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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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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r 12. 2023

밥에 대한 명상

 밥에 대한 명상     


 아침이다. ‘일어나기 싫어. 왜 삼시 세 끼를 다 챙겨 먹어야 해? 밥 하기 싫어. 당신이 좀 해 봐.’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거실에서 책을 읽던 농부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 늦잠꾸러기 아내와 사는 새벽 형 남편의 아침은 길다. 배가 고파 허덕일 시간이다. 농부는 음악을 털어놓고 철제침대를 탁탁 친다. 아침마다 간단하게 해 주는 몇 가지 추나요법인 스트레칭을 해 주기 위해서다. ‘해 봤자 별 소용도 없는데 이제 그만할래.’ 여전히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철제침대에 눕는다.


 추나요법 소용이 없지 않다. 심한 척추협착증에 시달리던 내 허리가 일상을 견디는 것만 봐도. 겨우 5분 정도 해 주는 추나요법이지만 그 스트레칭으로 하루가 온전하다. 하루아침도 빼놓지 않고 해 주는 운동을 고마워하면서도 툴툴거린다. 이유 없이 짜증 날 때 있다. 내겐 아침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 밤잠은 못 자서 힘들고 아침잠은 못 떨쳐서 문제다. 날마다 먹는 밥, 삼시 세 끼를 챙겨야 하는 것이 짜증스럽다. ‘아침은 좀 굶자. 배도 안 고픈데 먹어야 돼?’ 이런 말이 목구멍에 올라온다.


 추나요법을 끝내고 아침 심장 약을 먹고 부지런히 밥상을 차린다. 밥상 앞에 앉았다. 농부가 조용히 ‘당신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일어나지 마. 밥은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게.’한다. 조용조용하는 말인데 그 말속에 저기압의 울림이 숨어 있다. 이럴 때는 내 꼬리가 내려진다. 꼬리를 내리고도 입은 터진다. ‘터진 입에 말도 못 하면 죽어야지. 둘이 살면서 말싸움이라도 해야 살맛이 나잖아. 당신 혼자 밥 차려 먹어도 나는 불편한 걸. 혼자 밥 먹고 있는 당신 보면 불쌍한 걸. 하기 싫어도 당신 덕에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니 내 몸이 견디지. 안 그러면 나 벌써 죽었다. 영양실조로.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 송 송. 갑자기 동요가 생각나네. 뭐 밥 명상 합시다.’ 농부가 웃는다. 나는 슬쩍 조기 살을 떼어 농부의 밥그릇에 놓는다. ‘당신 없으면 난 앙꼬 없는 찐빵이야. 오늘의 주제는 밥 명상! 어때? 괜찮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는 깔깔 웃는다.  


 국가지정 노인의 반열에 오르면 할머니는 누구나 밥 하기 싫단다. 중년 여성들 보편적 생각이 아닐까. 하루에 삼시 세 끼를 먹는 사람도 드물다. 남이 해 주는 밥이 맛있다는 시기가 지나면 남이 해 주는 밥도 먹기 싫어지는 단계가 온다. 밥 하기도 싫고 반찬 만들기도 싫고 사 먹는 밥도 싫다. 밥맛도 없다. 먹고 싶은 음식도 없다. 먹는 양도 적어진다. 음식 맛도 잃는다. 누가 대신 살림을 살아주고 집 밥을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 


 현대는 노부부만 사는 집이 대부분이다. 할머니가 밥 하기 싫다면 할아버지가 하든가 부부 같이 하면 되는데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길들어 산 할아버지는 부엌에 들어가는 것에 부정적이다. 남자 체면이 먼저다. 가끔 한 번씩 할머니를 거들어주기는 하지만 그건 선심이고 생색내기일 수도 있다. 할머니가 열흘 정도 밥을 차리면 한 번 정도 설거지를 돕거나 커피를 타는 것도 대단한 발전이다.  


 예를 들어 팔십 대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입원을 종용했다. 단 일주일이라도 입원해서 치료를 하는 것이 낫다고 했지만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우리 영감 밥은 어쩝니까? 해 놓은 밥도 챙겨줘야 먹는 사람인데.’ 그래서 입원을 거부하고 통원치료를 한단다.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길든 할머니에게 상을 줘야 하나. 그것이 여자 일생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할머니가 죽고 나면 할아버지가 밥 해 먹어야 하잖아요. 할아버지 모실 자식 있어요? 아무도 안 모셔요. 할머니 살았을 때 할아버지께 밥 하는 것, 반찬 만드는 것도 전수해줘야 해요. 누가 먼저 돌아가실지는 모르겠지만.’ 말해 봐도 소용없다. 돈만 가지고 나가면 입에 맞는 완제품을 사 먹으면 된단다. 과연 마트에 있는 완제품이 노인 입에 맞을까?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산사람은 산다.  


 사람이 사는 것은 따져볼 필요도 없이 밥 먹는 일이다. 살기 위해 먹거나 먹기 위해 살거나 밥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거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먹는다. 곡기를 끊으면 죽는다. 삶의 단순한 면이다. 단순하게 밥 하면 곡물로 지은 밥을 생각하지만 그 밥이 현대사회에서는 달라졌다. 밥 대용품이 밥을 대신한다. 빵이나 고기, 떡, 국수도 될 수 있고 과자나 야채, 과일도 밥이 된다. 배고픔만 면하면 된다. 삼시 세 끼의 아성도 무너지는 추세다. 하루 한 끼만 먹고 산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밥 대용품을 많이 먹어도 배가 안 찬다며 그래도 밥을 먹어야 배가 든든하다는 것은 노인들이다. 


 촌로는 밥 심으로 산다. 내게 삼시 세 끼는 굳은살이다. 처녀시절 대충 먹던 삼시 세 끼였지만 촌부가 되면서 삼시 세 끼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시집살이할 때는 밥 때문에 꾸지람도 많이 들었고 부부싸움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입만 까다로운 시댁이었다. 삼시 세 끼마다 새 반찬을 해 내야 하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고 고충이었다. ‘그놈의 밥이 뭔데. 밥 좀 안 먹고살 수 없나. 날마다 먹는 밥 똑같은 반찬이면 어때서. 한 끼 먹어치우면 되는데.’ 그러면서 불만도 쌓았다. 더구나 일꾼을 많이 부려야 하는 살림이라 두 번의 새참과 일꾼들 점심은 내 정신과 몸을 휘게 했다. 삼시 세 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 몸이 망가지면서 일꾼 뒷바라지도 버겁게 다가왔다. ‘밥 안 먹고살 수 없나. 밥밥 하다 인생 종 치겠네.’ 푸념도 했었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지금 나는 밥에서 편해지긴 했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하자. 밥 하기 싫으면 나가서 먹자.’ 주의로 바뀌었지만 나가서 먹는 밥도 귀찮아지고 맛이 없어지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내 손으로 만든 반찬이 내 입에 맞다. 가끔 내 맘대로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간단하게 먹기를 실천한다. 농부가 반찬 까탈 부리면 ‘난 당신이 차려주는 밥이 젤 맛있는데.’ 애교작전으로 무마시키기도 한다. 밥, 죽을 때가 돼야 곡기를 끊을 수 있는 밥, 밥을 생각하다 보니 벌써 밥 때다. 밥 끊을 수 없는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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