 자/타사 분석, 컨셉 도출, 아이디어 제안, 마케팅 방안까지. 조사해야 할 것들이 대충해도 몇 십가지다. 이 말은 곧 퇴근 후 꿀 같은 저녁 시간을 과제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열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매니저님보다 내가 더 잘 해내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경쟁심을 유발하려는 과장님들의 꼼수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 욕심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너네 지금까지 뻘짓했네? 내가 이거 안 봤으면 너네 진짜 큰일 날 뻔 했잖아. 지금까지 야근하면서 해온 게 고작 이거야?”


열심히 조사한 자료들을 모아 놓은 파일을 보고 B셀 과장님이 우리를 회의실로 불러 쏟아 낸 폭언들이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엉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공부 차원에서 꼼꼼하게 자료조사를 했을 뿐인데 ‘뻘짓’이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다 필요 없고 아이디어만 가져오라는 과장님 말에 기존에 준비했던 것들을 다 버리고 어영부영 과제를 마무리했다. 첫 과제부터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것 같다는 것을.




팀이 축소된 7월부터는 우리 팀에 업무가 몰려 야근이 잦았다. 야근이 없는 날이면 회의실에 남아 과제를 했고, 점심시간과 주말까지 활용하여 틈틈이 회의를 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트레이닝이 아닌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과제 지옥에 떨어진 듯했다.


과제 주제는 늘 모호했고, 과장님은 언제나 ‘실망스럽다’며 지적하기 바빴다. 이런 식으로 할거면 야근을 하지 말라는 둥, 주말까지 시간을 쓰지 말라는 둥 신입사원의 노력을 가볍게 무시했다.


4개월째 저녁시간과 주말을 반납하고 있는 나와 매니저님은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과장님 입맛에 맞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기획이라는 것은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밤 11시,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나와 매니저님만 남아있었다. 둘 다 초점 잃은 눈을 하고 말없이 노트북 자판만 두들기고 있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매니저님이 그 적막을 깼다.


“매니저님은 이 과제가 실무에 도움이 되세요? 솔직히 체력적으로 더 힘들어져서 더 버거워진 느낌이에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지 오래고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저희 이거 계속 해야하는 걸까요..”


얼마 전 회사를 떠난 주임님이 우리에게 남긴 말이 하나 있다. 회사에서는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절대 해선 안 된다고. 그 말을 끝까지 되새기며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의 노력을 우습게 보고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말만 반복하는 과장님을 위해 내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저님과 나는 8월 과제 발표날 과장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기로 다짐하고 퇴근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어두컴컴한 사무실을 뒤로하고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지나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