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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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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11. 2022

5. 정초에 아들 친구가 오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힘드니 아이들이 오면 일 시키기 바쁘다. 단감 재포장하는 일도 두 애가 도우니 수월하다. 정초 손님인 아들의 친구도 있다. 장골 둘에 딸까지 일꾼이 셋이니 농부의 입은 귀에 걸린다. 거치적거리는 아내는 저리 가라고 밀어낸다. 봉지에 든 단감이 조금이라도 무르거나 얼은 것 같을 때 가차 없이 봉지를 뜯고 확인하는 절차가 이어진다. ‘문제 단감을 찾아내는 것에 이골이 난 전문가를 내치다니 당신 큰 실수하는 거야.’ 불안해서 애들에게만 맡길 수가 없다. 내 손을 거쳐 가야 안심이 된다.


 “딱 우리 복만큼 이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요만큼이 우리 복이요.”

 사주팔자 타령도 한다. 지난해는 단감이 얼어 손해를 봤는데 올해는 단감이 물러 손해를 본다. 단감농사를 짓는 집마다 똑같은 반응이 나온다. 단감이 전국적으로 모자라는 것도 가을 날씨가 한여름처럼 뜨거웠기 때문이란다. 설익은 감을 땄어야 했을까. 토마토는 설익은 푸른 것을 따서 비닐하우스에 하루쯤 두었다가 붉어지면 출하한다고 했다. 단감도 일찍 따서 내면 푸른 것이다. 푸른 것은 당도가 덜하다. 여자는 덜 익은 푸른 단감을 좋아하고 남자는 완숙된 붉은 단감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식감 때문일까. 나도 약간 푸른 기가 도는 단감을 좋아한다. 어쨌거나 단감농사는 농부 소관이고 농부가 원할 때 수확이 결정된다.


 그러나 저장단감으로 낼 때는 내가 한 수 위다. 문제 단감을 족집게처럼 찾아내자 농부는 ‘귀신이네.’라며 인정했다. 보통 저장단감은 11월 말부터 설 대목까지 도매상에 올리는데 자칫 잘못하면 실농할 수 있다. 저장고에 문제가 생길 때다. 올해는 가을 날씨가 뜨거웠던 탓에 단감 자체에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단감이 빨리 물러지는 기현상이 발생한 거다. 저장고에 오래 둘수록 재포장해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일주일에 세 번 도매상에 올리기 전에 비상이 걸렸다. 겨울 한파도 문제가 안 된다. 다섯 개들이 단감 봉지와 씨름을 한다. 손가락 감각이 예민해진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감각이 없다.


 단감을 빨리 내버리자. 오래 두면 손해겠다.

 그러면서도 농부와 할 수 있는 물량 이상을 해내긴 힘들었다. 마침 애들이 왔고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코로나 핑계 대고 가족여행은 당일치기로 잠깐 다녀오기로 하고 애들을 부려먹기로 했다. 우리 애들은 일솜씨 하나는 끝내준다. 저장고에 든 단감을 몽땅 꺼내 재포장하기로 했다. 문제 있는 단감을 골라내고 새로 포장만 해 놓으면 도매상 올릴 때 수월하다. 청년 세 사람에 우리 부부가 합치니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이다. 


 너희들 때문에 올해 단감 판매도 마무리 지었구나. 두어 번 나누어 올리면 되겠다.

 저녁은 쇠고기 샤부샤부에 진 토닉으로 분위기가 달구어졌다. 아들 친구가 귀한 술도 사 왔다. 다섯 식구가 두레상 주변에 빙 둘러앉으니 집안이 훈훈하다. 거실의 난로는 후끈 달아오르고 술잔 부딪는 소리, 웃음소리도 지붕을 뚫는다. 밝은 기운이 우리 집으로 쑥쑥 밀려오는 느낌이다. 그래, 올해도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원하는 일들 술술 잘 풀리는 해가 되도록 기도한다. 아들의 친구도 ‘어머니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한다. 아들의 대안학교 동기다. 대학생일 때 휴학계를 내고 2년 동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사이다. 둘은 호주에서 고생도 많이 하며 든 정이라 그런지 참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보통 친구보다 진한 인상이다. 


 귀한 손님인데 중노동을 시켜 미안해라. 고생했다.

 엄마, 걱정 마세요. 이 친구는 힘 좀 더 써야 해요.

 정초에 집에 온 손님에게 중노동을 시켜 미안하다는 내게 아들은 전혀 미안할 것 없단다. 온종일 컴퓨터만 하는 친군데 몸 좀 풀어줘야 한단다. 두 청년이 참 든든하다. 나는 그 친구를 작은 아들로 부르기로 했다. 아들보다 생일이 늦다. 작은아들은 일철에 불러달란다. 언제든 기꺼이 시간 내서 오겠다며. 젊음이 좋다. 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도 개운할 수 있기에 노동의 신성함을 운운하는 것이겠지. 농부랑 나는 이미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것,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 그래서 정초에 온 아들의 친구가 더 반가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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