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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바람의 달 이월에 서울을 떠났다. 이삿짐이라고 해 봤자 가방 두 개다. 옷 가방 하나, 책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가방을 택배로 부쳐놓고 가볍게 손가방 하나만 챙기고, 주인 할머니께 드릴 선물 가방만 들고 친정어머니와 시간차를 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칠순이 넘은 친정어머니께 정말 죄스러웠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않았다. 남편의 집에서 나와 친정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잘 왔다. 이제 혼자 편하게 살아. 자식들 걱정도 말고, 너만 생각해.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젠 다 잊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당분간 시골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고 싶다니까 그렇게 하고.’ 그게 전부였다.
“다 왔다 내리자.”
어머니와 함께 면 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 저녁때였다. 구시 골 첫인상은 너무 조용해서 사람이 사는 동네 맞나 의심스러웠다. 나지막한 산이 빙 둘러싼 분지는 참으로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상아는 맑은 공기와 한적한 시골 풍경에 반해
“와, 너무 좋아. 어쩜 공기가 이렇게 달라요. 여긴 꼭 봄 같아, 참 포근해. 정말 상쾌해. 여기 잘 온 것 같아. 엄마.”
어머니도 그녀가 좋아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때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깡말랐지만 참 선하게 생긴 어떤 남자가 성큼 다가오더니
“저 혹시 서울에서 오시는 분들입니꺼? ”
하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추운데 오시느라고 고생했십니더. 저기 제 트럭에 타이소. 정촌 할매가예 질이 서툴끼라꼬 모시고 오라쿠데예. 좀 불편할낍니더. 지는예 정촌 할매 이웃에 사는 사람입니더. 짐이 이것 뿐입니꺼? 할매가 짐이 많을 끼라고 가 보라쿠더마. 짐도 없네예.”
남자는 허락도 하기 전에 선물가방을 빼앗다시피 가지고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하얀 1톤 트럭의 짐칸에 올리고 차 문을 열고 서서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도 않고 트럭에 가서 올라탔다. 상아는 트럭을 타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더 신기하고, 겁도 났지만 어머니는 그런 상아를 부뚜막 위에 올려놓은 어린애를 보듯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엄마, 저 어린애 아니에요.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상아는 능숙하게 탄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에 거 손잡이가 있습니더. 그걸 잡고 올라타세요.”
창피했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손잡이를 잡고 차에 올라탔다. 덜컹거리는 길을 트럭에 올라타고 가는 것이 재밌었지만 시침 뚝 떼고 줄곧 앞창을 통해 밖만 바라봤다. 낯선 사내의 친절을 모르는 척했다. 야트막한 산과 오밀조밀한 동네와 그 사이 크고 작은 들과 고불고불한 길이 참 아름다웠던 탓이다.
상아가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사이 트럭은 들 가운데 동네를 찾아들었다. 좁은 골목을 능숙하게 들어가더니 어떤 집 앞에서 멈추었다.
좀 더 오래 달렸으면 참 좋겠다 싶은데. 잠깐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던 것이다.
차 소리가 멎자 대문이 열리더니 머리가 하얗게 세었지만 짱짱하게 보이는 마른 할머니 한 분이 나왔다.
“다 왔다 내리자. 저 할머님이 주인이시다.”
그렇게 상아의 시골 살이는 시작되었다. 친정어머니는 이틀쯤 쉬다가 서울 집으로 돌아갔다. 상아 혼자 남았다. 편하고 좋았다. 온종일 낮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빈둥거렸다. 그날 이후 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이웃에 산다는 그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상아는 만날 필요도 없는 외간 남자지만 첫날 너무 쌀쌀맞게 군 것 같아서 가끔 그날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생기곤 한다. 한 번은 정촌 할머니를 통해 고맙다는 인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남자라면 만정이 다 떨어진 그녀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 남자들이 모두 전 남편만 같았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속물근성에 젖어 사는 남자, 아내를 기만하고,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남자란 이름 하나로 그 모든 것을 당연시했던 남자,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으면서 쓸 줄만 알았던 무능한 남자,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 인양 거드름 피우는 남자, 겉멋만 부릴 줄 아는 속 빈 강정 같은 남자, 아내를 하녀보다 더 못하게 대하던 남자, 세상 모든 남자들이 전 남편처럼 보인다면 이해할까. 물론 그렇게 만든 것은 그 남자의 어머니였다. 아들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해서, 돈이 너무 많아서 돈을 쓸 줄만 아는 아들이 대견했던 것은 아닐까.
시골 내려온 지도 한 달포쯤 되었을까.
하루는 주인 할머니가 풀을 한 소쿠리 뜯어왔다.
“서울 댁 심심하제? 나시랭이다. 가리 봐라. 저녁에 된장국끼리 묵자.”
뿌리가 달린 냉이었다. 할머니랑 같이 마루에 앉아서 냉이를 다듬었다. 냉이를 캐어 본 적도 없는 상아는 할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풀이나 지푸라기는 골라내고 냉이는 누런 전 잎은 떼어내고 뿌리에 붙은 흙은 털어냈다. 냉이를 다듬는 것보다 주인 할머니의 수다가 더 재미있었다.
“복만이 아부지가 자네가 사는 아래채를 고쳤다 아이가. 참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여. 복만이가 예닐곱 살 때 상처했지 아매. 그 아가 3년 전에 장개 갔다 아이가. 인자 완전히 혼잔기라. 혼자 늙어가는 기 안 됐어. 사람이 참 진국이거마. 젊어서 상처하고 홀애비로 사는 기라. 젊어서는 얼라 생각해서, 죽은 마누라 못 잊어 재혼은 싫다더마 아들 장개 보내고 난께 혼자 사는 기 심든 지. 맘 마차 살만한 과수댁 이시모 장개 갈라쿠는데. 서울 띠야, 그런 사람 오데 없더나?”
상아는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할머니의 묻는 의도가 심상찮아 딴전을 피웠었다.
어쨌든 그 남자 이야기를 금세 잊어버렸거니와 낯선 그녀에게 처음으로 도움 준 남자지만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싹 무시해버리고 살았다. 남녘은 금세 봄이었다. 너무 따뜻한 곳이라 처음 올 때 입었던 모피 코트를 두 번 이상 입을 일도 없을 만큼 포근한 봄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럭저럭 상아의 구시 골 생활도 몇 달째 접어들었다.
상아는 생필품 몇 가지를 사러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친정어머니께 전화만 하면 필요한 것을 잔뜩 사서 택배로 보내주지만 가끔 바람도 쇨 겸 면소재지 나들이를 한다.
상아는 구시 골 면소재지에서 유일한 금융기관인 농협지소 하나로 마트에 갔다. 진열장에는 먼지를 하얗게 덮어쓴 물건들이 태반이다. 물건들 역시 정말 몇 가지 안 되는 생필품 외엔 없다. 대형 백화점에서 온갖 것을 다 보고 사다 날랐던 그녀에게 산동네 구멍가게보다 못한 농협 마트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상아는 대충 몇 종류가 진열장에 있는지 헤아려봤다. 라면, 팩 종류, 일회용 가스, 작업할 때 쓰는 목장갑 뭉치, 무논에 일할 때 신는 허벅지까지 오는 노란 고무장화, 과자, 커피, 진간장 외 식품들, 양말과 속옷 몇 가지, 가장 푸짐한 것은 한 되짜리 소주와 술 종류다. 상아는 이것저것 꺼내서 만져보기도 하고, 요리조리 모양새도 살피고 유통기한도 확인하며 뜸을 들이자
“찾는 게 없어요?”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여직원이 묻는다.
상아는 ‘아니요.’ 하면서 그제야 필요한 물건을 골랐다. 라면도 서너 종류뿐이다. 신라면 다섯 개 묶음 하나, 가루비누 한 봉지, 치약 한 통, 칫솔 하나, 간식용 빵 한 봉지, 음료수 한 병을 계산대 위에 올리자
“비닐봉지 드려요?”
“네”
“여기 분 아닌 것 같은데.”
“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녀의 말에 여직원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시골이 좋은가 봐요? 난 도시로 나가고 싶은데. 여긴 너무 후져요.’ 한다. ‘여기가 참 좋은데.’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자 여직원은 ‘아는 분이 계셔요?’ 한다. 그 말에 대답도 않고 그녀는 가만히 웃으며 생각했다. ‘호기심이 많은 여자군. 여기 사람 일리 없지, 태어나서 처음 들어와 본 시골인데. 세상에 이런 곳도 있을까 싶은 오지마을이라 얼마나 좋은데. 아무렇게나 하고 살아도 서울 여자 표가 나나 봐. 좀 더 까맣게 그슬어야지. 할머니께 몸빼도 하나 만들어 달라 해서 입고 다녀야지.’ 아무리 촌사람답게 겉치장을 해도 그녀는 시골 여자치고는 너무 해맑은 얼굴이다. 어려서부터 서양 아이란 놀림을 받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새하얀 그녀는 구시 골에서는 보기 힘든 서울 말씨를 쓰는 세련된 여자다. 주인 할머니는 늘 ‘어긋진 말을 쓰니 알아 묵지도 못하겠다.’고 타박 아닌 타박이다. 서울 억양을 말하는 줄은 알지만 그것만은 고칠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습득된 것이기에 오랜 세월 구시 골에 살면 억양이 바뀔지 모르나 겨우 두서너 달 살고는 바뀔 수 없는 문제다. 그녀는 되도록이면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해보려고 할머니를 붙들고 말을 배우지만 서로 간에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의사소통이 될 정도다.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너무 많다. 방언사전을 들고 찾아가며 말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상아는 농협 마트를 나섰지만 마트 옆에서 망설인다. 포장이 잘 된 넓은 길로 갈 것인가, 좁은 논두렁을 따라가야 하는 샛길로 갈 것이냐. 샛길로 가면 집까지 좀 멀리 에둘러 가지만 대신 동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아 좋다. 포장된 동네 길로 가면 편하긴 하지만 호기심 많은 촌사람들의 눈요기가 될 판이고, 괜히 아는 척하다가는 언젠가처럼 뒤통수에 대고 ‘저 아지매가 천복이네 아래채에 세 들어 사는 서울내기란다. 천복이 할매 말로는 약병을 달고 산단다. 무섬증을 올매나 타는지 쥐를 보고 혼절을 하더란다. 저러다 그 집에서 초상 치는 거 아닌지 모르것네. 저 희멀건 얼굴 보소. 아푼 사람이니 이런 촌에 왔제. 저런 사람이 촌에 들어와 살 사람인가.’ 저들끼리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는 척했지만 길 가는 사람들 귀엔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녀가 구시 골에 내려와 가장 놀란 것은 동네 사람들의 시원시원한 말소리였다. 남의 이목도 생각하지 않고, 목소리를 죽이려고도 않고 타고난 천성 그대로, 큰 목소리 그대로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뱉어낸다는 것이다. 거침이 없었다. ‘참 곱상하게 생겼거마 말라꼬 이 촌 구석에 내려왔시꼬. 천복이 할매 말로는 상처한 거 겉다 하더마. 알 수가 있어야제.'
혀 차는 소리까지 훤하게 다 들리는 그런 뒷공론을 듣는 판이니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 소로를 택해 집에 가야 한다.
상아는 처음 거의 한 달 동안은 칩거하였다. 서울에서보다 더 사람을 꺼려하고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했다. 동네 사람들 눈이 무서웠던 것이다. 농촌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닫힌 곳이 아니었다. 혼자 자유로울 것이라 믿었던 것을 곧바로 수정해야 했다. 완전하게 터인 공간인 데다 그녀는 완전한 이방인이기도 했다. 주인 할머니는 노련한 수사관처럼 눈을 빛내며 왜 혼자 아무도 없는 이곳에 내려올 생각을 했느냐, 어머니 말로는 갑자기 혼자되는 바람에 심신 수양 차 오게 됐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냐. 애들은 몇 명이냐, 왜 어미 보러 오지 않느냐. 그녀가 주인 할머니께 한마디 하면 고스란히 동네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남의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달이 두 달이 되자 조금은 농촌이란 곳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꾸밈이든, 진실이든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로 동네 사람들 입질에 오르내리면서 타인으로 배타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점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사게 됐고, 그 동정심 때문에 타인이 아니라 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인 할머니 눈 밖에 나지 않은 덕이었다. 부침개도 구우면 푸짐하게 만들어 할머니 편으로 동네 어른들께 대접하고, 가끔 담배도 한 보로 씩 사다 나누어 드리고, 밑반찬을 하면 할머니 몫까지 만들어서 갖다 드리곤 했더니 ‘참 솜씨도 우찌 이리 좋노. 음식 솜씨 좋은 걸 보니 참말로 살림꾼 인기라.’ 할머니도 동네 사람들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니 서울내기라도 깍쟁이가 아니라 부잣집 후덕한 마나님 같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난 탓 같았다.
상아는 구시 골이 자꾸 좋아졌다. 우선은 혼자 사니 마음대로 방귀를 뀔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의 방귀는 선천적이라는 말을 앞에서 했다. 할아버지도 그랬다 하고, 아버지도 그랬다. 방귀를 마음대로 뀔 수 있으니 편두통이 사라진 것인지, 공기가 맑아서 편두통이 사라진 것인지 고질병이던 편두통이 사라지자 정말 살 것 같았다. 다음은 시집살이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음식 못한다고 구박받았는데 여기서는 음식 솜씨 좋다고 동네 할머니들의 칭찬이 늘어진다는 것이다.
상아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면서 우선 틈나는 대로 야생화에 대해 공부하는 일과 자서전 쓰는 일이었다. 농촌 살이 하루하루를 기록하면서 사는 재미를 알고,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알차게 사는 것인지 깨닫는 일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은 정말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두 아이 키울 때는 웃을 일도 많았다. 행복이란 게 별건가. 그렇게 아이들과 울고 웃었던 한 때가 행복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좀 더 마음을 열걸’ 하는 늦은 뉘우침도 있었다.
그리고 너무 자신 속에 푹 빠져 있지 않기 위해 책을 읽거나 근교에 있는 도시에 나가 쇼핑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돌아다니다 오곤 한다. 때로는 할머니를 따라 들에 나갔다. 봄나물 이름도 익히고 나물 캐는 법도 배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호미란 것도 잡아보았고, 냉이도 캐고, 달래도 캐고 쑥도 캐 봤다. 토박이 서울 여자로 살면서 들은 어쩌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일 뿐이었다. 재래시장이나 백화점, 대형 할인점에 가면 없는 것이 없었다. 깨끗하게 진열된 상품을 골라 돈만 지불하고 가져오면 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며칠 전에 주인 할머니가 넌지시 물었다.
“서울 띠야 내가 주책시럽다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제. 앞으로 올매나 더 여게 있다 갈끼고? 돈도 솔찮이 들낀데 머 묵고 살라쿠노? 친정오마이 말로는 묵고 사는 걱정 안 해도 된다쿠드라만 참말인가?”
“예, 할머니 먹고 살 걱정 없어요. 여기 살면 돈도 필요 없을 것 같아요. 할머님이 나가라 소리만 안 하면 더 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나야 좋지.”
당분간은 돈 걱정하지 않을 작정이다. 시골에서 혼자 사는 한 돈 쓸 일도 별로 없지만 그녀는 쓰고 싶은 만큼 쓰도 될 정도의 돈이 있었다.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었다. 그녀가 남편으로부터 위자료 한 푼 안 받고 홀가분하게 그 집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남편 몰래 그녀 앞으로 남긴 아버지의 유산 덕이었다. 또한 시어머님을 간병하면서 시어머님이 내 준 돈을 조금씩 아껴가며 모은 쌈짓돈도 있었다.
상아는 농협 건물 옆으로 난 좁은 샛길을 택했다. 샛길만 벗어나면 논둑길이 나왔다. 논밭이 거의 다랑이다 보니 아래위 논의 턱이 높았다. 회색 돌 꽃이 핀 논두렁은 예닐곱 살 아이 키 높이만큼 차이가 났다. 논두렁길이 너무 예뻤다. 자연스러운 곡선에 양쪽 길섶에는 자잘한 풀꽃들이 피어 있어 그 길은 걸을수록 그 길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좁은 길이다. 아래위 논에는 알이 통통하게 밴 이들이들한 푸른 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상아는 구불구불한 논길은 걸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보리밭 사이를 돌아다니며 재재거리는 새소리에 반하기도 한다. 새들을 놀래 키기 위해 ‘훠이’하면서 보리를 쓱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더부룩하게 자란 쑥과 이름도 모르는 풀들 사이 보랏빛 제비꽃이라도 보일라치면 ‘어머, 어머, 어쩜 이리도 고와. 너무 예뻐.’ 어린애처럼 탄성을 지르며 쪼그리고 앉아 제비꽃을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불룩한 비닐봉지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팔을 쭉 폈다 하면서 논두렁을 걷다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녀 때문에 속 끓이다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던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손을 잡고 도시 근교의 들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보리피리, 알이 통통하게 밴 보리를 쭉 뽑으면 하얀 대롱이 나왔다. 그 대롱만 길게, 혹은 짧게 끊어서 중간에 손톱으로 살짝 틈을 내고, 주둥이는 납작하게 눌러서 불면 ‘삐익 삐익’ 밤새우는 소리가 나곤 했다.
‘나도 한번 만들어봐야지. 소리가 날까.’
상아는 보리 무리 중에서 제법 실한 놈을 찾아 쭉 뽑았다. 의외로 잘 뽑히지 않았다. 중간에 끊어져버리기 일쑤였다. 다시 엎드려서 힘을 주어 보리 대궁을 뽑는데 갑자기 뒤에서 ‘뿌웅’ 대포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머나 깜짝이야.”
상아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돌아보는 순간 휘청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처럼 아래로 굴렀다. 툭 떨어져 뒤로 발랑 눕자 푹신하게 등을 받쳐주는 것은 푸른 보리요. 누운 자세로 하늘을 보니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빛났다.
상아는 킥킥 웃기 시작했다. 자신이 뀐 방귀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다가 허방을 짚어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길 아래 보리밭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발랑 드러누웠던 것이다. ‘저 높은 논두렁을 어떻게 올라가지?’ ‘누가 내 방귀 소리 들었으면 어떻게 하지.’ ‘아무렴, 누가 따라온 것도 아닌데. 아무도 모를 거야. 거나 저나 누가 보기 전에 빨리 가야 하는데.’ 하면서 보리 골에서 몸을 일으켰다. 납작하게 깔아뭉개진 보리에게 미안했지만 서둘러 논두렁을 올라가려고 낮은 곳은 찾는데 논두렁이 자신의 키만큼 높았다. 논두렁에 붙어 어떻게든 올라가 보려고 용을 쓰는데. 갑자기 ‘뿌앙 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니, 내가 또 방귀를 뀐 거야? 근데 왜 위에서 들리지?’ 하면서 위를 쳐다보던 그녀는 너무 놀라서 다시 보리 골에 주저앉았다.
“내 방귀 소리가 그리 컸나? 허참 자 내 손잡고 올라 오이소.”
남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보리밭에 퍼질러 앉아 날 샐 끼라요? 우리 구면 아니오. 아지매가 방구 뀐 거 나는 안 들었싱께내 퍼뜩 올라오소. 집에 안 가끼라요? 아이쿠 저기 뱀 봐라.”
“어머나 난 몰라.”
상아는 본능적으로 튀어 일어나 남자의 손을 잡고 논두렁을 기어올랐다. 뱀이 발목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어찌나 서둘렀던지 논두렁 위에 올라오자마자 퍼질러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뱀이었다.
“다 큰 사람이 우는 기라요?”
남자가 놀렸다. 그 남자였다. 처음 구시 골 들어왔을 때 마중 나왔던 이웃집 남자였다.
상아는 창피해서 고개를 외로 꼬고 집 쪽으로 줄행랑을 놓는데 뒤에서 남자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옆집에 삼시로 너무 내외하지 맙시다. 내랑 동갑이라매요? 담부랑 옆에 서서 내캉 방구 내기 하모 막상막하 것던데. 서로 혼자 사는 처지에 잘 친해 봅시다. 아니, 근데 사람이 그라지 마소. 하매나 하매나 밥 한분 무로 오라 소리 들릴까 지달리는데. 꽁 꿔 묵은 소식이니 우짜끼요. 내가 체면 안 채리고 찾아봐야제. 저녁에 밥 무로 가께요. 숟가락 하나 더 놔 주소. 참말이라요.”
“그러세요. 그럼.”
들릴락 말락 허락을 했는데. 어째 귓불이 발갛게 익고, 얼굴이 화끈화끈, 가슴이 콩당콩당 뛰는 것일까.
‘그래, 도움받고도 고맙단 말도 못 했는데. 저녁이나 한 끼 대접한다고 뭔 소문날까. 혹 이상한 소문나면 어쩌지. 내가 괜한 짓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머리로는 ‘안 돼요.’ 하고 싶은데. 마음은 벌써 ‘저녁에 무슨 반찬을 할까 시장부터 봐 와야겠네. 무얼 좋아하는지 할머니께 물어봐야겠네.’ 이런 생각이 먼저였다. ‘내가 미쳐, 미쳤어 정말’ 하면서 대문 앞까지 잰걸음으로 뛰어 온 상아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남자에게 뭔가가 있다. 뭔가가 그녀의 죽은 감정에 촉수를 뻗치는 것이다.
상아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사람 마음 같다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