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

by 권태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적당히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이로울 수는 있겠지만,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지 못하고 정작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은 쉽게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짧은 생을 살면서도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끝없이 되뇌다 정신에 상처만 입고 고통을 호소하는가 하면, 기억해야 할 것들은 잊어버린 체 끝없이 후회의 독백을 기록해 갑니다.


우울했던 가정환경, 고통스러운 학창시절, 아팠던 사랑의 상처, 가슴 아팠던 배신의 기억, 모멸감, 사랑하던 이와의 원치 않던 이별, 실직의 좌절감, 낙방의 아픔, 소중한 존재의 분실, 믿었던 이로부터의 배신, 불의의 사고, 괴롭힘을 주던 사람들 따위의 좋지 않은 기억들은 모두 잊어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반면에 죽음, 죽음의 시기, 자기존재에 대한 사랑, 모든 일의 주체로서 자신의 역할, 가족의 소중함, 오늘의 의미 따위는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들입니다.


왜 우리는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할까요. 죽음이란 단어만 생각해도 공포를 느끼는 우리들인데 하루하루 죽음이란 단어를 기억하며 살아야 할까요? 물론입니다.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염세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유한함을 깨닫고 과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애써 죽음이란 단어를 외면하며, 약물이니 보약이니 하는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봤자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죽음을 피해 가는 기술을 배운다 한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유한의 존재임을 깨닫고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 높은 관직에 앉은 사람도,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도 반드시 죽습니다. 욕심을 부려봤자 故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의 구절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일입니까.


죽음은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해주기 위해 신이 내려준 선물입니다. 선물은 즐겁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신은 세심하게도 인간을 더욱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선물을 주는 시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죽음의 시기를 알 수 없음은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짜릿한 설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선물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침 출근길에 그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잠을 자는 순간에 받을 수도 있으며, 신나게 달리던 고속도로에서, 연인과 대화를 나누던 찻집에서도, 해수욕을 즐기다가도, 가족과 등산을 하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비행기나 열차여행을 하다가도……. 그 어느 곳,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죽음이란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은 참으로 공평하기에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시기를 알 수 없는 선물 받기에서 황당함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형수가 죽음을 기다리며 조용히 삶을 정리하듯,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사형수들인 우리들은 늘 주변을 깨끗하게 하고서 신이 주시는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준비 없이 선물을 받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 사람들은 오히려 특혜를 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편안하게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아쉬움 따위는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후회하고 아쉬워할 일을 남겨놓지 않는 삶이 곧 선물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반면 우리가 소중히 기억해야 할 것은 자기존재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당한 일에 침묵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마냥 참는 것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도박을 하고 과식을 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것도 다 자기를 학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은 수십억 인구 중에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쌍둥이든 유전자복제를 해서 또 다른 나를 만들건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오직 단 하나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나에 비하면 금덩이니 보석이니 돈이니 하는 것들은 정말 하잘 것 없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희소가치로 따져 봐도 나만한 존재는 세상에 없습니다. 더구나 다른 물질들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만큼 소중한 존재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를 학대합니다. 부당한 일에 침묵하며 정신을 병들게 하고, 온몸에 문신을 하고, 칼을 대서 '영혼을 담는 그릇'인 육체를 괴롭힙니다. 괜한 걱정을 하며 가슴을 멍들게 하고, 거짓말로 양심을 아프게 하고, 과식을 해서 위장을 괴롭게 하며, 과로를 해서 육체를 갉아먹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 빼앗겨도 분노하고, 지갑을 잃어 숱한 날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소중한 것은 마구 버리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건 정말 한시도 잊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잊고 삽니다. 모든 일에 대해 우리는 흔히 남 탓을 하며 삽니다. 가정생활에서는 아내를 원망하고 자녀를 원망하며 부모를 탓하며 살고, 사회생활에서는 상사를, 부하직원을, 조직을, 시스템을 탓하며, 정부를 탓하기만 합니다. 여당은 야당을 야당은 여당을, 근로자는 경영자를 경영자는 근로자를 탓하기에 바쁩니다.


모든 일을 '내 탓이요'하며 주저앉아 있으란 얘기가 아닙니다. 변화의 주체, 건강함의 주체는 모두 자기 자신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왜곡하는 신문을 탓하지 말고 과감하게 구독을 끊어버리면 됩니다. 무질서를 탓하지 말고 나부터 질서를 지키면 되고, 가족을 탓하기 전에 자기가 변화하면 되고, 정치를 탓하기 전에 나부터 똑바로 투표하면 됩니다. 변화의 주체는 늘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얘기는 헛말이 아닙니다.


가족의 소중함도 우리들은 너무도 쉽게 잊고 삽니다. 말로는 소중한 아내, 소중한 남편, 소중한 자식이라면서도 행동은 그게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소중한 부부라면서도 아내와 남편은 서로의 약점 잡기에 아주 탁월한 재주를 발휘합니다. 휴일이면 TV에 몇 시간씩 시간을 내주면서도 가족을 위한 시간내기에는 인색합니다. 실제로 많은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는 남편의 사랑을 TV나 신문보다 못 받고 있습니다. 한번쯤이라도 자기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소중한 것에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보시길 기대합니다.


또한 꼭 기억하며 살았으면 하는 것은 오늘의 소중함입니다. 우리들은 늘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거는 부풀려진 기억이요, 미래는 막연한 환상일 뿐입니다. 소중한 것은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입니다. 물론 그것은 오늘을 즐기기만 하며 생각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을 소중하게 사는 것이 바로 알찬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며,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헤어진 옛 연인을 추억하는 것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으며, 과거에 돈 떼인 일을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되며, 공부 못했던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될까요. 그래봤자 나만 손해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없는 내일을 상상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영어회화를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며 "학원이라도 다닐 걸" 하고 백날 후회해봤자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입니다. 오늘 당장 학원에 등록하면 됩니다. "그와 결혼했다면……."하고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내일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 내 곁에 있는 이를 더욱 사랑하면 됩니다. "내일 가봐야지", "회사를 그만둬야지"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내일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내일 죽음이란 선물을 받을지, 눈이 멀지, 다리를 못 쓰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인데 무슨 내일 타령일까요. 오늘 당장 가보고 싶은 곳을 가십시오. 다니는 회사가 영 마음에 안 든다면 굳게 마음먹고 그만두면 됩니다. 오늘을 미적거리면 반드시 내일 후회하게 되는 게 인생입니다.


우리들 모두 소중한 오늘을 즐겨야 합니다. 하늘도 한번 조용히 감상해 보고, 물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에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세요. 아이 우는 소리도 즐겁게 들어보고 낮잠 자는 아내의 얼굴도 가만히 들여다보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즐기고 감상해야 할 것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인가요. 내일 죽는다는 생각을 해보면 오늘 내 곁에 놓여진 모든 것들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과거를 추억하고 지금 곁에 있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할 시간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과거를 추억하며 상처받는 오늘도 내일에는 과거가 되고 그런 과거들이 쌓이면 오늘이 고통스럽고 내일도 그리 행복하지 못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후회하는 과거는 과거의 오늘에 실수한 증거들입니다. 불필요한 추억과 기억은 영혼을 병들게 하고, 오늘이 없는 내일의 설계는 공허합니다. 우리들 모두 잊을 건 잊고 정녕 기억해야 할 것들만 꼭 기억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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