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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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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Feb 05. 2022

9. 찌그럭찌그럭 노랑 냄비

 

  찌그럭찌그럭 여기저기 흉터투성이 노랑 냄비 같다. 누가? 내가. 나를 내 기준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를 자기 기준으로 보는 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그런가. 나도 남을 내 식대로만 보고 판단하는가. 부모가 자식을 보는 법이나 자식이 부모를 보는 법이나 부부가 서로를 보는 법이나 똑같지 않을까. 내식대로 보는 것,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내 편견과 느낌에 맞추어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 인간의 잣대 같다. 


  점심 밥상 앞에 앉은 그는 인상파다. 또 갈 거가? 어딜? 나는 알면서 되묻는다. 천궁 의료기 무료 체험하러 가는 것에 대해서다. 전화번호는 왜 가르쳐 준 거야? 형님 따라 처음 갔더니 인적 사항 적던 걸. 그것도 불법이다. 거기 지사장이란 남자가 꽤 매력적이던 걸. 약을 올린다. 한 오십 중반 정도. 노래도 엄청 잘하던걸. 그래, 가 봐라. 안 사고 배기나 보자. 벌써 반쯤 넘어갔네. 그는 내가 몇 백만 원 하는 의료기를 덜컥 구입할까 봐 안달이 났다. 오늘은 주말이라 안 한다네. 월요일 날 가야지. 나는 살살 약을 올린다. 당신도 같이 가 봐. 진짜 원적외선인가 게르마늄인가 모르겠지만 효과 만점이더라. 

 

 그가 닦달해도 화도 안 난다. 당신 뜻대로 아내를 좌지우지하던 노인을 삼십 년도 더 오래 봐 온 터라. 그 노인의 아들인 걸. 가정교육이 뭔가. 알게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다가 노인이 되면서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이 집안 내림이라는 말로 회자된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나. 세태 따라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상할 따름이다. 실컷 약 올리고 마지막에 ‘안 간다. 안가.’ 소리 지르자 마음을 놓는 눈치다. 아이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티격태격하면서 무료체험 다닐 만큼 그것이 효과적인 것도 아니고, 솔직히 양심상 치료받고 선물 받고 아무것도 안 사고 발 끊기도 어렵다.  

 

 그는 시댁에 점심 차려드리러 가더니 금세 왔다. 요양보호사가 있더란다. 며칠 전 건강 검진한다고 빠지더니 주말에 채우려 왔구나. 눈치챘다. 노인은 또 죽는시늉을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엄마, 할아버지 목소리가 다 죽어가던데 괜찮은 거야? 딸이 전화를 했었다. 그렇게 좋은 것만 드시는데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그냥 습관인 것 같다. 방법이 없다. 내버려 두는 수밖에. 사실 아흔여섯에 접어든 노인이다. 맑은 정신이랄 수도 없다. 이웃에 살면서 삼시세끼 따뜻한 밥 지어 올리지 않는다고 미움받는 며느리로서 할 말은 없다. 삼십오 년 간 모셨으면 됐지. 

 

 요즘 집에서는 웃을 일이 없다. 부부 사이에 때가 많이 끼었다. 아니, 그냥 만사 귀찮아서 그렇다. 아무 말이나 막 할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으면 어떨까. 말해봤자 내 치부 보이는 짓이지만 어떤가. 한 마디 했다가는 싸움의 발단인 씨앗만 생긴다. 늙은 부부로 사는 것은 인내하기 혹은 무심하기가 정답 아닐까. 황혼 이혼은 재결합이 될 수 없다.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좋은 감정은 모두 날아 가버린 건조한 상태기 때문이다. 이미 감정은 서로에게 치어 푸석푸석 삭아서 부서져버렸다. 그나마 명색을 이어가는 것은 왤까. 새로 시작하기에 이미 늙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시댁에서 분가할 때 가지고 나온 노랑 냄비가 있다. 노랑 냄비가 처음 등장했을 때 거금 들여 산 것이라니 아주 오래된 물건이다. 요즘 나오는 노랑 냄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야물다. 하도 오래 쓴 것이라 낡고 닳았지만 편해서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구멍이 나면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이지만 시집 온 이래 손에 익은 것이라 버리지도 못한다. 내가 그 낡은 노랑 냄비 같다.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묵은 때가 끼었다. 쇠 수세미로 빡빡 문질러도 때깔이 안 날 정도지만 편하다. 그에게 아내는 그런 존재 같은 것일까.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다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통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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