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처음>
물밑 기차를 기다리는 소금 꽃
연주는 마늘밭에 난 풀을 뽑았다. 뚜우! 뱃고동이 울었다. 바다 쪽을 봤다.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손님들이 오는 것일까. 대통령 생가를 찾아오는 관광객 덕에 부두 가는 완전히 도시풍이다. 염전도 관광객의 인기를 끄는 장소다. 부둣가를 중심으로 술집, 노래방, 모텔, 민박집, 횟집, 음식점도 늘어났다. 관광객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하이도 출신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부터 더 많은 인파가 몰려온다.
연주는 호미를 들고 멍하니 부둣가를 바라봤다. 오늘도 염전 구경을 오는 사람이 있을까. 염전을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소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궁금해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정제시키는 과정을 꼼꼼하게 묻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소금 창고로 안내하면 모두 입을 쫙 벌리며 넋을 놓고 바라본다. 역대 왕릉보다 더 큰 저것이 모두 소금이냐고 묻기도 한다. 중국산 싼 소금이 들어와 염전에 뿌려져 국산으로 둔갑한다는데. 여기서는 그런 일 없느냐고 심각하게 묻는 관광객도 있다. 연주는 그런 질문에 쓰게 웃었다. 불신의 벽은 살아갈수록 더 두꺼워지는 것 같아서.
연주는 혜숙이가 떠난 섬이 쓸쓸하다. 혜숙은 섬을 떠나면서 집은 외지인에게 팔았지만 염전은 팔지 않고 그녀에게 염전을 맡아 달라고 했다. 아이들 제 앞가림하면 돌아와 다시 염전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가능할까. 남자 없이 여자 혼자 하기엔 염전 일은 중노동 중 중노동이다. 남자라도 꿰차고 오면 모르나. 연주는 혜숙이 그립다. 섬을 떠난 후 두어 번 다녀가곤 연락조차 없는 친구였다. 연주는 고개를 저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우리가 염전을 지키고 있는데. 기다려야지. 이참에 애들이나 보러 다녀올까.’ 연주는 목포에서 직장 생활하는 큰 애와 작은 애, 대학 다니는 막내가 보고 싶다. 마늘밭에 풀만 뽑아놓고 밑반찬 몇 가지 만들어서 힁허케 다녀와야겠다며 다시 마늘 골에 주저앉았다.
“아지매, 소포 왔어요.”
한창 풀매기 명상에 빠진 그녀를 누군가 깨웠다. 밭 아래 길 위에서 집배원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손에 낀 장갑을 벗어 호미랑 같이 밭골에 놔두고 길섶으로 나갔다.
“우리 애들인가요?”
“아니요. 보낸 사람이 김혜숙이네요.”
“혜숙이가?”
도톰한 책을 받아 들고 연주는 눈물이 글썽했다. 겉봉에 쓴 김혜숙이란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시렸다. 집배원 아저씨가 떠난 후 연주는 소포의 겉봉을 급하게 뜯었다. <물밑 기차를 기다리는 소금 꽃>이란 제목의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푸른 바탕에 소금이 하얗게 깔린 염전 위에 장난감 같은 기차 한 칸이 놓인 그림이 그려진 수필집이었다. 저자의 이름이 특이했다. 김 명지. 모르는 이름이었다. 책에 실린 작가 사진을 봤지만 역시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신 책갈피 속에 혜숙이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우연히 교보문고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물밑 기차라는 말에 확 끌려 샀는데. 역시나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책 속에 너에 관한 긴 여행기가 실렸기에 보낸다. 책 제목을 찾아 읽어 봐라. 난 잘 산다. 너도 잘 살고 있지? 옛날 우리 집에 들어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편지를 보내야지 하면서도 쉽게 편지를 쓰지 못했다. 미안하다. 직장 다니랴. 애들 뒷바라지하랴. 혼자 아이 둘 대학 보내기 쉽지 않았다. 그나마 애들이 장학금이라도 받아줬으니 살아낼 수 있었지 싶다. 이제 나도 한시름 놨다. 두 애가 모두 직장을 잡았네. 그동안 직장도 없이 빈둥거려서 애가 탔는데. 염전일 하던 때 생각하고 눈높이를 낮추어 보라고 했더니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연주야, 그 섬에 선장님과 네가 있어 든든하다. 힘들 때면 너를 생각한다. 나보다 더 섬 아낙이 되어 사는 너를 생각할 때면 기운이 난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 보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때 그 시절, 섬에 살 때가 좋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먼 훗날이 아닐까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 큰 애가 몇 년 더 돈 벌어 섬에 돌아가고 싶다는구나. 그때까지 우리 염전 잘 좀 돌봐주기 바란다. 잘 지내라. 또 연락할 게. 선장님께도 안부 전해 주고. 나 잘 사니 걱정 말라하고.’
2014년 오월 서울에서 혜숙이가.
연주는 호미와 장갑을 챙겨 마늘 밭에서 바다 쪽으로 있는 펑퍼짐한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 안에는 무덤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무덤 양쪽으로 한 아름도 더 되는 해송 두 그루가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연주는 오른쪽 무덤 앞에 놓인 넓은 상석에 앉았다. 햇볕에 데워진 상석이 따뜻했다. 연주는 책을 베개 삼아 상석에 누웠다. 하늘이 파랗게 내려왔다. 연주는 혜숙을 생각했다. 그 사건만 없었어도 혜숙은 아직 이 섬에 남아 있을까. 우리 부부와 함께 여전히 너나들이하며 살고 있을까. 그는 왜 그렇게 가야 했을까. 연주는 자연산 전복이 자라는 바위섬을 떠올렸다. 그는 왜 그곳에 갔을까. 바위 위에 올려놓았던 신발과 물안경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연주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슬며시 베고 있던 책을 빼 목차에서 <물밑 기차를 기다리는 소금 꽃>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것은 긴 여행기지만 소금 꽃 같이 빛나던 그녀를 생각하는 글이다. 나는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소금 한 주먹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소금 알갱이를 만지면서 생각한다. 아직도 그녀는 물밑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그녀는 섬 아낙으로 홍어처럼 폭 삭아 소금 꽃처럼 반짝일지 모른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억센 어부의 사랑에 발목이 잡혀 섬에 주저앉은 그녀, 통통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바다가 숲이라던 그녀, 그물을 풀고 거두어들이는 동안 바다에 빠져 산다는 그녀, 그냥 바다가 좋다던 그녀, 바다에서 전복을 키우고, 전복을 따면서 전복 속에 아무도 모르게 진주를 키우던 그녀, 그녀는 지금도 물밑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거기 물밑 기차는 다니고 있을까. 그녀는 예뻤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키에 갸름한 얼굴, 쌍꺼풀 진 큰 눈, 도톰한 입술, 그 작은 섬에서 만난 그녀는 화장기도 없는데 눈부신 미모였다.
그녀를 만난 것은 오래전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이를 데리고 겨울 여행을 떠난 것은 순전히 꽉 막힌 일상에서 잠깐 숨통을 틔우고 싶은 욕망이었는지 모른다. 경상도 오지에 있는 산속에서 염소를 치며 살던 나는 늘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눈만 뜨면 바라보는 것은 사계절이 뚜렷한 숲과 숲을 맘대로 휘돌고 다니는 새까만 염소 떼뿐이었다. 아이들은 면 소재지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침마다 남편이 두 아이를 태우고 집을 나서면 온종일 혼자였다. 남편은 아이를 학교 앞에 내려주고 시댁으로 내려가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나는 오로지 숲과 나무만 보고 염소와 개, 닭, 고양이의 먹이를 챙기면서 남편과 학교에 간 아이들을 기다리는 일로 점철되어 살 때였다. 외롭게 사는 사람은 안다. 사람의 훈기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가슴 시리고 애틋한지.
아이들이 춘계방학을 하자 마음이 들썩였다. 아이들에게 산골과 다른 도시와 섬, 바깥세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남편에게 여행 허가서를 받아냈다. 장소는 멀리 전라남도 신안 하이도라는 섬이었다. 섬에는 혜숙이라는 친구가 살았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펜팔 친구였다. 그녀는 내 글이 실린 문학지의 어떤 지면을 통해 내 주소를 알아내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비슷한 또래 같으니 우리 편지 친구 하자고. 편지로 정이 들어 전화를 주고받게 된 사이였다. 혜숙은 나보다 두 살이 어렸다. 혜숙은 나를 언니라 불렀다. 혜숙은 전화할 때마다 섬에 놀러 오라고 했다. 마침 대선이 있었고, 하이도 출신이며 한국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던 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이도는 그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섬이었다. 덕분에 목포항에서 하이도까지 하루에 두 번 밖에 없었던 배편이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더구나 목포에서 두 시간 반이나 걸리던 뱃길이 쾌속정으로 바뀌면서 한 시간 만이면 하이도 섬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경상도 함안의 작은 면에서 전라도 목포시는 먼 길이었다. 더구나 차편이 수월하지 않아 길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야 할 형편이었다. 다행히 함안역에서 목포 가는 완행열차가 있었다. 밤 열한 시경 함안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다음 날 새벽 다섯 시경에 목포역에 도착한다고 했다.
봄이라고 하지만 2월은 추웠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아이들 등에도 각자 제 몫의 여행용품을 챙긴 배낭을 메게 하고, 나는 기차 칸에서 먹을 간식거리와 김밥을 만들어 배낭에 넣었다. 남편이 함안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생전 처음 밤기차를 타 보는 아이들 눈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들떠 말똥말똥했지만 나는 겨울 찬 냉기에 몸이 추웠다. 남편은 아내의 바깥나들이를 아주 싫어했다. 그런 남편에게 고집스럽게 여행 가겠다고 버틴 뒤 끝에 얻은 자유였다. 막상 여행을 떠나게 되었지만 마음까지 홀가분할 수는 없었다.
“아빠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아빠는 염소 밥 줘야지.”
기차역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남편의 야윈 모습이 안쓰럽게 비쳤다. 축산업을 접으면 가족나들이가 가능할까. 그때는 축산업만 접으면 가족끼리 언제든지 여행길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염소 키우는 업을 접고도 농촌의 삶은 가족 여행이 쉽지 않았다. 늘 일에 매어 동동거리며 살지만 살림은 늘지 않았고, 느는 것은 빚뿐이었다. 빚으로 산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지만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밤기차에서 아이들과 수수께끼 놀이도 하고, 손뼉 치며 노래도 부르고 책도 읽어주다가 셋이 꼭 끌어안고 깊은 잠에 빠졌다. 어딘가를 헤맸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엄마, 엄마, 목포래’ 아이가 흔들었다. 눈을 떴다. 희뿌연 창밖을 보며 안내 방송을 들었다. 목포역이었다. 두 아이에게 각자의 배낭을 메게 하고 역 광장에 나와 섰을 때는 새벽 찬 냉기가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 두 아이 손을 꼭 잡고 어디로 가야 하이도 가는 배를 탈 수 있을지 막막했다.
“하이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목포항으로 가란다. 부두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부두에 도착해 하이도 가는 배편을 물었다. 아침 8시에 첫 배가 있단다. 표를 끊고 부두를 나섰다. 날이 환히 밝았다. 하이도 가는 첫 배를 탈 때까지 두세 시간이 남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지척에 있다는 유달산을 찾았다. 목포 하면 떠오르는 유달산, 아이들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갔다.
유달산,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나지막한 산은 의외로 등산하기 좋은 악산이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토끼뜀을 하며 오르는데 나는 숨을 할딱이며 올라야 했다. 산 정상 정각에서 바라본 바다, 안개가 내 허리까지 깔려 있어 안개 바다를 봤지만 그 바다를 불그레하게 물들이며 올라오는 붉고 둥근 해를 가슴에 안으며 심호흡을 했다.
가수 이 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비를 만났다. 누구나 그 앞에서 목포의 눈물 노랫말을 흥얼거리다 가곤 한다. 나도 한참을 서서 노래비에 적힌 가락을 흥얼거렸다. 아이들은 정상에 올라 ‘엄마 빨리 와’ 소리치는데 내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겨우 정상에 올라 바다를 가득 메운 운무를 봤다. 맑은 날이면 아름다운 수평선을 볼 수 있다는 그곳에서 구름 위에 노니는 학을 생각했다. 내가 학이 되어 저 운무 위를 날아봤으면. 하산 길에 공원 의자에 앉아 남은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목포항으로 향했다. 찬 김밥도 맛있다는 아이들, 아이는 자라고 어른은 늙어가는 것을 우리는 인생이라 하든가.
하이도 가는 배를 탔다. 서해바다는 거무죽죽한 뻘 바다였고, 양쪽으로 즐비한 김양식장 사이를 쾌속정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렸다. 바다, 하면 푸른 물빛만 떠올렸던 내겐 충격이었다. 서해바다는 잿빛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선실보다 갑판에 나와 바다를 바라보길 좋아했다. 처음 배를 탔는데도 배 멀미도 하지 않는 두 아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이도 섬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렸을 때 선착장에 서 있던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랫동안 내 행동거지를 쭉 지켜본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는 눈빛이었다.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그 눈빛을 외면하고 사람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선착장을 벗어나면 어느 가게든 들어가 <해수 염전>을 물어 찾아갈 예정이었다. 혜숙의 염전 이름이었다. 그때 어떤 여자가 다가왔다.
“혹시 명지 언니?”
“혜숙 씨?”
첫눈에 알아봤다. 우리는 서로 껴안고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금세 난 줄 어떻게 알아봤어?”
“여긴 좁은 섬이야.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모두 아는 얼굴이라고 보면 돼. 특히 언니와 두 아이는 눈에 띌 수밖에 없겠다. 표가 확 나는 걸.”
“그렇게 촌 여자 표가 나?”
“아니, 여기 사람들과 달라. 고상하고 매력적이다 언니. 참, 우리 신랑도 왔어. 저기 트럭 있는 곳으로 가자. 언니 마중 나왔다가 이웃집 아주머니 만나 수다 떨었거든. 그래서 선착장에서 못 본 거야. 신랑이 언니 왔다고 하더라. 준이 아빠!”
혜숙은 큰 소리로 자기 남편을 불렀다. 멀리 트럭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걸어왔다. 그 남자는 바로 선착장에서 만난 눈빛이었다. 나는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남자는 의외로 수줍어하며 손을 내밀었다. 두 아이를 운전석 옆에 앉히고 나와 혜숙은 트럭의 짐칸에 퍼질러 앉아 바람에게 수다를 실어 보내기 시작했다. 수다는 주로 혜숙이가 풀고 나는 갯바람의 향기를 맡았다.
하이도는 섬인데 섬 안으로 들어서자 오밀조밀 동네가 있어 산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가 달리는 길은 한하운 시인의 황토 길이었다. 나지막한 구릉지대는 온통 붉은 황토밭이었다. 황토밭은 기름져 보였고, 해풍을 맞으며 푸르게 자라는 마늘밭과 시금치 밭이 진초록이었다. 다만 멀리 바다 곁은 유난히 반짝였다. 유리를 깔아놓은 것처럼. 그곳이 염전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직접 염전을 눈으로 구경하지 못했던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눈뜸이었다. 염전 옆에 설치된 물 돌리는 기계, 산골 천수답에 물 댈 때 쓰는 기구처럼 이상했다.
대학생이 된 두 아이는 지금도 하이도 이야기를 한다. 그때 참 신기한 구경을 많이 했다고, 통통배를 타고 온종일 바다에 떠서 지내기도 하고, 어린 가오리에 된장 풀고 풋보리 잎을 뜯어 넣어 끓인 된장국도 별미였고, 가오리 초무침, 살아서 꿈틀대는 세발낙지를 소금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어망에 걸려 올라온 펄펄 뛰는 이름도 모르는 생선을 그 자리에서 쓱쓱 회쳐서 초장에 찍어 먹던 맛, 새우를 잡아 어린것은 살려주고 적당한 중간 크기를 줄낚시에 꿰어 그것을 미끼로 가오리를 잡아 올렸을 때는 아빠가 만들어 준 연 같다고 탄성을 지르다가도 길고 통통한 바닷장어를 잡아 올렸을 때는 ‘으악, 뱀이다.’ 비명을 지르며 선실로 도망가던 아이들, 아이들은 뭐니 해도 하이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배에서 먹은 해물 넣은 라면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비도 부슬부슬 오고 춥기도 하던 때 선장이 배안에서 연탄아궁이에 올려 끓여준 라면, 어망에 걸려온 잔챙이, 낙지, 주꾸미, 새우 이런 것들을 넣어 끓인 라면이었다.
잊어지지 않는 그녀는 선장의 아내였다. 스무 살 시절, 강원도 탄광촌에서 서울로 나와 구로공단에 다니던 그녀, 혜숙은 그녀와 함께 근무했다. 그녀는 여름휴가를 맞이해 난생처음으로 전라도 땅을 밟았다. 섬 처녀 혜숙에게 꼬여 남행열차를 탄 것이다. 혜숙은 강원도 숫처녀에게 전라도의 작은 섬을 환상적으로 심어 주었다. 섬에서 나고 자란 혜숙에게 섬은 별 볼일 없는 지지리도 가난한 곳이었지만 혜숙의 이야기를 듣는 그녀는 환상의 나래를 폈다. 갯벌에서 세발낙지를 잡아 올리는 것이며 조개를 캐는 것, 소금을 만드는 과정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하이도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 나지 않아. 가보고 싶어.”
“볼 것 없어. 오죽하면 내가 섬을 탈출했겠어. 그런데 참 요상해. 그 남자를 잊을 수 없는 거야. 이번에 가면 그냥 섬에 남을까 해. 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섬에는 혜숙을 기다리는 남자가 있었다. 혜숙은 사랑하는 남자조차 팽개치고 섬 탈출을 감행했지만 서울 생활은 혜숙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온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서울에서 공순이 생활 2년이란 서울살이 환상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혜숙을 따라나섰다. 강원도 산골 처녀의 이름은 이 연주, 한 번도 남녘으로 내려와 본 적이 없는 그녀는 혜숙과 함께 하이도에 도착했다. 푸른 물이 아니라 구정물 같은 서해 바다에 실망했지만 하이도는 참으로 예쁜 섬이었다. 김양식장이 없는 쪽의 바다는 물빛이 동해 바다 같았다.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섬에는 전복이 진주를 품고 자란다고 했다. 혜숙은 그녀를 끌고 섬 구경을 시켰다. 짝도 생겼다. 섬에서 통통배를 부리며 전복을 키우는 남자였다. 혜숙의 남자와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구릿빛으로 탄 남자의 강인한 팔뚝과 시원시원한 말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명이 선장이었다. 어려서부터 배를 탔단다. 배와 바다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이라 했다. 자연스럽게 혼기가 꽉 찬 총각과 풋사과 같은 어린 처녀는 잘 어울렀다. 넷이 함께 몰려다니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낚시도 하고, 전복도 땄다. 갯벌에 나가 세발낙지도 잡았다. 그녀는 하이도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시간은 화살촉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자 그녀는 안절부절 못 했다. 조금만 더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깊은 바다색을 띨수록 그녀는 안타까웠다. 서울 갔다가 다음 여름휴가에 다시 오겠다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내일이면 섬을 떠나야 하는 밤, 그녀는 그와 단둘이 동네에서 뚝 떨어진 외진 바닷가로 나갔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며칠 더 있다 가면 안 되냐고 잡지는 않겠다면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옛날부터 하이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 했다. 하늘이 하이도란 섬을 만들 때 목포항까지 닿을 거리에 바다 밑으로 굴을 하나 파 놨다는 것이다. 그 굴속에는 바다용이 살고 있는데 하이도 출신의 누군가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바다용은 승천을 하고 그 굴이 발견된다고 했단다. 나라에서 굴을 발굴해서 철로를 놓아 물밑 기차가 다니게 될 것이라 했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연주 씨와 내가 처음으로 물밑 기차를 타 보는 영광을 누리고 싶소. 가지 마시오. 내 짝이 되어 줘.”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스무 살 그녀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라면 선택해도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일단 이번에 서울 올라갔다가 부모님 허락받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선장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