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

by 권태윤

40여 호로 이뤄진 산골 마을엔 오직 그녀 한 명만 있었습니다. 늘 까만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늘 그녀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렸고, 밤낮이고 불러주길 기다렸습니다. 초롱불만 더러 살랑거리던 깜깜한 밤이어도 그녀가 부르면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천릿길 떨어진 듯 소원하다가도 한 번만 불러주면 원망이 사라지던 그녀가 지척에서 가만가만 속삭이던 그 목소리, 손가락을 걸면 이상한 소릴 내뱉던 그녀를 수십년이 지난 자금까지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대가 되어 도회지로 나갔습니다. 시골에선 늘 한 명뿐이던 그녀는 곳곳에 많았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고, 누구든 연결해주곤 했습니다. 밤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다가가도 그녀는 말없이 기다려주었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녀의 손목은 누구나 만질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버리거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너무 슬퍼서 울며 소리쳐도 그녀는 언제나 조용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녀들은 대부분 '공중'으로 사라지고 추억처럼 가끔 후미진 곳에 나타나곤 합니다.


언젠가 야릇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한마디 말없이 오직 떨리는 몸짓으로만 나를 찾았습니다. 자다가도 더러 그녀는 몸으로 울었습니다. 그 떨림이 얼마나 간절하던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뛰어나가거나, 가로등 불빛 아래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늘 허리춤에 매달려 밤낮을 따라다니던 그녀는 어느 순간 나의 품을 떠나갔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한동안 야릇한 떨림을 그리워하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비퍼인지, 삐삐인지 암튼 그녀 이름은 그랬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태어난 그녀를 알게 됐습니다. 밀리터리룩을 즐겨 입던 그녀는 등치가 좀 컸습니다. 그녀의 손목은 마치 벽돌처럼 굵고 단단했습니다. 무심하게 반짝이던 눈빛은 참으로 묘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거리를 나서면 너도나도 신기한 듯, 부러운 듯 바라봤습니다. 과시라도 하듯, 그녀를 권총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오직 나하고만 말했습니다. 시골 마을의 그녀, 도회지에 처음 나와 만났던 그녀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모토로라란 이름을 가졌던 그녀는 너무 등치가 컸습니다. 그러다 결국 날씬한 한국인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 숱한 그녀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너무도 스마트한 그녀를 만났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온 그녀는 항상 사과를 베어 물곤 빨간 입술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다 한국토종 은하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이리저리 여행하며 더 많은 그녀들을 만났습니다. 그녀들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내가 잠시라도 싫증을 낼까 봐 끝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밤이고 낮이고 손을 잡고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나는 그녀의 노예처럼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가만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사람들 대부분이 그녀들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늘 더 스마트해 졌지만, 우리는 점점 더 멍청해지는 듯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니 산골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났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 사이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했습니다. 오늘도 더 스마트해진 그녀들은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젠 AI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혁신을 추구하고 있을 Steve Jobs와, 별 세개 회사에 경배를 드립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남말내말(他言我言), 西洋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