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야기

<처음>

by 박래여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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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야기


1.

큰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

큰 나라는 작은 나라 하나를 박살 내겠다고 사생결단을 하는 중이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이웃나라의 전쟁은 장난 같았다. 미사일이 날아가 도시 하나를 박살 냈다. 먼지만 풀썩 일어났다. 해진 옷에 검은 얼굴의 아이들이 총을 들고 있다. 사막을 달리는 탱크와 박격포를 쏘는 군인들이 어지럽게 거리를 질주한다. 금세 폐허가 되는 건물도 보이고, 머리에 두 손을 깍지 낀 채 잡혀 나오는 사람들도 보인다. 총성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사방에 쏟아져 내리는 탄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무너진 건물의 잔해는 현실감이 전혀 안 생긴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전쟁영화다.

먼지가 뽀얀 하늘에서 전투기가 굉음을 지르며 나르고 있다.

“아이 쿠마 간 떨어질 뿐 했네. 밤에 무신 놈의 비양기가 저리 간뗌을 시키노? 퍼뜩 불 꺼라.”

환청처럼 할머니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을 끄고, 전등 스위치도 내렸다.

사방에 창문이 나 있는 집은 불을 꺼도 어둡지 않다.

“공습경보가 왜앵 하고 울리모 등잔불을 꺼버리고 방문에는 검은 물을 디린 무명 보따리나 이불을 쳤니라. 불빛이 한 점이라고 새 나갔다가는 그 집은 구뎅이만 뻥 뚫린 채 식구들까정 몰살을 당할 판국이니 우짜노? 시키는 대로 해야제. 쥐새끼 한 마리 얼씬도 못했니라.”

생전에 할머님이 들려주시던 전쟁이었다.

육이오 동란 이야기만 나오면 서두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더라.’면서 눈물 바람을 뿌리곤 하셨다.

“너거 삼촌이 골목에 들어 오모 벌써 동네가 훤했니라. 우리 동네에서 대학상은 너거 삼촌 뿐이었싱께. 너거 오래비가 또옥 저거 애비 쏙 빼 박은 기라.”

할머니는 평생 삼촌을 가슴에 묻고 사셨다.

삼촌은 육이오 동란이 일어났을 때 군대에 있었다.

“장개를 안 보내는 긴데. 전쟁이 날 줄은 모리고 세상이 하 싱숭생숭 하니 군대 가기 전에 혼인부터 하자고 사돈 될 사람이 자꾸 중매재이를 보내서 얼렁뚱땅 식을 올린 거라. 거기 사단이었제.”

할머니의 말속엔 늘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 비밀의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 튼튼한 자물쇠가 채워진 듯했지만 은연중에 나는 늘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삼촌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어떤 사건이 있었건만 우리 식구나 동네 사람들이나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은연중에 불문율로 묶인 것 같았다.

나 역시 선뜻 삼촌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챌 수가 없었던 것은 삼촌 이야기만 나오면 할머니의 오지랖이 흥건하게 젖곤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할머니께 시나브로 들은 삼촌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렇다.

숙모님 댁에서 군대 가기 전에 혼례라도 올리자는 바람에 장가를 보냈다. 신방 차린 지 한 달 만에 삼촌은 군대에 입대했다. 군에 입대하자마자 동란이 터졌고, 하필이면 삼촌은 우리 고장에 주둔하게 된 부대로 오게 되었다. 숙모님 댁에서 군대의 높은 분과 연줄을 놓아 빼 왔다고도 하고, 전투 경찰로 우리 고장 치안대장을 맡고 있던 외삼촌 덕이기도 하다지만 확실한 점은 할머니가 유난히 삼촌에게 집착을 했다는 사실이다.

삼촌은 상관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밤만 되면 군대를 빠져나와 숙모 방으로 기어들곤 했다.

그 시절 경상도 지리산 밑에 위치한 내 고향은 낮에는 국군이 주둔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주둔하던 희한한 시절이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국군과 인민군이 대치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낮에는 군인들이 들어와 설치다가 해가 지면 모두 일등 문 밖으로 나갔다. 일등 문이란 곳은 바로 산청군 단성면과 시천면 경계에 있는 칠정이란 곳을 말한다.

지리산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간에 놓인 산이니 들어가는 입구가 어디 한 두 곳인가 마는 우리 고장 쪽의 지리산은 일등 문을 거쳐 들어가야 했다. 그곳이 바로 산지와 야지의 완충지대였던 탓이다. 일등 문만 봉쇄하면 산을 타 넘지 않는 한 인민군 부대가 밖으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었단다. 그곳에 국군의 대대본부가 있었다.

밤이 되어 우리 고장에 군인과 경찰이 사라지고 나면 산속에 숨어 있던 인민군이 내려와 마을을 통치했다. 인민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던 민간인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는 것도 밤이었다. 그들은 산 생활에 필요한 양식과 생필품을 거두고 가족과 함께 밤을 보내고 새벽이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삼촌은 번번이 위험을 감수하며 군대를 이탈하여 각시방으로 잠입했던 것이다.

“비러물 손이 고마 군대 밥이나 쳐 묵고 쿡 쳐 박고 있었시모 됐을 낀데 지 지집 누가 업어갈 것도 아닌데 고걸 몬 참더마.”

할머니의 한숨이 무르익는 대목이다.

할머니는 삼촌이 각시방으로 숨어든 날은 밤샘을 하면서 망을 봤다. 언제 공비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수상한 움직임만 보이면 헛기침이나 담뱃대로 화로를 톡톡 쳐서 각시방에서 잠을 자던 삼촌을 샛문을 통해 부엌의 솔가리 속에 파 놓은 굴속으로 들어가게 하거나 대나무 밭으로 피신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50년 시월 중순이었다.

할머니 말을 빌리면 대낮에 다급하게 집으로 들이닥친 삼촌은 식구들에게 피난 보따리를 싸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간단하게 보따리를 꾸린 우리 가족은 집을 나섰다. 면 소재지에 도착하니 우리 지역에 있는 경찰이나 군인 가족은 모두 총집결을 시켜 놓았더란다. 사람들은 군용 트럭에 타고 일등 문 밖으로 나갔다. 마침 일등 문 밖에는 고모님이 사셨다. 고모님 덕에 그 이웃에 방 하나를 빌려 피난살이를 했다.

“사람 사는 기 말이 아니었거마. 날시고 사방에서 따발총 갈기는 소리는 들리제. 누렇게 익은 나락은 베야 할낀데 집에 갈 수는 없제. 사람 환장하고 나자빠지것더마. 그래도 너거 삼촌이랑 외삼촌 덕에 군인들 델꼬 반타작이라도 해다가 너거 고모네 헛간에 재 놓을 수 있었으니 배 곪지는 안 했니라.”

우리 가족은 일등 문 밖 남의 집 행랑채에서 다섯 달을 살았다.

전쟁이 터진 그 해 시월에 피난 떠났다가 이듬해 오월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우리 고장의 민심도 흉흉했다. 한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했다. 국군 편이니, 인민군 편이니 해서 고변이 잇따르고, 한 이웃에 살면서도 편 가르기는 무서운 암 덩어리 같았다. 무고한 양민이 서로 헐뜯고 경계하며 밤낮이 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었지만 삼촌은 여전히 각시방을 드나들었다.

모기가 기승을 부리던 칠월 중순경이었다.

지리산 아래 거주하던 군인과 경찰, 반공청년단 등에게 급하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국군이 압록강을 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번에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서울이 함락되고 인민군은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민주전선에 섰던 사람들은 사그리 사라지고 우리 고장도 인민군이 밀려들었다. 산꼭대기나 관공서엔 태극기는 사라지고 붉은 인민기가 꽂혔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인민군 천하가 되었다. 공산당의 세상이 된 것이다. 경찰이나 군인이었던 사람들은 가족에게 피난을 가라고 종용할 틈도 없었다. 인민군에게 잡히면 총살을 당할 판이었던 사람들은 몸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미처 마을을 못 빠져나간 사람들은 지하로 잠적을 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인민재판을 받았니라. 너거 아부지도 끌리 나가서 총살당할 뿐 했제. 그래도 우리 집은 인심을 안 잃었던 기라. 너거 아부지가 아무도 몰래 빨갱이를 도운기라. 지 친구가 골수 빨갱이었싱께. 손만 벌리고 다 내 주었제. 그라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놨제. 너거 아부지캉 같이 젭히간 사람들은 모돌띠리 총살당하고, 죽창에 찔리서 한 구뎅이에 묻힌 기라.”

하필이면 그때 삼촌은 우리 집에 숨어 있었다. 각시 만나려 왔다가 철수하는 부대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었다. 삼촌은 대밭 속에 땅굴을 파고 두더지처럼 숨어 지냈다. 삼촌 때문에 아버지는 인민군에 자원입대하여 훈련에 참석했고, 어머니와 숙모는 우리 마을에 거주하는 인민군들 밥을 해 주었다. 우리 마을 타작마당에 텐트를 쳐 놓고 인민군 1개 소대가 거주했다.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이었던 우리 집은 당연히 인민군을 위해 밥 수발을 들어야 했다. 텃밭에 큰 가마솥 두 개를 걸어 놓고 30여 명의 밥을 지어 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뚝 그치고 입에 풀칠을 단단히 하는 대목이 여기였다.

아무리 다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도 한번 다물어진 입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인민군 소좌가 너거 숙모를 졸졸 따라 댕김서 누님누님 캐사서 내가 몸단속 잘하라고 너거 숙모 머리통을 올매나 쥐어박았던지. 그때 너거 숙모 나라 캐봤자 시물 셋이었응께 예뻤던 기라.”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지만 숙모님은 참 예뻤다. 보통 키에 동글납작하게 생긴 얼굴이며 쌍꺼풀은 없지만 큰 눈이며 뽀얀 피부가 칠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고우시다. 더구나 부잣집 고명딸로 곱게 자랐으니 하는 행동거지도 얌전하고 솜씨, 맵씨가 뛰어났다. 입때껏 숙모님이 언성을 높이거나 험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숙모님만 보면 요조숙녀란 말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다.

언젠가 어머니께 물은 적이 있다. 삼촌은 어떻게 돌아가셨느냐고.

“빨갱이한테 잡히 가 죽었제.”

스물셋에 혼자된 숙모를 할머니는 친정으로 쫓아냈다.

어린 아들을 빼앗기고 친정으로 쫓겨난 숙모는 날마다 우리 집 삽짝 앞에 와서 퍼질러 앉아 울었다.

“처녀 시집을 가도 될 나이에 만다꼬 혼자 살끼고? 지금이야 머슴아가 에리니 애미 애간장이 녹겠지만 세월이 가모 다 이저삘끼다. 담에 애물단지 머슴아 하나 땜에 좋은 시절 다 보냈다고 후회하지 말고, 친정 부모 가슴에 대못 박지 말고 고마 니 갈 길로 가거라.”

할머니는 알고 계셨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수절하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숙모님만은 당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숙모는 끝내 팔자를 고치지 않았다.

“너거 숙모가 죽으모 죽었지 팔자 못 고치것다고 대들보에 목을 매는 불상사를 겪었니라.”

할머니는 숙모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어지간히 애를 썼지만 결국 다시 받아들였다.

숙모님의 친정 이웃에 집을 한 채 지어 분가를 시켰다. 자유롭게 혼자 살다 보면 죽은 남편에 대한 애잔한 정도 뜨고, 품 안에 든 자식이 자라면 팔자 고칠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며 나가 살아 보라고 했단다.

“첫 정이 무섭은 기라. 딴 남자를 아무리 치다 봐도 죽은 저거 서방 맹키로 잘 생긴 남자가 세상에 없더라나. 그런 남자가 있었시모 팔자를 고치실랑가 모리제. 너거 삼촌이 살았시모 벼슬 한 자리했을 끼라. 그때 우리 고장에서 유일한 대학상이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삼촌 제사상 앞에서 할머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2.

나는 어려서 동네 남자 애들과 어울려 전쟁놀이를 하며 자랐다. 내 또래의 아이 중에 여자 친구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열다섯 가구가 사는 마을에 집집마다 한두 살 차이의 조무래기들이 있었지만 나와 동갑내기 네 명 중 여자는 나뿐이었다. 자연히 하는 짓이 선머슴아 같을 수밖에 없었다. 머슴아들과 놀려니 놀이란 것이 딱지치기나, 자치기, 구슬 따 먹기, 전쟁놀이였으니 말이다.

우리 마을 옆에는 커다란 못이 있다. 못을 사이에 두고 아래로는 제법 넓은 들이 형성되고, 못 위로는 골짜기를 끼고 크고 작은 다랑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골짜기는 꽤 넓었다. 그 골짝에 들어가 땅을 후비면 반들거리는 황금빛 탄피나 운이 좋으면 자갈에 파묻힌 군모를 주울 수 있었다. 군모를 씌고 놀다 어른들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빼앗겼다. 어른들은 그것에 구멍을 내어 자루를 끼우고 똥바가지로 만들거나 오줌 바가지로 만들어 썼다. 우리 집에도 두 개나 있었다. 우리는 탄피를 주워서 끝을 뾰족하게 갈아 화살촉도 만들고, 모았다가 엿도 바꾸어 먹었다.

그 다랑이를 적시는 물줄기는 사철 마르지 않았다. 골짜기는 넓고 얕아서 우리는 냇가라고 불렀다. 어른이 보면 봇도랑이거나 얕은 개울이었지만 우리에겐 냇가였다 ‘냇가에 놀로 가자’하면 탄피를 줍거나 가재를 잡자는 이야기이고, ‘뻔덕에 놀로 가자.’하면 미끄럼을 타거나 전쟁놀이를 하기 위해서란 것을 아이들은 다 알았다. 뻔덕이란 냇가를 끼고 산비탈 쪽으로 넓게 조성된 조 씨 가문의 묏등이 여럿 있는 곳이었다. 돌꽃이 핀 거북 등 위에 비석이 서 있는 아주 큰 능이었다. 어린 우리 눈엔 그랬다. 내가 어른이 되어 가 봤을 땐 그냥 평범한 묏등보다 조금 컸을 뿐이었지만.

묏등 주위에 아름드리 노송이 띄엄띄엄 서 있었고, 그 소나무에 기대어 솔가리 단이 집채만큼 쌓였거나 짚동이 가지런히 보기 좋게 재어 있곤 했다. 우리들의 놀이터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서로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다. 긴 나무 막대 하나 씩 들고 새끼줄로 허리를 감고 놀다가 동네 어른들께 들키는 날엔 꾸지람도 바가지로 들었다. '너거 에미 애비가 죽었나? 새끼줄을 허리에 감다니.'하면서 혼쭐이 나곤 했지만 아이들은 모였다 하면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다. 한쪽은 국군 아저씨가 되고, 한쪽은 빨갱이가 되어 서로 쫓고 쫓기는 놀이였다. 늘 밀리는 쪽은 빨갱이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로 빨갱이는 하기 싫어했다.

빨갱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빨갱이라면 무턱대고 나쁜 것으로 확신했다. 우리 마을에서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면 ‘빨갱이 새끼’라는 욕설이었다. 육이오 동란이 끝난 지가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 잔해는 여전히 마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대밭 속에는 방공호가 있었고, 어느 집이나 집 마루 밑에는 사람 한 둘 들어가 누울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곤 했다.

내 나이 일곱 살인가 되었을 때로 기억된다.

싸리 꽃이 하얗게 핀 봄이었다.

언니 오빠들은 다들 학교에 가고 나와 동갑내기인 경욱이만 남았다. 우린 늘 앙숙이었지만 단짝이기도 했다. 그 경욱이를 할머니는 유난히 싫어했다. 집에 놀려오면 마지못해 들어오라 했지만 할머니는 경욱이가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나를 끌고 가서는 머리를 쥐어박았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 캤다. 내년이모 핵교 가는 가스나가 맨날 머슴아 하고 놀 끼가? 쟈보고 퍼뜩 저거 집에 가라 캐라.”

나는 할머니의 눈이 무서워 금세 핑계를 대고 경욱이를 돌려보냈지만 또 금세 같이 어울려 산과 들을 쏘다녔다.

나는 겁이 없었다. 또래보다 큰 애들에게도 지지 않았다. 크고 작은 남자 애들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쌈질을 할 만큼 선머슴아였던 내 뒤엔 늘 든든한 백이 있었으니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동네에서도 호랑이 할매라 불릴 정도로 대가 차고, 오지랖이 넓었던 분인 데다 걸대조차 어찌나 큰지 동네에서 여장부로 통했다.

만약 내가 머슴애에게 맞아 울고 들어온 날은 할머니의 손에 끌려 그 머슴애의 집에 가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내 귀한 손녀를 울린 놈은 꼬치를 까삐 끼다 이놈 오데 있노?' 하면서 엄포를 놓으면 집안에 있던 머슴애는 봉창 문이나 뒷문을 열고 도망가기 바빴고, 그 집 부모님은 할머니께 애 단속 잘하겠다고 싹싹 빌어야 했다.

할머니는 인정도 많았다. 동네 찾아든 거지라면 어김없이 우리 집에 들러 밥을 먹고 식구들 줄 것을 얻어 갔고, 보따리 장사 아주머니는 늘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갔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 간다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으면

“너머 집에 가서 비럭질을 해 묵고 사는 사람도 있다. 콩 한 쪼가리로 열둘이 갈라 묵는다 캤다. 이만큼 사는 것도 다 내 복이 아니고 너므 복이다. 피난시절 생각해 봐라. 서로 돕고 사는 기다. 있시모 있는 만큼 노 놔 묵으모 된다. 세상은 혼자 사는 데가 아닌 기라. 이웃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기라. 까막까치들도 은혜를 안다 캤다. 함부레 빈 소리 마라. 식은 밥이라도 있시모 찬물에 말아서 나누어 묵어야제. 쌀 다 빼끼고 풀뿌리 캐다가 죽 끼리 묵던 일제강점기나 육이오 동란 때를 벌써 이자삔 기가? 부황이 들어 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즐비한데도 우리는 잘 묵고 잘 살았니라. 거기 다 뉘 덕인고 아나?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꼬 다 너므 덕이니라.”

하시면서 어머니를 꾸지람하셨다.

그런 할머니께서 어째서 경욱이에게 만은 그렇게 쌀쌀하게 구는지 이유를 몰라 늘 궁금했다. 경욱이 어머니는 나를 참 예뻐하셨다. 경욱이 네 놀려 가면 감자도 삶아 주고, 고구마도 쪄 주었다. 어떤 때는 눈깔사탕을 내놓기도 했다.

그 해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우리 마을 옆의 못골이라 불리는 골짝에는 유난히 싸리 꽃이 많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싸리 꽃으로 통하지만 본명은 조팝나무 꽃이다.

할머니의 말을 빌리면 육이오 때 죽은 젊은 영혼들이 구천을 맴돌다 맺혀서 피는 꽃이라고 했다. 워낙 많은 생명이 죽어나간 골짜기라서 싸리 꽃이 유난히 많이 핀다고 했다. 군군과 빨갱이가 서로 대치하여 몇 날 며칠을 콩 볶듯이 총을 쏘아대더니 골짝 물이 시뻘겋게 흘렀다고 했다. 그래서 그 골짝엔 탄알이나 수류탄 등 아직 터지지 않은 무기가 많이 묻혀 있으니 그곳에 가서 놀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어른이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고, 그곳에 못 가게 하면 더 가고 싶어 하는 존재다.

나는 경욱이랑 싸리 꽃을 꺾으려 냇가로 갔다.

“영아, 일루와 봐.”

“와?”

“이거 안 터진 기다.”

“피, 그런 기 오데 있노?”

경욱이는 개울 바닥에서 탄알 하나를 주워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너른 바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엔 작은 돌을 주워 들고 탄알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탁탁 칠적마다 탄알에서 반짝하고 불똥이 튀었다.

“그라지 마라. 우리 할매가 그런 거 갖고 놀다가 터지모 봉사도 되고, 죽는다쿠드라. 우리 못 둑에 가서 삐삐나 빼 묵자.”

나는 더럭 겁을 내며 골짝을 벗어나 못 둑으로 달아났다. 할머님이 아시는 날엔 못 둑을 열 바퀴는 돌아야 할 벌을 받을 참이기 때문이다. ‘가시나가 단정치 못하고로 맨날 머슴애들캉 댕김서 총질이나 하다니 자알 한다. 대낮에도 구신 나온다꼬 그 꼴창에는 가지마라캤제? ’하시면서 불호령이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퍼엉!”

순간 뒤통수에서 땅이 흔들리는 굉음이 들렸다. 골짝을 벗어나 못 둑으로 막 뛰어오르던 나는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사방이 조용해진 후에야 나는 살금살금 기어서 경욱이가 있던 자리에 갔다.

경욱이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하 알 매 애!”

나는 죽어라고 ‘할매’를 부르며 집으로 달렸다.

할머니는 경욱이를 업고 오리 밖의 면소재지에 있는 병원까지 들고뛰었다.

경욱이는 왼손 손가락 세 개가 날아가고 턱 밑에 긴 상처 자국이 남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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