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편소설>
텃밭
꿈에 그를 봤다. 그는 웃으며 걸어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럿이 여행을 갔고, 나도 그 일행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다녀간 듯싶은 눈에 익은 풀밭이 푸르게 펼쳐진 평원이었다. 그런데 푸른 풀밭에 물이 잠잠했다.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풀밭을 걸어 그가 왔다. 그는 나를 마중 왔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풀밭을 걸었다. 맑은 물이 찰싹거리며 발등을 적셨다. 그러더니 물은 자꾸만 차오르고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빠!’ 그를 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안간힘을 쓰면서 자꾸만 오빠를 불렀다. 그가 저 멀리 물 가운데 서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고 허우적거렸다. 내가 허우적거릴수록 물은 자꾸만 차오르고 그는 자꾸만 멀리 갔다.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오빠 안 돼. 돌아와. 오~ 오~ 빠’
“오빠아!”
눈을 번쩍 떴다. 몸은 물에 적신 솜처럼 무거웠다.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지만 다시 잠을 자기엔 글러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깨어 있을까?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까?’ 나는 침대 맡에 일어나 앉은 채로 그를 생각하다가 옆 탁자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전화기 옆에 있는 시계를 봤다.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잠이 많은 그를 깨울 수가 없어 일곱 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이 시끄러웠다. 도시가 깨어나고 있었다. 차가 씽씽 달리는 소리, 빠앙 하는 경적 소리로 분주하게 아침을 열고 있었다. 왈칵 짜증이 났다. ‘귀마개라도 사다 두던지 해야지 원.’ 혼자 투덜거렸다. 도시 구획정리가 잘 된 도심 속 대로변에 위치한 아파트 건물 3층에선 소음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소음들은 이미 오래전에 익숙해진, 어쩌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소리였지만 오늘 아침엔 귀를 막고 싶다.
나는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되짚어 보면서 끝임 없이 그는 왜? 왜?라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이런 소음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텃밭에 씨를 뿌리고, 화단에 꽃을 심어 가꾸는 즐거움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예전엔 그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우리가 부부인가도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가끔 한 이불속에 누울 때도 그는 딴 세상 사람 같았다. 그의 몸에선 시큼한 거름 냄새가 났다. 어떨 때는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와 십 수년을 살을 맞대고 살았지만 그는 벽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떻게 생기셨을까? 그의 모습 중 어떤 부분이 시어머니를 닮았을까? 시아버님을 닮은 구석이 별로 없으니 시어머니를 빼 박았는지 몰라. 왜 그는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 것일까.
훤하게 밝아오는 도시의 아침을 바라보며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 다이얼을 누르며 제발 그가 기분 좋게 받아 주길 바랐다. 전화기에선 뚜 뚜 신호음만 반복되더니 ‘지금은 외출 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용건을 간단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메모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또 어딜 간 걸까? 바람 같은 사람이라 그러려니 여기고 싶어도 나는 늘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날 오후였다.
나는 가게에 나가서 카운터 앞에 있었다. 주방에서 과일과 마른안주를 챙기는 미스 정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무료하게 앉아 새벽꿈을 생각했다. 그는 어딜 갔을까? 아침 산책이라도 나갔던 것일까? 다시 전화를 해 볼걸 그랬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삐거덕’ 가게 문 열리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순간 물 묻은 손으로 콘센트에 코드를 꽂다가 찌릿하고 전기 충격에 깜짝 놀란 것처럼 멍청해졌다. 거짓말처럼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꿈에 본모습 그대로 내게 왔다.
이젠 헛것이 보이기도 하네.
나는 눈을 비볐다가 다시 떴다. 싱긋이 웃음을 띠고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다.
가끔 꿈과 현실이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나 자신이 무서워진다. 소리도 냄새도 없이 다가오는 바람의 힘을 감지한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 난 옛날 그대로의 나야, 그가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나는 가끔 꿈과 현실을 혼동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아침인가 싶어 밖을 내다보면 저녁일 때가 많았다. 저녁이구나 싶어 시계를 보면 새벽이었다. 그가 없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은 시계도, 달력도, 하늘도 쳐다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다. 벼랑 끝은 광활한 무채색의 어둠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저녁은 무얼 먹을까?”
그가 몰고 온 바람이 나를 벼랑 아래로 밀어뜨릴 것 같아 바짝 긴장한다.
그러나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내가 섰던 벼랑을 평지로 만든다.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강을 딱 멈추게 하고 축대를 쌓아서 튼튼한 제방을 만들고 그 위에 늘 다녔던 길을 만든다. ‘저녁은 무얼 먹을까?’ 그럼 우리 점심은 무엇을 먹었지? 그와 내가 점심을 같이 먹어 본 지가 언제인가. 적어도 두 달? 석 달? 족히 그쯤은 되었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낮에 같이 점심을 먹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뭐 해 줄까? 먹고 싶은 거 말해.”
나 역시 일상처럼 반문한다.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마다 한 이불속에서 잠들고, 한 이불속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대화를 한다.
“당신이 해 주는 음식은 뭐든 다 맛있어.”
그는 천진스럽게 웃는다. 그 눈빛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맑다.
“이번엔 며칠이나 있을 거야?”
결국 나는 그렇게 묻고 만다.
“몰라.”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미스 정에게 가게 일을 일임하고 가게를 나온다.
밖은 벌써 어둠에 푹 파묻혔지만 도시의 밤은 낮보다 더 현란하고 화려하다.
우리는 말없이 걸어 가게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아파트촌으로 진입한다.
“그 새 나무가 많이 자랐네?”
그는 아파트 앞의 화단을 보고 느릿느릿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다.
나는 못 들은 척 아파트 3층으로 향한다.
아파트 문을 여니 데미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밤마다 혼자 집을 지키던 애완견 데미가 낑낑거리며 그에게 뛰어오른다.
“아빠 왔다. 우리 강아지 잘 있었어?”
그는 날마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처럼 스스럼없다.
나는 부엌으로 향하며 자꾸만 데미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길고 푹신한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데미를 공중 그네 태우며 좋아서 죽겠다는 시늉을 한다. 저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이 맞는 것일까? 문득 의문이 든다. 외모나 하는 행동은 일 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분명 그에게선 낯선 분위기가 느껴진다. 내겐 너무나 낯선 느낌인데도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우수 같은 것이랄까.
나는 그가 좋아하는 감자수제비를 만들면서 생각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농촌 살이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곳에 어머님이 사시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고향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흔여덟 평 아파트가 좁아서도 아니요, 갖출 것 다 갖추어진 외형에 질려서는 더욱 아니리라.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알 수 없다. 아이가 있어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를 힘들게 하는 일은 더더구나 없다. 그는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하면 무엇이 그를 자꾸만 옹색하고 볼품없는 그 골짝의 헌 집을 내 집보다 더 사랑하게 만든 것일까. 밤낮으로 쥐가 들락거리고, 지네가 기어 다니고, 크고 작은 나방과 벌레들이 소름을 끼치게 하는 그 낡은 집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가 말했다. 당신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당신이 없는 그 긴 시간을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신기하다고. 만약 당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삶을 완전히 포기해버렸을 것이라고. 진심일까?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게 아닌가.
그는 두서너 달 만에 집에 오면 다음날 벌써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을 한다.
“며칠 푹 쉬었다 가. 자기 좋아하는 것 많이 해줄게.”
“이상하게 잠이 안 와.”
내가 붙잡으면 마지못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견디지만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당신 슈퍼에 가서 담배 좀 사다 줄래?”
“그러지 뭐.”
그가 담배 심부름을 시키면 벌써 감을 잡는다. 그는 집을 떠날 것이다. 나의 배웅이 짐이 되기 때문에 늘 보이지 않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처음 몇 번은 나도 그의 심부름에 속아 담배도 사고, 그가 좋아하는 군것질 거리를 잔뜩 사서 집으로 오곤 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자기야! 문 열어.’를 서너 번 반복하다가 그 새 잠이 들었나 보다며 예비 열쇠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서면 집안은 언제 사람이 있었느냐는 듯이 말끔하게 비워져 있곤 했다. 저녁에 머구 골로 전화를 하면 어김없이 그가 받았다.
“사람이 어쩜 그래? 말도 안 하고 가 버리고.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나는 원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하소연을 늘어놓지만 그는 그저 전화기 저 편에서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너 얼굴 보면 또 못 올 것 같아서. 미안해. 밥 꼭 해 먹어라. 나 없다고 굶지 말고. 쌀에 좀이 슬었더라. 왜 그렇게 밥을 안 해 먹어? 혼자 있을수록 잘 챙겨 먹어야지. 아프면 어쩌려고?”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 같이 있음 되잖아.”
“내가 병나면 당신이 더 힘들잖아.”
어떤 때는 친구 만나려 간다며 나갔다. 배웅하고 돌아와 안방에 들어가 보면 화장대 앞에 이런 쪽지가 남겨져 있곤 했다. <나 촌에 간다. 너 혼자 있어도 괜찮겠지? 같이 갔으면 좋으련만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라.>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든다. 그런 집에선 하룻밤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그가 무엇 때문에 농촌 살이에 집착하는지 알고 싶어서 두어 번 따라간 적이 있다. 텃밭에 심어 둔 고추도 따고, 깻잎도 따서 마루에 앉아 일회용 가스레인지를 놓고 작은 무쇠 솥뚜껑을 얹어 돼지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그러나 밤이 무서웠다. 그는 옆에서 곤하게 잠이 들어도 나는 천장에서 지네가 떨어지는 상상을 했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듯 천장에서 우당탕거리는 쥐들의 난리 굿판을 들어야 했다. 또한 고양이 울음은 어떤가. 처음엔 밤에 웬 아이가 저렇게 애처롭게 우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옆집엔 어떤 여자가 살기에 아이만 두고 밤이슬을 맞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고양이 우는 소리다.’그 순간 내 등줄기엔 찬물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고양이가 울어도 쥐는 제멋대로다. 어디 고양이 울음뿐인가. 캑캑거리는 소리, 깨갱거리는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댓잎 소리, 무엇 하나 스산하지 않은 게 없고, 부산스럽지 않은 게 없는데 무엇이 좋다는 것일까. 밤새우는 소리조차 기괴했다.
“무섭지 않아?”
“조용해서 좋잖아.”
“전혀 조용하지도 않건만.”
“여기 소음은 아무리 들어도 신경을 날카롭게 하지 않아.”
“난 잠도 못 자는데.”
내 말에 그는 씩 웃으며 농촌과 도시의 소음은 그 질에 있어 전혀 다른 맛이라고 했다. 도시의 소음은 짜증과 분노를 드러내게 하고, 감정을 앞세우게 하지만, 농촌의 소음은 들을수록 짜증을 가라앉히고, 분노를 삭이는 묘한 마력이 있다는 것이다. 농촌 사람들이 느긋하다는 것은 자연의 힘이라는 것이다. 시골에서 듣는 자연의 소리는 아무리 자지러져도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 주는 묘한 마력이 있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겐 낯선 그림이다.
그렇다고 그가 도시에 살면서 짜증 낼 일이나, 분노할 일이 있느냐 하면 아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면 나는 그의 점심 겸 저녁을 챙겨 식탁 위에 올려놓고 집을 나서곤 했다. 새벽에 들어오거나 아침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언제였던가.
그와 다시 합치기로 하고 내게 남은 돈으로 아파트를 장만하고 조그마한 간이주점을 열었을 때다. 시동생 집에 얹혀살던 그가 짐을 챙겨 집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그는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친구들이 직장을 잡아 주려고 애를 써도 그는 싫다고 했다. 그냥 방구들만 지고 있거나 등산을 다니거나 하며 백수 신세였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벗어난 내게 그는 옆에만 있어도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나를 불러 앉히더니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한 3년만 당신이 생활비 책임져 줄 수 있어?”
“그건 어렵지 않은데 왜? 아니 그럴게. 그동안 당신 너무 힘들었어. 좀 쉬는 것도 좋겠지.”
“힘들지 않겠어?”
“먹고살 만큼은 있잖아.”
“그건 당신 거잖아.”
“어째서? 당신이 벌어다 준 거지.”
“고맙다.”
“뭐가?”
그는 빙긋 웃었다.
그랬다. 그는 결혼 15년 동안 나를 위해 살았다.
건축업을 했던 그는 줄을 잘 탔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탓인지, 인덕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초창기에는 승승장구했다. 둘이 살면서 60평짜리 아파트도 좁다고 투정할 만큼 나는 철부지였다. 아이가 없던 나는 그와 나를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의 취미가 승용차를 바꾸는 것이라면 나는 도자기를 사 모으는 일이었다. 그의 차는 국산 최고급에서 외제 스포츠카나 지프차로 바뀌어 거리를 활보했고 나는 아파트 안에 온갖 종류의 비싼 도자기로 채웠다. 도자기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진열장을 채웠다. 나는 그날의 기분에 맞추어 새 도자기에 갖은 모양의 음식을 만들어 담아 놓고 그가 오길 기다리는 것을 즐겼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내 음식 솜씨와 청소 솜씨는 에이플러스란다. 창틀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침대 모서리 어디에도 먼지 한 톨 없어야 한다. 나는 하루 종일 네모 상자 속을 쓸고 닦고, 만드는 일만으로도 하루해가 짧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그러니 삼신할미도 아이를 점지해 주기가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우린 늘 둘만의 삶을 꾸미길 원했다. 아이는 번거로운 존재다.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있을 때는 아이가 생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에게 콘돔 사용을 권했다. 그는 처음 몇 번은 내 의사를 존중한다는 식으로 콘돔 사용을 하더니 도저히 못하겠다며 콘돔 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이번엔 나였다. 피임약을 먹었다. 하루 이틀은 지켜졌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건너뛰기 일쑤니 먹지 않는 것보다 못했다. 둘 다 깔끔이였던 우리에게 피임약도 콘돔 사용도 신경만 날카롭게 하는 것이었다. 당분간은 아이가 생기면 산부인과에 가서 지우기로 했다.
그러나 결혼 5주년이 지나도록 나는 임신하지 않았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산부인과를 찾았다. 의사는 아무 이상 없다며 엄마가 될 자격은 충분히 갖추었으니 이젠 슬슬 아이를 가지라고 충고했다. 신혼이 너무 길어도 좋지 않다며. 그에게 병원 간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아이를 한 명쯤 가져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피식’ 웃으며 아이가 없어도 우린 충분히 행복하지 않느냐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조금씩 우울해져 갔다. 그를 따라 신나는 파티 장을 들락거리는 것도 싫어졌고, 백화점이나 수입 상품 코너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도 싫어졌다. 나는 이유 없이 자주 짜증을 내서 그를 성가시게 했고, 그는 차츰 일을 핑계로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일주일에 닷새 정도는 술에 만취되어 들어오거나 아예 호텔에서 잠을 잤다. 60평 아파트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IMF가 터졌다. 대기업이 속속 도산하면서 건축 자재 하청 업체였던 그의 회사가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공주처럼 물건 사들이는 것, 쇼핑하는 것으로 하루해를 보내던 내겐 청천벽력이었다.
“너, 어디든 있다가 와라. 일이 이 지경으로 된 것은 내 탓은 아니다만 시국 탓해봤자 소용없고, 너 내 옆에 있다간 말라죽는다. 오빠네든, 친구네든 가 있다가 잠잠해지면 내가 연락 하마. 법적으론 우린 이미 남남이다.”
나는 하루아침에 이혼녀가 되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한 후였다. 내 앞으로 집문서와 재산을 돌려놓았고, 나도 모르게 우린 법적으로 이혼한 상태였다. 이혼, 웃겼다. 한 번도 그랑 헤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내게 ‘우린 이미 남이다’라는 그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이렇게 쉬운 게 이혼인가. 혼자 끼들 끼들 웃었다.
그러나 쉽게 집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잠적을 해 버렸고 집에서 고스란히 당하는 것은 나였다. 내 아기처럼 애지중지 쓰다듬던 도자기나 밍크 같은 고급 옷은 깡그리 빼앗겼다. 미친 벌떼처럼 달려들어 집안의 모든 살림과 내 몸에 걸친 값나가는 껍데기란 껍데기는 몽땅 벗겨가는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늑대 같았다. 그들 속에는 평소에 형님 아우님 하며 친하게 지내던 남편의 친구 부인도 있었고, 형님, 형님 하면서 남편을 친형처럼 따르던 후배도 있었다. 문어발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식구들이 하나같이 등을 돌리고 오직 ‘내 돈, 내 돈 내놔’였다. 내가 저런 인간들과 희희낙락하며 즐겼던가 싶어 진저리를 쳤다.
몇 달 동안 내가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알 리 없이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떼거지처럼 몰려와 난리 굿판을 피우며 집안에 들어와 앉았던 빚쟁이들도 서서히 지쳐갔다. 그들은 내게서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물러났다. 나는 그가 괘씸했다. 나에겐 의논 한 마디 없이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 버리고 잠적한 그가 미웠다. 아무리 나 보고 피하란 말을 했지만 난 오랫동안 그의 생활방식에 길들어 온 사람이었다. 그가 하자하는 대로 따라 살던 여자가 갑자기 혼자 살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우선은 큰 집이 짐이 되었다. 오빠에게 부탁해서 집을 처분했다. 그 돈은 고스란히 통장에 넣어 놓은 채 혈혈단신으로 동해안 쪽으로 올라갔다. 그와 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그리곤 바닷가에 인접한 작은 도시에서 3년 동안 묻혀 살았다. 막상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정 붙이고 살다 보니 그가 더 그리웠다. ‘아이라도 있었으면.’ 나는 아이를 그리워했다. 처음엔 아이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홀가분하게 여겨졌지만 나중엔 아이라도 있었음 그랑 나랑 이렇게 쉽게 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조차 깡그리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리라 작정하고 떠난 길이지만 막상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더욱더 그가 그리웠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너무도 절실히 깨달으면서 나는 다시 그를 찾아야 했다.
그는 말없이 나를 받아들였다.
우린 스물일곱 평짜리 아파트를 구해 신접살림에 들어갔다. 내가 종적을 감춘 후 그는 친구 집과 동생 집 등으로 동가식서가숙 하면서 술에 절어 살았다고 했다. 나를 찾을 생각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미 마음이 변해서 간 사람이라면 찾아 무엇하느냐고 했다. 어디든 가서 잘 살기를 바랐다는 말을 하며 울었다.
그리고 그는 백수를 자처했었다.
그는 집에서 백수 노릇을 하면서도 내 직장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어깨가 다 드러나는 롱드레스에 굽 높은 구두를 신거나, 초미니 스커트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야한 향수를 뿌리고, 파운데이션을 떡칠한 가면의 얼굴로 집을 나서도 그는 ‘우리 색시 참 예쁘다’며 손을 흔들었다.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스무 살짜리 여자애들처럼 옷을 알록달록 하게 차려입어도, 배꼽 티를 입어도 ‘당신은 참 소녀 같아.’하면서 웃었다. 배꼽이 예쁘다며 배꼽 걸이를 하고 다녀보라며 권하기도 하는 남자다. 술 취한 남자들의 행동이 얼마나 난잡하고 추접스러운지 이야기해도 ‘남자들은 다 그래. 오죽하면 술 먹으면 개라 할까.’하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리 가게 궁금하지 않아?”
“내가 들락거리면 매상에 지장이 있을 거야.”
“기둥서방이라 하지 뭐.”
“기둥서방이 맞지.”
“뭐!”
“하하 농담이야.”
그러던 그가 거짓말처럼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날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