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Brutalism과 관련된 글들을 읽고 요약한 것으로 작성자 편의상의 해석으로 인한 내용의 오역 혹은 의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역장(힘이 미치는 장)이 있다. 관찰자를 이 역장에 두게 되면, 영향 혹은 상호 작용으로 인해 그 역장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자본론(Das Kapital)은 자본주의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고 따라서 마르크스론자들이 자본주의를 바라볼 때 자본주의를 똑바로 인지하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만연히 확산된 프라우드의 개념은 임상 심리학에 큰 혼란을 주어서 어떤 지식인 환자가 오히려 그의 심리 상담가에게 정신적 파멸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흔히 믿어지는 의견이 되었다. 그렇다면 건축의 역장(力場)에서, 근대 건축 역사가들이 근대 건축의 역사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그들은 근대 운동을 만들었다 - 근대 운동(modern movement)는 Basil Taylor가 거짓된 역사가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 그리고 현대성(modernity)의 특징인 “-ism”을 두 가지 타입으로 간략히 분류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큐비즘처럼 ‘일종의 라벨’로 사용되는데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공통적 틍징을 지니고 있는 작업들에 붙였다. 또 하나는 퓨쳐리즘과 같이 일종의 슬로건 혹은 배너로 사용되었으며, 그들의 창조물의 유사성과는 상관없이 같은 방침을 가지는 것으로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분류가 틀렸음을 입증하고 두 분류에 모두 속하기도 했던 것은 바로 - 새로운 예술사가 등장하고 처음 생긴 예술사조인 - “The New Brutalism”의 모든 특징들이었다.
이것은 예술사 탓인가? 예술사는 진보적인 영국 건축계의 생각에, 교육 방식에, 건축가들 사이에서 또 비평가들 사이에서의 일반적 의사소통 언어에 큰 영향을 주었다. RR. Furneaux Jordan가 말년에 쓴 신브루탈리즘에 대해 쓴 글은 다음과 같다. “Lubetkin은 시간을 초월하며 위대한 대가들과 이야기하지만, Smithsons 부부는 서로에게만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이 평가의 순간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신브루탈리즘은 역사의 최근 역사를 배경으로 보아져야 한다. 특히, 자라나고 있는 근대 건축의 내재적 역사를 배경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 문구의 역사는 전후에 The Architectural Review가 우연히 발견한 행운인 “신 실증주의(The New Empiricism)”에서 왔다. 이 단어는 다른 역사적 개념이었던 국제 양식(The International Style)에서 분기된 개념인 스칸디나비안 건축에 내재하던 시각적 경향성을 서술하기 위해 표현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낡은 실증주의를 역사적인 비교를 통해 구분할 뿐만 아니라 단지 ‘실증적 부흥(Empirical Revival)’일뿐인 개념과도 구분되게 만들어 준다. 이렇게 미세한 역사적 의미를 다루는 능력은 그 자체로 오늘날 역사적 방법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또한, 1950년대 초, "새로운 X-ism"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4학년 스튜디오와 건축에 대해 논의하는 다른 장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논의에 대한 열정은 공산주의자와 나머지들의 명확한 대립으로써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고 뉴브루탈리즘이라는 단어가 처음 생겨난 것도 이 활발한 논의의 어느 지점에서였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욕설을 의미했다. 그 다음에는 평지붕, 유리, 노출된 구조와 같은 근대 건축가들의 일반적 건축 언어들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만큼 뉴 휴머니즘(The New Humanism)을 크게 탈선한 것으로 여겨졌다. (뉴 휴머니즘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예상한 것과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었다.) 당시 건축계에서 뉴 휴머니즘의 의미는 벽돌, 활꼴의 아치, 박공 지붕, 작은 창문들을 말했고, 픽쳐레스크 디자인 없는 픽쳐레스크 디테일이라고 불렸다. 사실, 이는 William Morris Revival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기쁘게도 사라졌으며, Khrushchev가 정당의 건축 전열을 전복시켰기 때문이다. 이후에 뉴 휴머니즘은 다시 특정-역사적 개념을 향하고 있었으나 맠시즘의 정점이었던 19세기 중반을 향에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건축계는 아주 작아서 어떤 논쟁도 이어가기 어려웠으며, 만장일치도 나오지 않았다(마르크스 주의자들은 가끔 만장일치를 했다). 따라서 비난이 있어야 한다면 특정 계층이 아닌 특정인을 향해야 했으며, 어떤 계층도 뭉쳐지지 않았다. 맠시스트들의 원한을 샀던 뉴브루탈리스트들은 학계에서 쉽게 이름 붙여지고 인지될 수 있었다. 다른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치적 의견차는 다양하고 서로 혼합되기 어려웠으며 맠시스트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지원.) 따라서 신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는 대중에 알려지자 마자 그 의미가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맠시스트가 아닌 그룹 사이에서는 특정 프로그램과 의도(?)가 없었지만, 특정한 공동체 안에서는 특정 프로그램과 의도(?)가 있었다 - Le Courbusier를 기대하고, le béton brut를 알고 싶어하고, 이 글의 서문에 등장하는 인용구를 알고 싶어하고, 더 세련되고 미학적으로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Jean Dubuffet의 art brut과 프랑스 파리에 대한 그의 연결점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써 단어들과 아이디어들, 개성들, 그리고 불만들이 함께 등장했고, Third Program과 월간지들이 이 문구를 이해하기 훨씬 전에 그들 자신의 욕망과 대중의 동의에 의해 젊은 두 건축가들, Alison과 Peter Smithson에 의해 이 개념이 자신들의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것의 의미와 사용에 있어서 변해 갔다. 슬로건과 대중들의 면전에 퍼붓는 욕설 사이의 어떤 것으로 채용되면서, 새로운 브루탈리즘은 근대 건축(modern architecture)에 일반적인 경향성을 서술하는 라벨로서의 의미를 중단하고, 여전히 이 설명적인 라벨을 제한적인 방식으로 보유하는 동시에 프로그램과 배너가 되었다. 뉴 브루탈리즘이 현대 영국 건축의 살아있는 힘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정확한 묘사를 피하는 것은 “–주의”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업을 설명하는 ‘라벨’로써, 뉴브루탈리즘은 두 가지 다른 중첩적 의미를 가졌다. 건축적이지 않은 측면에서 용어는 Dubuffet의 예술, Jackson Pollock과 Appel의 어떤 측면을 서술했고, 외국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Alberto Burri의 burlap painting을 서술했으며 미국 예술가 사이에서는 Magda Cordell 또는 Eduardo Paolozzi, 그리고 Nigel Henderson의 어떤 작업적 측면을 서술했다. 마지막 두 예술가들과 함께 Smithsons는 ICA 전시에서 Parallel of life and Art를 선보였고 이 것은 뉴브루탈리즘의 a locus classicus(표준구)가 되었다. 이 전시의 건설적인 측면은 훗날 재조명되었다: 현재로서는 많은 비평가들(그리고 건축협회의 학생들)이 사진미의 전통적인 개념, 추악함의 숭배, 그리고 "인간의 영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는 것을 관찰하자. 이런 반응은 적대적 평론가들이 심지어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모르는 상태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Smithsons 부부의 건축이 영국 대다수의 건축가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인지가 건축계에 있었다.
Alison Smithson는 Soho에 디자인한 그들의 작은 집에 대한 서술을 통해 대중 앞에서 처음 뉴브루탈리즘이라는 단어를 주창했다. “공장 미학(The warehouse aesthetic”이라고 주장한 이것은, 신브루탈리즘의 의미를 아주 잘 보여준다. “이 건물에 그 어떤 실용적인 마감재 없이 구조를 완전히 노출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도였습니다. 계약은 마치 작은 창고인 것처럼 기본적인 구조의 높은 수준을 목표로 했습니다.” 1954년 여름에 다양한 건축 정기간행물들은 광범위하고 때로 다소 우스꽝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이는 간행물들이 여전히 Parallel of Life and Art 혹은 출판되지 않은 Hunstanton School에 대한 이야기를 더 했기 때문이었다. 1954 9월에 Architectural Review에서 Hunstanton School에 대한 글을 마침내 출판했을 때, 논의는 더 날카로워지고 덜 우스꽝스러운 톤으로 변했고, 이 학교야 말로 콘크리트, 철골, 유리의 근대 건축 시기에 Smithsons가 지은 유일한 건물이었다. 뉴브루탈리즘은 곧바로 이 건물에 적용되었고, 브루탈리스트들은 이 명칭을 수용했고, 그 곳이 어디던간에 Hunstanton School이 논의되는 자리에는 뉴브루탈리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Hanstanton과 Soho House는 뉴브루탈리즘이 정의되는 건축적 참조점들로써 역할을 했다. 이 두 건물들에서 관찰 가능한 특징들은 무엇인가? 구 건물 전부 형태적, 축을 이루는 평면을 보인다 - Hunstanton은 진정한 두 축선상의 대칭을 보여주고 학교를 따라 배치된 작은 체육관은 완전한 계획이 얼마나 형태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본보기이다. 이 형태성은 즉시 외부에서 식별가능한 정도였다. 둘 건물 다 그들의 기본 구조와 재료를 보여주며, 이 명백한 구조의 노출에 대한 강조는 너무 강박적이어서 많은 표면적인 비평가들은 이것을 뉴브루탈리즘의 전부로 치부할 정도였다. 사실, 그들 말대로, 기본적 구조에 대한 강조는 중요하다. Hunstanton School이 대중에게 충격을 안겨준 것은 사실 건물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들이 그대로 보여진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근대 건물들 중에 아주 차별적인 특징이었다. 재료의 솔직한 사용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던 간에, 대부분의 근대 건물들은 콘크리트와 철골로 만들어졌어도 백색도료나 특허 유리로 그것들을 가렸다. 물과 전기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파이프가 보이는 곳으로부터 나왔다. 사람들은 Hunstanton School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공간을 제외하고는 다른 볼 것이 없었다.
근대 운동(Modern Movement)이 획득해야 하는 기본적인 도덕적 당위성 중 하나에 대한 가차없는 집착 – 구조와 재료의 솔직함 – 은 오직 Ibsen의 펜이 정당화할 수 있었던 상황을 초래했다. 많은 대다수의 건축가들은 이 전례없이 갑자기 부여된 요구 사항을 면제 받기 위해 받아들여진 실무를 찾았다. (정확한 해석 안됌) 그들은 이 경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체의 특징들에 대한 요약은 다음과 같다; 1. 평면이 형태적으로 읽힐 수 있을 것. 2. 구조의 명백한 노출 3. 재료가 ‘본질적 성격 그 자체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평가. 이 요약이 Hunstanton School을 제외한 다른 New Brutalism 건물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만들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Hunstation이 다루듯이 이 특징들을 두드러지게 가지고 있는 건물은 Louis Kahn의 Yale Art Center이다. 혁신적인 구조의 솔직함, 재료의 노출, 평면의 형태는 위의 요구에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이 건물은 Hunstanton School이 그랬듯이 소박한 다소 덜 디자인된 디테일과 다소 서툼 말솜씨, 그러나 계단과 손스침과 같은 요소들의 절대적인 일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칸의 디테일은 다소 예술가인 척 하며, 난간과 손스침은 콘크리트인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다.
—> 하지만 정말 다소 서툰 말솜씨(ineloquence)가 Smithson 건물의 특징이 맞는가? 솔직한 구조와 재료와 확 트인 실내 공간은 서툴다기보다는 명확해 보인다.
이 것이 그냥 ‘단순한 디테일의 문제’에 그칠 수 있지만, 칸의 건물에는 절대적으로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다. Smithsons가 디자인한 건물들은 명백하거나 희미하게, 일관되고 이해하기 쉬운 시각적 전체성(visual entity)를 지니고 있으나, 루이스 칸은 이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그가 내부에 설치한 display screen은 건물의 프로그램적 요구에 의해 유연한 평면 구성을 담보하도록 요구될 수 밖에 없었지만, 바로 이 요소가 형태적인 명백성(formal clarity)를 위협한다. 또한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평면을 지배하는 축들(axes)을 입증하지 못한다 - 가능한 뷰 포인트들, 입구의 위치들, 외벽을 다루는 방식 - 이 모든 것들은 계획의 축선들(axes)을 잃거나 경멸한다. 프로그램에 의한 필요에 의해 입구의 위치가 정해졌고, 벽들에 대한 훌륭한 구조적 이유에서 다루어졌다면, 왜 축선의 평면들을 괴롭히는가?
—> 시각적으로 공간의 continuity를 느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왜 필수적인가.
Smithsons 부부는 디자인에 있어서 그들의 논리나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절대 비난 받은 적이 없었다. 이 논리에 대한 두드러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논리가 ‘시각적 전체(visual entity)로서 건물의 단순 명료함’에 기여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최종적으로 ‘이미지’로써 건물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우리가 지금 라벨로써의 신브루탈리즘과 슬로건으로써의 신브루탈리즘 사이의 갭을 채우려고 할 때 더욱 다루기 어려워지고 동시에 더욱 유용해지는 단어이다.
많은 것들이 “an image”로 불린다. 이미지는 모든 것을 서술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각적으로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하지만, 반드시 고전적인 미학의 기준에 의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Thomas Aquinas는 아름다움을 quod visum placet으로 상정했다. 이미지는 아마도 quod visum perturbat -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이며 아름다움에 의해 발생하는 기쁨을 포괄하는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에 대한 뉴브루탈리스트들(건축가들과 비평가들)의 관심은 만연했으며, 이 관심은 반-예술 혹은 어쨌든 단어의 고전적인 미학의 관점에 반대하는 미학이었다. 하지만 이 반응과 동등하게 중요했던 점은 이것에 대한 이유의 본질이었다. St. Thomas를 기쁘게 한 것은 추상적인 특징으로서 아름다움이었다. 이것의 전체성(totality)안에 있는 추상적 특징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간 연대의 함축이었다.
이미지의 개념이 영국의 뉴브루탈리즘의 모든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건축가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방식은 다소 놀라운 왜곡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이 방식은 건물이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시각적 전체성을 지녀야 함과 의 눈에 의해 이해되는 형태가 건물이 사용되는 경험에 의해 사실임을 보여주어야 함을 요구한다. 더욱이, 이 형태가 전체성 안에서 건물의 기능과 재료들에 완전하게 적합한 형태를 가져야 한다. 구조, 기능, 형태 사이의 이런 관계가 당연히 모든 좋은 건물의 기본이겠지만, “이해하기 쉬워야 하고 잊지 못할 형태”여야 한다는 요구가 좋은 건물을 위대한 건축으로 만드는 정점의 흔하지 않은 것이다. 이 형태가 주는 의무사항이 너무 오랜시간동안 잊혀져서 많은 좋은 건물들이 이것이 마치 건축이었던 것처럼 구전되어 왔다는 사실은 영국 건축 기준안에서 진지하게 붕괴되가는 현실이다. 이것은 너무 쉬워서 구조와 기능이 잘 받침되면 결과는 무조건 ‘건축’이 된다는 가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너무 쉬워서 의미없는 구절인 “개념적인 건물”은 routine-functionalists들의 수준 이하의 건축 관례를 방어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마치 “개념적인 건물(conceptual buildings)”이 새로웠던 것처럼, 그리고 근대 건축에서 죄악시되는 것처럼.
모든 위대한 건축은 “개념적”이다.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건물들(이를테면 고딕 케세드럴)은 구조와 기능에 대한 무명의 협력적인 관심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자란다는 것이 근대 운동(Modern Movement)가 짐을 지운 가장 서서히 퍼졌던 신화(myths)이다. 근대 운동의 모든 위대한 건물들은 개념적인 디자인이었으며, 특히 Bauhaus와 같았다. Bauhaus는 마치 그들이 “순수한” 기능주의의 생산물인 것처럼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 기능주의의 형태적이지 않은 컴포지션들은 일반적으로 Routine-Functionalism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건축적 책임감을 포기한 것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개념적인 건물은 형태가 되기 위하여 형식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Smithsons의 post-Hunstanton projects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Hunstanton의 형식성(formality)는 Philip Johnson이 지적했듯이 명백하게 Miesian이다. 왜냐하면 IIT는 젊은 건축가가 이 신념의 시기에 지향할 수 있는 개념적이고 형태가 주는(form-giving) 디자인의 몇 안되는 예시이기 때문이다. 또한 Conventry Cathedral 공모의 형식성은 동등하게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 역사적 연구의 개입을 정당하게 상정할 수 있다. Smithsons의 디자인과 Wittkower의 Architectural Principles of the Age of Humanism의 출판의 정확한 날짜 관계가 반박되었지만(Smithsons에 의해), 그들이 Wittkowerian 연구와 접점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그 연구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처럼 흥분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전후 건축 학생 세대에 대한 Wittkower 교수의 책은 Banham의 세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Alberto와 Palladio가 이해한 Cosmos를 지배하는 실증적인 법칙들에 의해 강하게 연결되는 기능과 형태가 존재하는 건축 이론들에 대한 노출은 routine-functionalist의 포기에 대한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했고, neo-Palladianism은 갑자기 유행이되었다. Architectural Principles는 단연코 neo-Palladianism을 가장 중요한 기여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훌륭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질문들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 되었다: 인도주의 원칙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인문주의 원칙을 우리가 앞으로 찾아야 할 원칙의 예시로 들 수 있을까? 많은 학생들이 전자의 대안을 찾았고, Routine-Palladians는 Routine-Functionalists들처럼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Brutalists들은 순수한 학제주의로의 돌아가는 일이 가지는 내재적 위험성을 관찰하며 (AA 보다는 Liverpool에서 더 선명해졌다) 재빨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얼마 안가 Parallel of Life and Art 조직에 탑승했다.
전시를 AA 학생 토론에 소개하면서, Peter Smithson는 선언했다: 우리는 프로포션과 시메트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않겠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스탠스를 Palladio와 Alberti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Plato와 the Absolute에도 둠으로써 crypto-academicism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정당화 되었는지 명확하게 만드는 anti-Brutalist들과 neo-Palladians들의 내재적 academicism들의 전쟁에 대한 그의 선포였다. 브루탈리스트 건축 발명안에서 새로운 방향성은 한때 Smithsons의 Golden Lane과 Sheffield University competition entries에서 보여졌다. 전자의 작업은 street-deck을 영국의 순환 구조에 돌려 놓는다는 아이디어로써 기억되어지면서 시각적 순환, 식별 가능한 주거 유닛, 전체 이미지의 일부로써 인간의 존재를 강조하는 비-형식적인 도구에 의한 일관된 이미지들을 사용했다는 것에서 중요하다. 퍼스펙티브 이미지들은 드로잉들에 붙여진 사람들의 사진들이 있었고 따라서 인간의 존재가 거의 건축을 압도했다. (그냥 렌더에 사람 많이 넣었다는 뜻)
하지만 Sheffield 디자인은 이것 보다 더 멀리 갔다. aformalism은 긍정적으로써 Burri 혹은 Pollok의 그림들에서 처럼 이것의 콤포지션에 있어서 힘을 가졌다. 컴포지션은 레이아웃 상에서 명백하게 캐쥬얼한 아주 강력한 언어로 보이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개념적인” 디자인이다, 그리고 컴포지션을 가지도록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위상배치의 직관적 감각처럼 가장 건축적인 컴포지션을 강조한 기본적 rule-and-compass 지오메트리를 기반으로는 불가능하다. 건축 위상배치의 원리가 항상 종속적이고 인지 불가능한 방법에서 존재한 것 처럼 - 관통의 특징들인, 서큘레이션, 내 외부이 항상 중요했다면, 하지만, 기본적인 플라톤 지오메트리(Platonic Geometry)는 대가의 워칙들이었다. 지금, Smithsons의 Sheffield 프로젝트에서 규칙들은 반대로 되어있다. 위상 배치는 더 지배적이고 지오메트리는 원칙에 종속한다. 서큘레이션의 “연결성”은 외부에서 풍부하고 전반적인 스킴에서 기하학적 형태를 주려는 시도는 만드렁지지 않았다; 거대한 위상학적으로 유사한 공간들의 블락들이 Martello 타워가 서있는 것처럼 품위없는 기억성(memorability)를 가진다.
이런 지배성은 위상 배치와 호합한다. 이 분류법에서 벽돌은 당구공과 같은 성질(뚫을 수 없는 고체)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같은 형태(”shape”)이며, 찻잔과 축성기는 하나의 구멍과 연속적인 면을 가진다는 점에서 같은 형태이다. 이 위상 배치(topology)와 화합된 지배성(dominance)는 토마스 학파의 “beauty”를 대신한 브루탈리스트들의 “image”와 유사점을 가진다. 그리고 Ssheffield는 Une Architecture Autre를 찾으려는 브루탈리스트들에 의해 닿을 수 있는 가장 일관되고 극적인 지점으로 남는다. 이것은 건축 논의에서 Hunstanton을 뉴브루탈리즘의 최선의 예시로 대신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 건물은 Parallel of Life and Art의 희망과 위협에 완벽하게 매치하는 유일한 건물 디자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Hunstanton의 형태적 축선이 뉴브루탈리즘 건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준다. Miesian 또는 Wittkowerian 기하학은 “Images”를 구현하기 위한 즉석에서 마련된 장치이며, Parrel of Life and Art가 브루탈리스트들이 기하학 이외의 어떤 것에 있어 시각적인 세계로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게 해줬을 때, 형태성(formality)는 버려졌다. Hunstanton과 Yale Art Center에서 기인한 뷰브루탈리즘의 정의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만약 형태성이 미래의 발전을 덮고 더 올바르게 읽으려면, 형태성을 기본적 특성으로서 배재해야 한다: 1. Memorability as an image; 2. Clear exhibition of Structure; and 3. Valuation of Materials “as found.” Image가 감정에 영향을 준다는 것 그리고 구조가 이 것의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 그리고 as found로써 재료가 원자재(raw material)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이 글의 글머리에 쓰인 인용구로 돌아가야 한다. “ L’architecture, c’est, avec des Matières Bruts, établir des rapports émouvants”,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 대한 인지와 뉴브루탈리즘이 Lubetkin의 것도, 과거의 어느 대가의 것도 아닌 우리 시대의 건축이라는 지점까지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브루탈리스트들이 서로에게만 이야기를 해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Mansart에게, Palladio에게, Alberti에서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뉴브루탈리즘을 만들었다. 더 사적인 견해로는 오늘날의 건축에 큰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