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꽃
세상 살다 보면 그저 좋아지는 것들이 있다.
내게 유년시절 봉숭아꽃이 그랬다.
봉숭아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아리따운 서사를 품은 꽃.
그래서 마냥 좋았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열 살배기 소녀의 가슴에도
미지의 내 첫사랑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엄마는 여름이면 아무리 바쁘셔도 봉숭아 꽃물 들여 주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두 딸뿐만 아니라, 싫다고 뿌리치는 남동생들 새끼손톱에 까지 붉그스럼하게...
어린 마음에도
'붉은색이 병마를 막아준단다.'
엄마의 그 말씀이 다 맞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럴지라도 그저 믿고 싶었다.
어느덧 엄마 나이를 지나고 보니 가슴으로 이해되는 것들이 늘어난다.
어디 좋은 장소의 나무나 바위만 봐도
자식을 위해 두 손을 모으고 주절주절.
누군가가 간절한 마음으로 쌓아 올렸을 돌탑 위에
소원돌 하나씩을 얹으며 중얼중얼.
친정 엄마를 닮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 이건 단순한 미신 숭배가 아니야. '
자식 둔 어미들의 신을 향한 간절한 몸짓이다.
이게 어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야.
나에게 나를 애써 설명해 가면서 행동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립고도 그립다.
오래된 그 여름날 저녁이,
평상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꽃물 들이던 젊은 우리 엄마와 어린 동생들까지.
봉숭아 꽃물 들이는 순서는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곱게 물든 꽃잎만을 똑똑 따다가 검붉은 물이 나올 때까지 매끈한 차돌로 짓이긴다.
색깔이 오래 유지되라고 백반을 솔솔 뿌려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그마한 손톱마다 꽃잎 빻은 건더기를 봉긋이 얹는다.
마지막으로
초록 잎사귀로 손톱을 꼭꼭 감싼 다음 무명실로 칭칭 매어 놓는다.
다음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손톱에 꽃물이 곱게 들어 있기를 바라며
하룻밤 불편한 잠자리를 견뎌야 했다.
희망도 사랑도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야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던 내 어릴 적 이야기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자연의 한없는 베풂을 속에서
내 감수성도 한 뼘씩 자랐구나 싶다.
유년시절 추억 하나가
푸석푸석 건조하고 밋밋한 내 일상에
단비를 뿌리듯 찾아와
여름날 저녁 한 때를
따스한 그리움으로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