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겠나.
그는 트럭에 목수 일에 필요한 물건을 가득 싣고 아침 일찍 떠났다. 명상 센터에 목수 일 해 줄 게 있단다. 내 돈 들여가며 봉사활동 하는 그는 몸도 마음도 젊은 것 같다. 한시도 손재고 있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일을 만들어서 고생하고, 일을 만들어서 돈을 쓰는 사람이다. ‘그래, 당신 뜻대로 하소. 하고 싶은 거 뭐든지 하소.’ 딴죽 걸지 않기로 작정했지만 가끔 앙금이 생긴다. 그때마다 마음공부 하는 셈 친다. 어쩌겠나.
엊그제는 뜬금없이 건조기를 사겠단다. 내게 의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화를 엿들었다. 동네 아저씨께 그 집 건조기 살 수 있느냐고 묻는 전화였다. 그 집이란 노인 부부가 살다가 부부가 요양원에 들어간 집이다. ‘가정용 건조기도 아니고 큰 건조기가 왜 필요할까. 건조기로 뭘 하려고?’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나무를 말리려면 건조기가 필요해.’ 한다. 목공소를 열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공예품을 만들 것도 아니고, 나무 몇 개 말리려고 건조기를 사? 어이가 없어 못 들은 척 했다. 어쩌겠나.
우리가 농사 많이 지을 때는 진짜 건조기가 필요했었다. 십 수 년 전, 그의 친구가 쓰던 건조기가 있었다. 그 친구가 죽었을 때 그 건조기를 우리가 가져오자고 했었다. 사업하다 파산하고 고향 들어온 그 친구는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건조기도 농부 이름으로 사준 것이었다. 겨우 3년 정도 쓴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건조기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었다. 고사리와 단감농사를 대량으로 짓던 그때는 진짜 건조기가 필요했었는데. 물론 단 돈 몇 푼도 아쉬울 때였으니 건조기를 구입할 수 없었던 것은 이해하지만. ‘건조기가 왜 필요해?’ 이유를 물었다. 딸의 생일선물로 앉은뱅이책상을 만들어 주겠단다. 책상 만들 원목 나무 말리려면 건조기가 필요하단다. 돈 적게 드는 헌 건조기를 사겠다니. 어쩌겠나.
내 속을 비웠다. ‘그래요. 당신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거지. 잘 됐네. 가을에 단감 말랭이 만듭시다.’ 그는 농사를 대폭 줄이자 자유시간이 많아졌다. 진취적인 그는 유투브와 인터넷을 선생으로 삼았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당장 필요한 것이면 한 번 쓰고 버려도 사려고 든다. 나이 생각 좀 하고 삽시다. 타고난 성격은 못 버리지. 어쩌겠나.
칠순이 코앞인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안 쓰는 물건을 처분하는 일이 우선이다. 생활용품도 있는 것 재활용해서 쓰다 버려야 한다. 우리가 죽고 난 후 뒤처리할 애들 생각해서 정리정돈하면서 살아야 한다. 두 어른이 쓰던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시댁을 생각하면 내가 가진 것들이 더 무거워진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낡은 것이라도 쓸 수 있으면 쓰다가 버리기. 사는 것은 사절 좀 할 수 없나. 반면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기운 없다느니, 아프다느니 하는 말이 쏙 들어가고 생기가 돈다. 어쩌겠나.
그가 없는 하루는 참 조용하다. 둘이 살아도 별 말이 없으니 조용하긴 마찬가진데 왜 혼자라서 느긋하고 편할까. 때가 되어도 밥상 차릴 생각도 없이 간단하게 해결한다. 수영장에 다녀와 컴퓨터 놀이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하룻밤 자고 올 것이라며 기다리지 말란다. ‘안 기다려요. 혼자 잘 먹고 잘 잘게요.’ 내 대답에 ‘그리하소.’ 대답이 시큰둥하다. 우리 나이는 부부가 가끔 떨어져 사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그런데 왜 자정이 넘도록 잠이 안 올까. 옆자리가 허전하다. 어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