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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l 13. 2023

 소설 읽기와 매실

소설 읽기와 매실     



  일요일은 쉬는 날이다. 수영장도 쉬는 날이니 온종일 현관 밖에 나갈 일도 없다. 눈만 마당을 돌고 창밖을 돌고 뒤꼍을 돌았다. 노랑나비 흰나비 쌍으로 몰려 마당을 배외한다. 민들레꽃과 수선화, 달개비 꽃에 앉았다가 날아올랐다가 사랑놀이를 하는데도 나는 무심하다. 예쁘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하는 마음조차 없이 그냥 바라본다. 온종일 안개가 낀 것 같은 시력이다. 책 읽는 것도 힘겹다. 글자에 집중하면 사물이 흔들린다. 안경을 쓰도 마찬가지다. 

 

 책 한 권 다 읽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오시리스의 신비 1』권이다. 도서관에서 2권이 안 보여 못 빌렸다. 어떤 책이든 잡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데 이번에는 느긋하기로 했다. 신화나 전설을 바탕으로 쓴 소설은 흡입력이 있다. 그중에 이집트 사막이 주 무대일 때는 더 몰입하는데 이번에는 좀 느슨하다. 현실감이 적어서 그럴까. 작품의 흐름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가. 선택받은 자와 그 선택받은 자를 지켜주는 신의 존재, 갖은 고난과 죽음의 고리를 풀어가는 것이 운명인 자,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생각하며 읽다 보니 마지막 장이었다.

 

 그다음 잡은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단편 소설집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단편들이라 읽은 작품도 읽지 못한 작품도 새로운 맛을 느낀다. 토마스 만, 펄벅, 앙드레지드, 까뮈, 싱클레어 루이스 등등. 그중에 펄벅의 『약혼』은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의 심리를 아주 잘 그렸다. 까뮈의 『어떤 손님』역시 사회 부조리를 드러냈다. 앙드레지드의 『전원 교향곡』은 오래전 읽은 소설이지만 작가는 잊어버리고 목사와 눈먼 소녀의 사랑이야기만 기억했었다. 나는 제목만 보고 음악가 모차르트의 『전원 교향곡』과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떠올렸다. 노인이 되면 중앙기억장치도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책만 봤더니 온몸이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처럼 묵지근하고 눈은 침침하고 흐릿해서 바람에 일렁거리는 수면 같다. 감산에 다녀온 농부가 나가잔다. ‘그래, 바람 쐬고 오면 나아지려나.’ 따라나섰다. 단골집에 가서 점심 한 끼 먹고 시골길 한 바퀴 돌고 오니 눈이 좀 맑아진다. 노인이 되면 독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이라 오래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책 읽기조차 접으면 무슨 낙으로 사나. 

 

 오후에 농부는 매실을 땄다. 약을 안 치는 우리 집 매실은 이삼 년 간 제대로 수확을 못했다. 신기하게도 올해는 제법 된다. 농부가 가지치기를 잘해서 그런가. 해마다 담근 매실효소는 아직 넉넉하다. 올해 매실은 술을 담그기로 했다. 과실주를 사다 부었다. 몇 년 숙성시켰다 먹으면 약이 될 것이다. 감산 곁에 있는 매실은 어떻게 할까. 농부는 따 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어른들이 계실 때는 해마다 시댁 매실효소를 담가드려야 했다. 매실 액 반, 소주 반을 섞어 반주로 드셨던 시아버님 때문이었다. 

 

 그때는 시댁과 우리 집 매실 액을 담가야 하니 매실이 많이 필요했다. 우리 집 매실로 모자라면 이웃집 매실을 사서 담가야 했었다. 그 매실이 올부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감산 곁의 매실을 버리려니 아깝다. 매실 필요한 사람 있으면 따 갔으면 싶지만 그것도 번거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따서 싸 보낼 수 없으면 포기해야 한다. 사람들은 완제품을 받기 원한다. 발품 팔아가며 따 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돈만 들고 시장에 가면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하니.’ 그런다. 

 

 다들 알아서 제 삶을 산다.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내가 알아서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다. 오지랖 넓었던 젊은 날도 있었지만 나이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 내가 거두어들일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매실이 담금 주와 만나 화합하는 사이 나는 다시 소설 속으로 빠져든다. 현실의 나를 잊고 싶어서 소설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때도 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이 그 속에 있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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