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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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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ug 09. 2022

54. 그곳, 상림 숲

그곳, 상림 숲     



 함양 상림 숲에 갔다. 마사토가 깔린 숲길을 걷는다. 사람들 발길로 반듯해진 길이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신을 들고 발바닥 온기를 느끼며 걷는 것도 즐겁다. 숲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쳐 놓은 줄 너머에는 검은 흙이 축축하다. 독버섯도, 식용버섯도 눈에 띈다.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는 오랜 연륜을 자랑하듯 하늘을 받치고 있다. 툭 불거진 옹이자리가 촌로의 손마디 굳은 살 같다. 


 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다. 바람이 선들선들 지나갈 때마다 숲은 싱그러움을 선사한다. 가까운 곳에서 맑은 물이 흐른다. 탁족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무더운 여름 하루를 온전하게 숲에서 보내는 일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말이라 나들이객이 제법 많다. 연꽃 밭과 보랏빛 라벤드 꽃밭과 이름 모르는 키 작은 꽃은 타국의 꽃이지 싶다. 


 그곳은 몇 년 전에 나를 화나게 했던 곳이다. 넓은 숲을 온통 막아놓고 보초를 세워놓고 돈을 받았었다. 넓디넓은 연꽃 밭을 메워 남의 나라꽃들로 치장해놓고 지자제 장은 멋지다고 놀러오라고 자랑이 늘어졌었다. 입장료는 비쌌고, 다리 아픈 노인을 거부하는 자리였다. 긴 숲을 에돌아 다니다 맛 집에도 못 들리고 발길을 돌렸었다. 공원은 휴식공간이다. 누구나 와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개방한 자리여야 한다.


 연리 목 앞에 섰다. 다른 나무끼리 사이좋게 붙어 자라는 거대한 나무를 보며 부부를 생각한다. 남남끼리 만나 가정을 이루고 노인이 된 부부를 반추한다.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본다. 서로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애면글면 하며 살아온 날도 추억이 된다. ‘점심 뭐 먹을까?’ 한 마디에 ‘나가자’던 그는 행선지를 비밀에 붙이고 함양으로 달렸다. 언젠가 먹었던 아귀찜 맛 집을 찾아 들었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와 상림 숲으로 산책을 나온 길이다.


 숲길을 걷다가 긴 의자에 앉아 다리쉼을 한다. 오가는 사람들 표정도 밝다. 건강을 위해서든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든 누군가와 숲길을 걷고 꽃을 감상하고,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생기 있는 하루가 되지 않을까. 관광객을 위해 잘 다듬어두고 잘 관리된 상림 숲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 마음까지 벅찼다. 숲만 벗어나면 후덥지근하지만 어쩌랴.

 숲길을 나와 연꽃 밭을 거닌다. 사진도 찍었다. 곱게 치장한 중년 여인 서너 명이 연꽃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참 아름답다.’고 한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가장 재미없고 천박한  칭찬이다.’고 한 수전 손택을 생각한다. <문학은 자유다>에서 ‘아름다움에 대하여’ 쓴 글에 있는 말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예술 작품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죽었다는 뜻’이라고 했던가. 연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니 아름답다고 감탄해도 되지 않을까.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낙을 본다. 목이 터지게 아이스크림을 사라고 호객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원래 아이스크림 같은 단 음식을 싫어하는 나는 관심조차 없었다. 난전에 전을 벌인 농산물에만 관심이 쏠리는데 ‘이거 먹어라.’ 그가 아이스크림을 쑥 내민다. 내가 양파를 살까말까 망설이는 사이 그는 아이스크림을 사러갔던 것이다. ‘얼마?’ 묻자 ‘한 개 2천원이라더라. 너무 비싸다고 돌아서니까 두 개에 2천 원 주고 가라네.’ 물건 깎을 줄 모르는 사람이 웬일인가. 


 양파를 파는 아주머니 얼굴이 촌부의 얼굴이다. 아직 얻은 양파가 반 망이나 남았지만 그냥 한 망 샀다. 양파 값도 고공행진이다. 한 망 사 두면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다. 내 또래 아낙 두엇이 지나가다 가격을 묻는다. 비싸단다. ‘시장에 가서 양파 안 사 보셨어요? 이거보다 좀 굵지만 20키로 한 망에 35천 원쯤 해요. 이건 만 원입니다. 싼 편이죠. 이 정도 굵기의 양파가 오래 보관돼요.’ 내가 양파장사꾼 같다.


 시집 온 이래 평생 가정주부로 살아온 나는 나들이 길에도 길거리 농산물에 눈길이 간다. 직접 농사지어 팔려 나온 촌부는 첫눈에 알아본다. 좋은 양파는 수매를 해도 제값을 받지만 중간 크기나 자잘한 것은 제 값을 못 받는다. 한 망에 만 원이라 해도 남는 장사다. 그렇다고 애써 농사지은 것을 썩힐 수도 없다. 집에서 먹어 치우는 것도 한 계가 있고,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눈치가 보인다. 왜? 농촌의 인심은 예로부터 손님은 좋은 것을 주고 주인은 못 생기고 흠 있는 것 먹는 것을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야가 간도 크다. 저리 큰 걸, 저리 잘 익은 걸, 겁도 없이 뚝 따와?” 

 “오메, 우리가 애써 키운 건데 가장 좋은 것부터 맛 봐야지예.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도 있는데. 사 먹지는 못하지만 있는 것 맛은 봐야지예.”


 비닐하우스에 수박과 메론 농사를 지을 때다. 잘 익고 가장 예쁘고 굵은 것을 뚝 따오자 시어머님은 기함을 했었다. 당찬 며느리는 주눅도 들지 않고 대꾸 했었다. 시어머님은 농사지은 것들을 항상 갈무리 해 두셨다. 마늘이든 양파든 고추든 콩이든, 찹쌀이든, 좋은 것은 항상 비축해 놨다가 오일장에 내다 팔았고 손님이 오면 들려 보냈다. 덕분에 우리 집 양념거리는 자잘하고 상품성 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좋은 것 먹자고 시어머님 속을 긁었고 퍼주기 잘하는 손 큰 며느리 살림 맡기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끝내 고방열쇠를 맡기지 않으셨다.  


 시어머님 생각을 하며 상림 숲을 벗어났다. 사람은 세월 따라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다. 만고의 진리지만 노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반추하면 쓸쓸하다. 어쩌랴. 인간의 정해진 길인 걸. 상림 숲 나들이도 시나브로 멀어지겠지만 나다닐 수 있는 지금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이번에는 숲을 제대로 즐기고 돌아올 수 있어 기뻤다. 자유롭게 숲을 산책하고 꽃을 감상하는 사람들 모습조차 생기 넘쳤다. ‘고마워. 나들이 시켜 줘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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