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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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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16. 2022

6. 먼 그리움

 미루고 미루던 이불을 빨았다. 무거운 것을 들면 허리에 무리가 간다. 가능하면 안 들려고 한다. 정초에 애들 있을 때 이불빨래를 하려고 하자 농부는 ‘겨울 지나고 해라.’ 잘라버렸었다. 뭐든지 마음먹으면 해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똥 누고 뒤를 안 닦은 것처럼 날마다 찝찝했다. 이불빨래하는 꿈까지 꿀 정도가 되었다. 농부가 집안에서 빈둥거린다. 기회는 이때다.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렸다.


 이불 빨래하나?

 당신 있을 때 하려고. 나 무거운 것 들기 힘들잖아.


 살짝 애교까지 부렸다. 덕분에 오전 내내 세탁기는 고생했다. 햇살도 좋고 포근하다. 해동을 한 것일까. 소한 지났으니 대한 추위가 남긴 했다. 다음 주에 또 한 차례 한파가 온다지만 며칠 상간이다. 매화 봉오리 도드라지는 것을 보니 봄소식도 멀지 않았다. 농부는 붓을 잡고 앉았다. 제법 폼이 난다. 복지회관에서 서예를 배우기로 했다. 


 서재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십 년도 더 된 붓과 벼루, 서책이 나왔다. 처녀 때 서예와 사군자를 배우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시집올 때 챙겨 왔지만 한 번도 펴보지 못한 것들이다. 벼루는 귀퉁이가 깨졌고, 붓은 삭았다. 농부는 그것을 아쉬운 대로 썼다. 새것으로 장만하라고 했지만 돈이 많이 든다면서 당분간 써보겠단다. 


 아버님 쓰던 것 버렸을까?


 시아버님은 몇 년 전까지 붓글을 썼었다. 붓걸이부터 서예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화선지도 뭉텅이로 있지 싶었다. 언제부턴가 시부는 죽음에 잡히시는 것 같았다. 당신이 쓴 글을 액자에 넣고 병풍을 만들기 시작했다. 5남매에게 병풍 한 점씩을 주셨다. 집안 가보로 간직하라고 했다. 가훈 역시 액자에 넣어 돌렸다. 친구들, 이웃에게도 뿌렸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든가. 묘하게 칠팔십 대를 넘어가는 노인 대열은 뭔가 남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았다. 이름 없는 촌부로 살아도 이 땅에 왔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연일까.


 농부는 시댁에 다녀왔다. 최고급품 붓과 벼루를 챙겨 왔다. 시아버님이 가져가라 하더란다. 아흔이 지나면서 붓을 손에서 놓은 시아버님이다. 평생 촌부로 사셨지만 시아버님은 농부가 아니었다. 분재를 키우고, 붓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여름에는 죽부인 끼고 모시 한복 환하게 입고 오토바이 타고 전국 유람을 했던 노인이다. 평생 머슴으로 하녀로 시부의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었던 사람은 시어머님이다. 시부 덕에 건강식을 하셔서 그런지 치매노인이지만 아직 건재하시다. 


 농부는 줄 긋기부터 연습한다. 나도 슬쩍 옆에 끼어 붓을 잡아본다. 젊어서는 참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했었다. 테니스, 탁구, 볼링, 등산, 붓글, 그림 등등. 농부가 같이 배우러 다니자고 하지만 고개를 젓는다. 남은 나날 내가 매진해야 할 것은 글쓰기다. 남은 영혼을 불사 할 정도로 깊은 몰입을 꿈꾼다. 이것저것 취미 생활하기에는 이미 체력이 달린다. 농부는 농사꾼 퇴직했으니 그동안 하고 싶은 것들 찾아가며 섭렵해 보는 것도 생기 있게 사는 일이다. 나는 이미 파는 우물이 있으니 더 깊이 파보고 싶을 따름이다. 


 숲이 깨어날 준비를 한다. 향긋한 이불을 뒤집어 널며 코를 벌름거린다. 바람의 향기가 맑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서 잃어버렸던 젊은 날의 삽화가 떠오른다. 먼 그리움이다. 처녀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것들을 떠올려본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들, 아스라한 것들, 모두 먼 그리움이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한 것들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들임에는 틀림없다. 좋은 추억도 나쁜 추억도 모두 나의 것이기에 먼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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