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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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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05. 2022

3.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

  시아버님이 전화를 하셨다. 끙끙 앓는 목소리다.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 아비 보고 내려오라 해라. 병원에 가야겠다.’ 증세를 물었더니 머리가 띵하고 팔다리에 기운이 없단다. 언제부터 그랬냐고 물었다. 어제 읍내 이발소에 가서 이발하고 목욕하고 내과 병원에 다녀왔단다. 병원에서 별거 아니라고 약도 안 주고 주사도 안 주고 그냥 가라 하더란다. ‘아버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코로나 아닙니다. 피곤해서 그런 것 같으니 푹 쉬세요. 아비가 감산에 굴착기 작업하는데 연락해 볼게요.’ 이번 달만 지나면 아흔여섯이 되는 노인이다. 삶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하 신지. 백신도 제때 맞았다.  


 뉴스에서 코로나 변종 오미크론이 확산일로에 있다고 연일 보도되고 있다. 온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계시는 두 노인에게 직격 타다. 세뇌 당하고도 남겠다. 그런 와중에 이발소도 다녀오고 병원도 다녀온 것이다. 더구나 읍내에도 코로나 확진 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노인도 그 소식에 민감할 것이다. 노인은 당신 몸에 아주 사소한 이상만 생겨도 겁을 낸다. 노인이 되면 잔병치레는 당연한 것이라 해도 믿지 않는다. 죽을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떤다. ‘아무래도 내가 오래 못 살겠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겠다.’하시면서 백수를 코앞에 두셨다. 


 단감 과수원에 간 농부는 전화를 안 받는다. 굴착기 작업하느라 전화벨을 못 들을 거다. 내년부터 젊은이에게 넘겼다. 단감농사 초짜인 젊은이에게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치는 중이다. 엊그제부터 가지치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오늘은 작은 굴착기를 빌려와 길 다듬는 것을 가르치는 중이다. 잎이 다 떨어진 후에야 손볼 곳이 보인다.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물길 잡아주는 것도 겨울에 농부가 하는 일이다. 싹싹하고 바지런한 젊은이라 단감농사도 잘 지을 것이라 믿는다. 굴착기 다루는 법도 가르치고, 에스에스기 다루는 법도 가르친다. 내년 한 해는 선생 노릇 제대로 해야 할 것 같다. 무료강습인데 얼마나 잘 습득할지.  


 그 젊은이는 운이 좋다. 농부 같은 사람을 만나 살길을 찾은 거다. 단감 과수원은 기존 갖출 것 다 갖춘 상황이다. 좋은 거름 쓰고 친환경 농약 쓰고 감나무만 잘 다듬으면 된다. 고사리 밭도 그렇게 넘겼다. 이태를 가르쳐 고사리 농사에 필요한 자재까지 무료로 물려줬다. 첫해부터 투자 없이 소득이 생겼고 우리 집 고객도 그대로 넘겼으니 판로 걱정도 없다. 단감도 마찬가지다. 어떤 농사든 3년 정도는 꾸준히 투자도 많이 하고, 공도 많이 들어야 한다. 몇 해는 현상유지만 해도, 이익보다 밑천만 건져도 농사 잘 지었다고 할 정도다. 우리 집 고사리 밭과 단감 과수원을 물려받은 총각은 그런 단계를 건너뛰어 바로 이익을 창출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단감농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아쉽다. 이런 말도 해 봤다. ‘여태 빚 갚느라 허덕이고 이제부터 남는 장산데. 이삼 년만 더 단감농사짓자. 조금이라도 저축을 해 놔야 노후 대책이 될 것 같은데. 올해처럼 나나 당신이 대수술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실비보험도 없는데.’ 그래 봤자 마음 떠나버린 농부를 잡을 수 없다. ‘당신이 일꾼들 밥도 못 해주는데 무슨 농사를 지어. 나도 무릎과 허리가 아파서 더는 못하겠다.’ 어쩌랴. 아내 생각해서라는데. 내년부터 저축도 좀 할 수 있으련만 손 떼기로 마음먹은 농부를 되돌릴 수 없다.


 어떻게 되겠지. 살아갈 방법은 생긴다. 여태 살아온 만큼의 경제력이 앞으로 우리 부부가 살아갈 만큼의 경제력이다. 다른 방법으로 충당이 되겠지. 그게 인생이다. 낙천적인 성격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괜찮아 살만큼 살았잖아. 더 나빠진들 어떻고, 더 좋아진들 어떤가. 늙어가는 몸 그만그만하게 살다 곱게 가는 게 행복이지.’ 아직 젊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는 아닐까. 막상 내가 시부모님처럼 상노인이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며 더 오래 살고 싶어 안달 하지나 않을까. 코로나 백신 다 맞은 어른이 몸살기에 놀라서 코로나 걸린 것 같다고 병원에 가자하는 마음도 이해는 된다.


 시아버님의 앓는 전화를 받은 지 30분쯤 지났다. 다시 전화벨이 울릴 때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았다. 

 “갸아한테 말했나?”

 “아니요. 굴착기 작업한다고 전화벨 소리를 못 듣나 봐요. 점심 먹으러 오면 이야기할게요. 아버님 그때까지 방바닥 온도 올리고 따뜻하게 누워 계세요. 병원은 오후에 가면 덜 복잡하니까요.”

 당장 목소리가 살아난다. 콸콸한 목소리에 노기를 띤다.

 “놔도라. 아주머니 오모 병원 가면 된다.”

 “그러세요. 별 거 아닐 겁니다. 감기 기운이 조금 있나 보네요. 어제 이발소로 목욕탕으로 병원으로 다니셨으니 고단해서 그럴 거예요. 코로나는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시아버님은 전화를 탁 끊어버린다. 나는 빙긋 웃는다. 요양보호사가 잘하겠지. 코로나가 노인의 정신에 깃들어 괴롭힌다. 노인을 사지로 몰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는 것은 텔레비전이다. 뉴스에 귀와 눈을 박고 사는 노인들이다. 상노인일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집착에 가깝다. 머리만 띵해도, 다리만 저려도, 허리가 뻐근해도, 밥맛이 없어도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것은 아닐까’ 과대망상에 빠지게 된다. 하는 일 없이 하루를 열고 닫는 것이 일상인 노인은 하나에 꽂히면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내가 코로나에 걸렸나 보다. 생각하면 안 아팠던 몸도 더 아프게 느껴진다. 기침만 살짝 해도, 목만 칼칼해도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지레 겁먹는 것도 노인의 마음이다.  


 농부는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온종일 굴착기 작업하는 바람에 지쳐 보인다. 저녁을 먹자마자 농부에게 시댁에 다녀오라고 등을 밀었다. 노인이 많이 우울한 것 같다는 요양보호사의 전화도 받았다. 노인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죽음이 목전에 앉았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의식하실 연세다. 언제 저승사자가 와도 따라가겠다는 마음을 먹다 가고 막상 죽을 것 같으면 더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우리 부부 외에는 자식들조차 자주 볼 수 없는 처지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탓이기도 하다. 모두들 몸을 사린다. 오미크론이 만연하고 있다는 소식, 하루에 코로나 확진 자가 7천 명이 넘어섰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한다. 부모는 상노인, 자식도 며느리는 중노인이다. 노인은 외롭다. 노인이 노인을 모셔야 하는 현실은  슬픔이다. 어쩌겠나. 한 생을 사는 일이 오십보백보 차이라지만 인명은 재천이다. 자기 목숨도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정해진 수명대로 살다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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