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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n 25. 2023

  찻잎에 깃든 추억

 찻잎에 깃든 추억   


  

 그가 찻잎을 따고 있다. 며칠 전 찻잎을 따서 발효차를 만들었지만 남매에게 나누어주고 나면 우리 먹을 것이 적을 것 같았다. ‘황차를 더 만들어야 하는데. 찻잎 따기가 힘들어.’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었다. 자상하고 부지런한 남자, 찻잎을 딴 소쿠리를 내 코앞에 들이대고 흔든다. ‘향기는 기가 막히다.’는 그에게 축담 옆의 마삭 꽃을 가리키며 ‘찻잎 향기가 아니라 마삭 줄 꽃향기겠지.’ 어긋나는 대답을 해도 빙그레 웃는다. 


 나도 소쿠리 들고 차밭에 들어섰다. 기름을 바른 것처럼 반질거리는 어린 찻잎이다. ‘맛있는 차로 거듭나기 해 줘. 안 아프게 살살 따 줄게.’ 찻잎에게 말을 건다. 손놀림에 비해 소쿠리에 담기는 찻잎은 적다. 덖음 차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부드럽고 어린 찻잎이다. <찻집 나무그늘> 상호를 걸고 운영할 때가 있었다. 20년이 지났다. 우리 집을 다녀간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그들은 기억할까. 내 손으로 만든 차를 우려 손님 앞에 내던 그 차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1992년에 이곳에 자리 잡았다. 동네에서 뚝 떨어진 골짝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산속에 들어가 어찌 살 거냐고 걱정했었다. 한동안 전화조차 없이 살았었다. 다음에는 삐삐 선을 깔아 외부와 연결했고, 어렵게 무선전화기가 놓였다. 나는 염소와 개와 닭과 온종일 살았었다. 책과 글쓰기가 없었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30년 동안 내 터전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산기슭에 터를 다질 때만 해도 이웃이 없었지만 띄엄띄엄 몇 집이 늘어난 것이 다를 뿐이다. 30년이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산다. 


 그러나 숲은 알게 모르게 변화를 거듭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변화를 감지할 때가 있다. 처음 터 잡았을 때만 해도 주변이 온통 진달래와 철쭉, 싸리꽃(우리 동네에서 조팝나무꽃을 싸리꽃이라 부른다.), 억새밭이 장관이었다. 역광을 받고 반짝이는 억새밭, 장끼와 까투리가 사랑을 하고, 꺼병이 떼를 거느리고 산길을 활보했었다. 고라니 떼가 비탈을 뛰는 모습도 흔했고, 멧돼지가 단체로 소풍을 다니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염소를 방목하고 개를 풀어 키우면서 멧돼지나 고라니, 너구리, 족제비 등, 야생동물들이 수난을 겪었다. 


 마당의 수풀에 집을 지었던 산토끼, 차밭에 알을 품었던 까투리,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멧돼지, 텃밭에 들어와 시금치와 상추를 뜯어먹던 고라니, 처마 밑에 집을 지었던 말벌들, 축담에 늘어져 햇살바라기를 하던 뱀들,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그 생명체들이 그립다. 사람이 살자 산짐승은 알아서 터전을 옮겨갔지 싶다. 한 자리에서 거듭나기 했던 세월은 너덧 살 어린애였던 남매가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섰고, 우리 부부는 노인이 되었다. 이제 운전면허증을 반납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두어 시간 딴 찻잎을 그늘에 널었다. 싱그러운 찻잎 향에 코를 박는다. 모든 일은 정성이 중요하다. 이번 찻잎만 제대로 비비고 털어 발효시키면 일 년 먹을 차는 될 것 같다. 건너편 솔밭의 찻잎은 누가 딸까. 솔 향이 가미된 차 맛은 독특한데. 오늘은 찻잎과 노는 날이다. 들며 나며 찻잎 손보고 수영장 다녀왔다. 해거름이 내릴 때 시든 찻잎을 비비고 털기를 반복해서 대소쿠리에 담았다. 발효가 잘 되어야 할 텐데. 향긋한 차향에 취해 밤을 맞는다.

                                 202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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