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야기

<끝>

by 박래여

3.

텔레비전에서는 미군이 바그다드를 향해 포탄을 장전시키고 있었다. 폭격기가 끝도 없이 날았다.

화면을 지켜보던 나는 순간 어려서 헤어진 경욱이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왼손을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그날, 그 사건이 있은 후 경욱이 네는 도시로 이사를 갔다. 경욱이 어머니는 울면서 떠났다. ‘남편은 산에 빼앗기고, 겨우 유복자로 건진 내 아들까지 병신이 되었다’며 우리 동네가 무섭고 싫어서 떠난다고 했다.

경욱이 아버지는 마지막 빨치산 소탕 작전 때에 지리산에서 전사한 걸로 알려졌다.

그 무섭고 지긋지긋하던 육이오 동란이 3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우리 마을의 전쟁은 계속되었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합작을 하여 나라를 반 동강 냈지만 지리산은 무법지대였다.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남은 공산주의자들이 지리산으로 숨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산속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고 경찰과 대치를 했다. 경욱이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회주의 지하 조직원이었다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총을 들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덕산에 인민군이 들어와 살던 한 달은 경욱이 아버지 세상이었다. 결국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을 할 때 경욱이 아버지 역시 지리산으로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다.

“그 머슴애는 청상 요절로 저거 애비 모색이었제. 씨 도독질은 못한다는 말이 따악 들어맞았던 기라.”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지만 경욱이가 태어나기 전에 소문이 무성했다고 한다. 경욱이 아버지는 인민군이 퇴각할 때 북으로 넘어 간 줄로 알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은 남편도 없는 여자의 배가 남산만 해 오자 뒷구멍으로 호박씨 깠다고 손가락질을 해 댔던 것이다.

경욱이 네가 고향을 떠날 즈음에도 우리 동네 사람들 가슴속엔 전쟁이 살아 있었다. 이미 십수 년 전에 끝난 전쟁인데도 동네 사람들 가슴엔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공화당이니 신민당이니 해서 동네 사람들끼리도 편을 갈랐고, 반목도 심했다.

전쟁의 후유증은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불신의 벽을 쌓았다.

우리 집은 동네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우리 마을에서 아버지만 유일한 공화당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타성을 가진 집이었고, 육이오 때 산사람 따라 산으로 간 가족이 없는 집인 데다 군인이었던 삼촌이 산사람에게 잡혀가 총살당한 데다 외삼촌이 전투경찰로 있다가 제대를 한 탓이었다.

그렇지만 할머님이 워낙 대가 차신 분이라 아무도 우리를 가볍게 대하지 못했다. 그만큼 할머니는 반상의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어른이든 아이든 경우에 틀린 행동거지를 했다간 할머니의 더 센 입살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리산 밑에 있던 우리 마을은 조가네 집성촌이었다. 거의가 신민당이었고, 육이오 때 산에 올라간 가족이 있는 집이 많았다. 산에 올라간 사람이란 바로 공비 즉 빨치산을 말한다. 빨치산이라거나 공비라는 말 대신 빨갱이로 불리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순박한 이웃이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지상 낙원이라는 말에 자의로 산사람이 된 사람도 있지만 억지로 끌려간 사람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를 찾아 산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우리 이웃이었다.

경욱이 아버지도 그렇게 산에 올라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삼촌은 경욱이 아버지를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4.

할머니는 전주 이 씨다.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했다. 친정이 제법 잘 살아서 시집올 때 가마 타고 살림을 바리바리 싣고 같은 또래의 계집종까지 데리고 시집을 왔다고 했다. 옛날에는 양반 상놈 구별이 엄연하니 할머니 집안에서는 할아버지가 양반가문의 자제라는 한 가지만 보고 할머니를 시집보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윗대에 통영 대부 벼슬을 지낸 집안이란 것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 집안이었지만 열여섯 살의 꽃띠 할머니는 알리가 만무했다. 집안에서 꽃수만 놓고 살던 할머니로선 세상 물정을 알 리 없었고, 시집가기 전에 남편 될 사람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시집을 와 보니 살강에 숟가락 몽뎅이 몇 개만 있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이었다. 중매쟁이의 농간에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양반 집안에서 자란 할머니는 내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계집종을 이웃 마을의 총각과 짝 지워 내 보낸 일이다. 친정에서 예물로 해준 옷이며 장신구, 금붙이 등을 처분하여 계집종을 내 보내고 논마지기를 장만하여 먹고 살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내가 ‘덕이 할매’라고 부르던 그 할머니는 오랫동안 우리 집 일을 자기 집 일처럼 돌봐 주었다.

어려서는 덕이 할매와 우리 집 관계를 전혀 몰랐다.

할머니를 늘 ‘애기 씨’라고 부르는 덕이 할매가 이상해서 하루는 할머니께 물었다.

“할매, 와 덕이할매가 할매를 보고 애기 씨라 쿠는데?”

“그리 부르지마라 캐도 버릇이 돼서 안 된단다. 에릴때부텀 할매보고 그리 불러서 그렇단다.”

“그라모 할매 이름이 애기 씬갑다.”

할머니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시며 웃으셨다.

그 덕이 할매의 아들 역시 우리 집 꼴머슴을 지냈고,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형님이라 부르며 우리 집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셨다. 이름이 일국이었지만 우리는 그냥 국이 아재라고 불렀다. 국이 아재는 아직도 고향에 사신다. 슬하에 칠 남매를 두어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돌아가신 안 어르신과 형님의 덕’이라며 늘 혼자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뵙는 분이다. 몇 년 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서럽게 우신 분도 국이 아재였다. 골목에 올라오시면서도 어린애처럼 ‘형님 형님’하시며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초상집은 또다시 눈물바다가 되었었다.

할머님이 시집 올 당시는 일본의 지배를 받을 때였다.

도시엔 일본인이 들어와 살면서 반상의 법도가 많이 무너지긴 했지만 깊은 산골이나 농촌은 반상의 법도가 엄연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임자 고상은 안 시키 끼 거마.”

할아버지는 곱게 자란 할머니께 미안했던지 그렇게 다짐을 했단다.

할아버지의 다짐처럼 할머니는 평생 들일을 모르고 사신 분이다. 농촌에 살면서도 들일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할아버지의 아내 사랑이 알뜰살뜰했다는 이야기다. 밖의 일은 일체 할아버지 몫이었다. 양반 체면에 남의 집 살이는 못 할망정 힘이 장사였던 할아버지는 부르는 곳이 많았다. 산판의 일을 한다던가, 선산에 석물을 놓는다거나 운반하는 것이며, 집터 다지는데 주춧돌을 놓는다거나 하는 공사장에서 할아버지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항우장사도 너거 할애비한테는 몬 이길 끼다.”

할머니는 가끔 할아버지 힘자랑을 하셨다. 나락 섬 섬을 한꺼번에 지고도 한 번 쉬지도 않고 십리 길을 오갔다 하셨고, 지리산에 집 대들보로 쓸 재목을 구하러 갔다가 호랑이와 쌈이 붙어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서 끌고 온 사람이라고도 했다. 술은 사구에 마셨고, 밥은 솥 채 안겨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했다.

“할매가 지낸 이야기제? 그라모 우리 할배가 임걸령이었나?”

하면서 눈을 새치름하게 뜨고 할머니께 되묻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비러묵을 년, 이박을 하모 그대로 들어줄래 기제 오데 쎄기는 박고 그라노? 너거 할배가 그만큼 힘이 장사였다 그 말이제.”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임걸령은 우리 마을 전설에 나오는 장사 이야기다. 엿장수였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임걸령은 일곱 살이 되도록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눔벵이었다. 병신자식을 둔 부부는 애가 탔지만 제 복이려니 하고 살았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엿판의 엿이 자꾸 없어지더란다. 오막살이집에 살면서 밤새도록 고아 만든 엿을 그날 장사할 만치만 가지고 나갔다. 나머지는 선반에 얹어 놓았다. 아이는 구들목에 누워 있었다. 엿 장사를 나갔다 오면 집에 있던 엿판이 비어 있곤 했다. 집에는 온종일 병신 아들만 방구들 지고 누워 손가락만 빠는데. 아무래도 도둑이 들어와 엿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한 아낙은 도둑을 잡기로 했다. 하루는 엿 장사를 나갔다가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뒤 곁에 숨어 망을 봤다. 첫날은 아무도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안심하고 방안에 들어와 엿판을 보니 역시 엿은 온데간데없었다. 며칠을 밖에 숨어 망을 봤지만 집안에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엿은 자꾸만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하여 하루는 부엌에 숨어 들어가 손가락으로 부엌문에 구멍을 내고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눔벵이 아들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품 안에서 엽전을 꺼냈다. 엽전에 무명실을 길게 끼어 머리맡에 있는 윗목에 놓인 화로에다 던졌다. 엽전이 따끈따끈하게 데워지자 그것을 선반의 엿판에 휙 던져 엿이 붙으면 꺼내어 먹는 게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아낙은 앞뒤 재 볼 생각도 않고 문을 확 열며

“요런 도독 놈을 봤나.”

하면서 방 안으로 뛰어드니 일곱 살이나 되도록 눔벵이 짓을 하던 아들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옴마, 진작 제 이름을 지어 줬으면 눔벵이 신세를 면했지 예.”

하면서 그 길로 집을 뛰쳐나갔다. 그 후로 아들은 천하를 주름잡는 의적이 되었다.

할머니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방정맞을 여편네가 조뎅이 한분 잘 못 놀려 장군 될 아를 도독 놈으로 맹걸었는 기라. 그랑께 니도 말 함부로 하지 말거래이."

할머니는 입담이 좋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빈 젖을 빨며 할머님이 조곤조곤해 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 나지 않았다. 저녁만 되면 동네 할머니들은 우리 집 안방으로 몰려들었다. 바느질감을 가지고 오거나 삼을 삼거나 하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에 넋을 빼다가 돌아가곤 했다.

틈만 나면 옛날이야기 해 달라고 조르는 내게

“이박 너무 좋아 하문 시집가서 가난뱅이로 산단다.”

하시면서도 할머니의 입담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할머니는 서른에 혼자되셨다. 고만고만한 어린 세 아이를 데리고 혼자된 할머니는 그제야 세상 무서운 줄을 아셨다 한다. 손끝에 호미 자루도 쥐어보지 않은 할머니는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데리고 살아갈 일이 막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열세 살짜리 아들을 저잣거리에서 잡화상을 크게 하는 문 씨 집에 점원으로 내 보냈지만 ‘박 씨 가문의 장손임을 명심하거라.’며 허튼 행동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아들이 벌어오는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네 식구가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았지만 양반가의 여식은 상것들과 같이 들일을 하는 게 아니라며 논밭에 나가는 일은 없었다. 대신 집안에서 길쌈을 했다. 논밭에 삼과 목화를 심어 거두어들이는 것은 덕이 할매 부부였다. 그들 부부는 이웃에 살면서 우리 집안의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해 주시는 덕에 할머님이 들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집안에서 실을 잦아 무명베를 짜고, 삼을 삼아 삼베를 짰다. 모시는 남해에서 오는 삼장사에게 받아서 모시 베를 짰다. 그렇게 짜 둔 베들은 한 달에 두어 번 씩 간헐 적으로 드나드는 삼장사에게 넘겼다. 돈보다는 물물교환이 성행하던 시절이니 생선이나 건어물 등 우리 지역에서 나오지 않는 것들과 바꾸어서 생활을 영위했다.

할머니가 짠 삼베와 모시는 결이 곱고, 빛깔도 선명해서 서로 가져가려고 했다.

할머니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닥쳤다.

중매가 들어온 것이다. 매파는 할머니를 ‘성님성님’ 하면서 쫓아다니던 저잣거리의 삼천포 댁이었다.

“성님, 눈 딱 감고 팔자 고치삐라. 그런 자리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자리 아닌 거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끼고. 그 영감이 성님을 본 후로 잠을 못 잔단다. 수철이 봉급도 솔찮이 주제? 저거 아들이라꼬 나발을 불고 다닌단다. 수철이가 아무 소리도 안 하더나?”

할머니도 문 씨를 알았다. 먼 일가붙이의 주선으로 아들을 그 집에 취직을 시키면서 두어 번 인사치레를 했었다. 땅딸막한 키에 이마가 약간 벗겨졌지만 사람이 참 여물어 보였다. 가끔 가다 아들이 ‘옴마, 우리 사장님이 이거 옴마 갖다 주라쿠데예.’하면서 고운 참빗도 가지고 오고, 딱분도 가져오면 할머니는 기겁을 하며 ‘공짜 좋아하는 사람 치고 실속이 없다’면서 아들을 호되게 나무라며 돌려보내곤 했다.

중학교 때였다.

아랫집에 사는 새터 할머니는 무척 짓궂은 분이셨다. 맨날 나만 보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놀렸다. ‘너거 옴마 고마지 다리 밑에 꺼적 씌고 앉아 니 오도록 지달리고 있다. 퍼떡 가 봐라.’며 놀렸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어찌나 속상한지 울면서 ‘우리 옴마 찾으로 가끼다.’며 삽짝을 나가다 어머니께 업혀 들어온 기억이 있다. 그 할머니랑 우리 할머니랑은 맨날 붙어살다시피 했다. 둘이 붙어 앉으면 옛날이야기를 질펀하게 까놓곤 했다.

하루는 두 노인네가 안방 마루에 앉아 장터 문 씨 영감을 입질에 올리고 있었다. 새터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를 놀렸다.

“니는 좋것다. 이가 다 빠진 할망구가 돼도 보고 잡다는 영감이 있으니 말이다.”

“또 뭔 소리 하고 잡아서 입이 건질건질 하는가베. 그 영감탱이 이약은 와 하노?”

“문 씨 영감이 이적지 니를 못 잊었는 갑드라. 니가 고마 그때 개혼을 했시모 팔자 펴이는긴데. 부잣집 마나님 소리들을 낀데.”

“씰데없는 소리 말아라 고마. 아가 옆에서 듣는다.”

할머니께 퉁을 들은 새터 할머니는 옆에서 책을 보며 빈둥거리는 나를 보더니

“니도 알제, 장터에 건어물 파는 그 집 영감탱이가 너거 할배 될 뿐 한 거?”

“할매, 고마 시집 가 삐제. 장터 그 할배 부자람서?”

“떼끼. 니는 가서 공부나 해라. 이 할망구가 노망 끼가 도졌나. 알라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그랴.”

하시면서 웃으셨다.

한창 물 오른 삼십 대의 할머니였으니 주위의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마는 그때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이 셋이 할머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한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던가.

할머니나 숙모님을 보면 첫정과 모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만 같다.


5.

전쟁이 끝났다. 빈 라덴은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그의 아들들이 사살되었다는 뉴스를 듣는다.

거리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파괴된 국립 박물관 안에 나뒹구는 이라크의 유구한 역사, 포탄과 기관총 세례에 나뒹구는 시체와 부상자들, 울부짖는 바그다드 시민들, 그 속에서도 부잣집을 터는 도둑들, 겁먹은 아이들의 눈, 아수라장인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장갑차와 미군들.

텔레비전 앞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할머니 생각을 했다.

할머님이 살아계셔서 저 광경을 보셨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육이오 동란을 보는 것 같구나. 덕이가 봤다모 머라 캤것노?”

덕이는 마지막 빨치산으로 불리는 여자 전사였다.

마지막 빨치산이었던 덕이는 지리산 토굴 속에서 육이오 동란이 끝난 지 십 년 만에 생포되었지만 끝내 전향하지 않고 옥중에서 살다가 몇 년 전에 사면되어 세상에 나온 사람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가끔 그녀 이야기를 했다.

“참 순하고 착해 빠진 여자였제. 전쟁이 그런 사람을 무지막지한 빨갱이로 맹근기라. 덕이는 공산당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사상이 뭔지도 모르는 여자였던 기라.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와서 시어마이 거천 잘하고, 제 서방 따라 살았을 뿐이 제.”

할머니 말을 빌린다면 그녀는 참 유순하고 인정 많은 새댁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산으로 들어가자 시댁에 남아 있던 그녀는 군인과 경찰들에게 심하게 시달리게 되었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한번 죽기는 마찬가진데 남편 옆에서 죽겠다.’ 면서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 총을 잡았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 이웃에 살던 새댁이었다.

그녀는 내 친구 경욱이 어머니의 친구였고, 어머니와도 참 친하게 지냈던 이웃이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전쟁놀이를 하며 놀던 언덕 아래 오두막집이 그녀의 시댁이었고, 어려서 나는 그녀의 시어머니께 고구마도 얻어먹고, 밥도 얻어먹었었다.

언젠가 할머님이 한숨을 쉬며 어머님과 주고받던 말이 기억난다.

“수용이 그놈이 정산 띠 며누리도 데리고 올라갔다더마. 정산 띠 아들은 빨갱이 벼슬이 높았던지 사방천지에서 잡을라꼬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집 근처는 얼씬도 할 수 없었던기라. 그 집 근처에는 경찰들이 쫘악 깔려서 감시를 하고 있었제. 그란데 하룻밤 자고 나니 그 집 며누리가 사라져 삔 기라. 그 질로 올라가서 못 내리 온기라. 전쟁이 끝난 줄도 모리고 짐승 맹키로 살다가 잽힛다더마.”

‘수용이’ 수용이가 누굴까? 갑자기 할머님이 가끔 ‘수용이 그놈이, 그 죽일 놈이’하면서 욕을 하던 기억이 났다. 누굴까? 한 번도 수용이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서둘러 수화기를 잡았다.

친정에 전화를 했다.

“옴마!”

“니가 우짠 일이고?”

“별일 없어예?”

“그라모. 혼자 삼서 아푸기라도 해야 좋것나?”

“아니, 근데 옴마, 한 가지 물어볼라꼬. 옛날에 할무이가 ‘수용이 그놈’하면서 이를 갈곤 했잖아. 그 수용이가 누구야?”

“갑자기 그건 와 묻노?”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는 걸 텔레비전에서 보다가 갑자기 할매 생각이 나서.”

“수용이가 너거 친구 그 누고?.....가마이 있거라. 인자 이름도 가물가물 한다. 그 와 탄피 터져서 손구락지 끊어진 너거 친구 말이다.”

“아, 경욱이?”

“그래, 맞다. 그 아 저거 아부지다.”

“근데 할매가 경욱이 저거 아부지를 와 그리 밉다 캤는데?”

“아직도 몰랐디나?”

“뭘?”

“너거 삼촌을 잡아다가 총살 시킨 사람이 바로 수용이다. 한 동네에서 불알 내놓고 큰 친구 아이가. 수용이가 너거 삼촌보다 한 살 더 많을 끼다.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꼬 그 양반이 그랄 줄 몰랐던 기라. 할매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캤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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