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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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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Dec 18. 2022

73. 달빛에 깨어나

달빛에 깨어나     



 새벽 3시경 깨어났다. 달빛이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날 샌 줄 알았다. 나무 그림자가 거실까지 쑥 들어온다. 달빛에 책을 읽었다는 옛 선인을 생각한다. 천자문을 비롯해 사서삼경, 동문서답 등, 한자는 크게 썼을 테니 달빛에 충분히 읽지 않았을까. 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딧불과 눈빛에 책을 읽었다는 고사성어도 떠오른다. 달빛이 너무 밝아서 잠자리에 들기가 싫어졌다. 거실에 불을 켜지 않았다. 의자를 창가에 놓고 멍 때리기를 했다. 


 검은 물체가 휙 지나가다 창을 툭 친다. 제법 세게 부딪혔나 보다. 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텃밭 쪽으로 날아간다. 다행이다. 새도 밤을 아는지 울지 않는다. 나처럼 잠들지 못하고 서성댄 새일까. 새가 날아간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무는 나무대로 고요하다. 잎사귀 하나 없는 나뭇가지에 앉은 달빛이 은근하다. 마음에 켕기는 것도 없는데 새벽마다 잠을 깬다. 달빛이 나를 깨웠나 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려 말고 심연 깊은 곳을 바라보라고.


 거실은 난로의 온기로 여전히 따뜻하다. 난로의 불은 잠들기 전에 꺼졌다. 황토벽돌이 온기를 머금었다가 품어내는 것이겠지. 사람의 온기는 어떨까. 온기를 가진 사람도 온기를 품은 황토벽돌처럼 주변을 따뜻하게 하겠지. 손익을 따질 필요도 없이 그냥 좋은 사람이 있다. 선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냥 편하고 좋은 것도 그 사람의 온기 덕이 아닐까. 


 달빛을 따라 서성거려본다. 은빛 달은 서쪽 하늘로 기울어져 간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 법정 스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나는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연유로 맺어졌던 인연은 소중하다. 인연은 맺고 싶어서 맺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잇살 느는 것만큼 인연도 많아진다. 혈육도 인연이요. 배필도 인연이요. 친구도 인연이다. 시절 인연도 있다. 옷깃만 스친 인연도 있다. 단순하게 맺어졌던 인연도 오래갈 수 있고, 특별나게 맺어졌던 인연도 금세 끝날 수 있다. 


 나는 무심코 지나간 인연이 떠오를 때면 ‘인연은 인연이 다하면 그만이니라.’ 법구경의 한 말씀을 새기곤 한다. 문득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을 생각한다. 이름을 부르면 영혼이 듣는다고 하던가. 영혼은 형체도 없지만 삶의 주변을 떠도는 공기 같은 존재여서 그럴까. 아직도 부모님에 대한 선명한 기억들이 많다. 내 자식도 마찬가지겠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내게 소중했던 인연들을 생각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든 죽었든 내 마음속에는 살아있기에 소중한 인연이겠다.


 방문이 열린다. 농부의 잠을 깨운 것 같다. 원래 새벽 형이니 일어날 시간이겠지. 슬그머니 잠자리에 든다. 따뜻한 이불속의 온기에 나를 파묻는다. 창을 비추는 달빛이 조금씩 쓰러진다. 날이 밝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바스락바스락 마른 잔디를 밟으며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가 자장가로 들린다. 농부의 사랑채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한다. 달콤한 새벽잠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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