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끝>
강노인은 식성이 까다롭다. 젊어서부터 장이 나빠 고생했다. 자연히 속이 편한 음식, 불편한 음식을 가리게 됐다. 특히 무슨 곰이든 단백질 덩이를 줄창 먹어줘야 기운이 났다. 강노인은 아내가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이삼일을 장작불을 모아가며 뽀얗게 우려낸 곰이야말로 진짜로 쳤다. 한 번은 며느리가 장작불 때는 것이 귀찮다고 가스 불에 끓였다. 진하고 구수해도 뭔가 불결한 것 같고 곰 맛이 안 나는 것 같다. ‘곰은 뭐니 뭐니 해도 장작불을 뭉긋이 대서 푹 고아야 제 맛이 나는 거다. 음식은 정성이 반 맛이라 했다.’ 강노인이 알아듣게 말했지만 며느리는 그 맛이 그 맛이라는 거다. 아내가 곰 하기를 싫어하면서 간혹 며느리가 제 집에서 곰을 해 왔다. 숟가락질하기가 껄끄럽다. 실인즉 평생 아내의 손맛에 익숙한 강노인이니 며느리가 해 주는 반찬이나 곰이 입에 맞을 리 없다. 아내가 해 주는 반찬도 옛날 맛이 안 난다고 타박을 하다 ‘그 맛이 그 맛이 거마.’ 아내가 구시렁거리기라도 했다간 밥상이 마당에 날아갔다. 이삼 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강노인도 며느리의 눈치를 본다. 아내가 자꾸 아프다고 자리보전하면서 의지할 상대가 옆에 사는 자식과 며느리니 도리가 없다. 사실 며느리는 시집올 때만 해도 곱게 자란 티가 났다. 밥을 해 먹을 줄도 몰랐고, 반찬을 할 줄도 몰랐다. 그런 며느리도 아내의 손맛을 흉내일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곰도 장작불에 고아 냈다. 그동안 고부간에 큰 갈등 없이 지내는 것도 며느리의 성격 덕이다. 잘 보면 대범한 성격이고, 잘 못 보면 칠칠치 못한 며느리지만. 동네에서 친딸이라도 그렇게 못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손자손녀가 대학 들어갈 때 입학금 명목으로 촌지를 준 것도 그동안 시부모에게 잘 한 상이었다. 그런데.
“아버님, 이젠 저도 곰 같은 거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대 놓고 대들 때는 학을 떼겠다. 한때 며느리가 미웠던 적이 있다. 아들 부부와 한 집에 살다 손자손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다. 아들은 아이들 교육을 핑계로 분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오순도순 손자손녀 재롱 보며 당신 할아버지처럼 살다 이승 떠나려니 했는데 불시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몇 날 며칠 곡기를 끊었지만 아들은 기어코 가솔을 이끌고 남의 빈 집을 빌러 나갔다. 강노인은 현금 한 푼 안 주고 빚만 몽땅 안겨 주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내쳤지만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막내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다. 강노인은 환갑이 되자 두 아들에게 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당신 대신 문중 대소사를 맡아주고, 노후를 의탁할 생각이었다. 강노인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모를 리 없다. 평생 신문과 책을 읽고 붓글을 써온 어른이다. 핵가족 제도가 보편화될 때는 세상이 말세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부터 노인 문제가 슬슬 물 위로 떠올라오기 시작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아들이 시골로 내려왔다. 강노인은 장남이 오길 바랐지만 막내가 왔다. 막내는 칠팔 년을 함께 살았다. 손자손녀 덕에 행복했다. 그 아들이 분가를 하다니 분명 며느리의 소작所作임이 분명했다.
“인자 너거는 딴살림 났싱께 너거 살림은 너거가 알아서 살아내야 할 끼다.”
못을 박았지만 농사일은 아들과 며느리가 없으면 해 낼 재간이 없었다. 아들 부부는 분가만 해서 따로 산다 뿐이지 시댁 농사를 지었다. 농산물 판매 수익도 강노인 통장으로 들어왔다. 강노인은 아들에게 땡전 한 푼 주지 않았다. 간혹 손자손녀에게 용돈은 줄망정 생활비 명목으로 주는 돈은 아예 없었다. 아들은 따로 축산을 시작했다. 농협에 저리 농자금을 탔다고 했다. 땅도 샀다고 했다. 집도 새로 짓는다고 했다. 빈손으로 빚만 안고 나간 아들이 자립을 한다 싶으니 대견하기도 했다. 빚으로 공중누각을 짓는 일이란 것을 알 리 없었다. 강노인 수중에 든 돈만 안 나가면 됐다. 강노인은 해마다 잔고가 늘어나는 통장을 보는 재미가 생겼다. 연금은 연금대로 저축하고, 벼 수확이나 마늘, 콩 등, 농토에서 나온 수입으로 생활을 하니 돈이 모일 수밖에. 강노인은 젊어서 못 해 본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양복이나 와이셔츠도 인근 도시의 유명 양복점에 가서 맞추어 입고, 구두도 맞추어 신었다. 오토바이도 낡은 것은 팔아버리고 새것을 사서 친구들과 전국 유람도 했다. 살맛이 났다. 호주머니가 두둑하자 건강만 잘 챙기면 된다 싶었다. 몸에 좋다는 건강식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지갑에는 항상 빳빳한 새 돈이 한 뭉치 들어 있어야 했다. 아내의 눈이 모로 돌아가도 알 리 없었다.
“와이리 잠이 안 오꼬. 잠 좀 푹 자 봤시모 좋것다.”
아내의 불면증은 수위를 넘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못 잤다. 얼굴에 짜증이 자글자글 했다. 특히 밥때가 되면 ‘딱 죽었시모 좋것다.’ 소리를 달고 살았다. 툭하면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아푸다. 와서 죽 좀 끼리라. 내가 아푸다. 병원 좀 가자. 내가 아푸다. 와서 밥 좀 해라.’ 아내는 며느리가 하루만 출근을 안 해도 안절부절못했다. 며느리는 시댁에 필요한 생필품에서부터 시부모 모시고 병원 다니기, 목욕탕 다니기, 오일장 봐오기, 외식시켜 드리기 등등, 도맡아 했다. 어쩌다 며느리가 못 온다면 아내는 화를 냈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해서 모진 말을 했다.
“집구석에서 하루 죙일 뭐 하냐? 반찬도 떨어졌는데.”
특히 명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더 심하게 며느리를 닦달한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 오면 싸 보내고 먹일 것을 몽땅 시골며느리에게 시켰다. 아내는 도시에 사는 자식들 도착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끝내놔야 직성이 풀렸다. 아내는 평소 말이 없는 대신 어쩌다 말을 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줬다. 말에 날카로운 가시가 들었거나 뼈가 있었다. 며느리도 자주 피를 흘리는 것 같은데 샐쭉했다가도 금세 툭 털어버리고 웃었다. 며느리의 성격이 좋아서 고부간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까. 강노인은 며느리의 변화를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다. 작은 불씨가 서서히 번져 걷잡을 수 없이 큰 불이 된다. 며느리도 자꾸 아프다고 했다.
“젊은 아가 와 그리 골골 하노. 내가 니 나이 때는 팽팽 날아 댕겼다.”
아내는 며느리 면상에 대고 퉁을 주었다. 아내는 뼈대 있는 이 초시 댁 둘째 딸로 열여섯 살에 강 씨 문중에 시집을 왔다. 강노인 부부는 칠십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의좋게 살았다. 의좋게 살았다는 것은 어패가 있는 말이다. 아내는 길 잘 든 소였다. 부리기만 하면 어디든 어떤 일이든 해 냈다. 토를 다는 법도 없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한 마디로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집에 와서 남편 시중을 들었다. 한여름을 온통 모시옷으로 사는 강노인은 풀 먹인 모시 올이 하나라도 빳빳하지 않으면 몸에 걸치지 않았고, 아내가 풀이 잘 됐다며 한 마디라도 구시렁거렸다가는 그 자리에서 모시적삼을 쫙쫙 찢어버릴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들판이 누렇게 익은 가을이었다. 타작을 해다 곳간에 재던 날이었다. 아내는 온종일 아들과 며느리와 논에서 탈곡기로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고 경운기에 잔뜩 싣고 온 나락 포대를 창고에 옮겨 쌓는 일을 할 때다. 경운기에서 며느리가 끌어내린 나락포대를 겁도 없이 덜렁 안은 것이 문제였다. 아내는 ‘아이고 오매’하면서 나락포대를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꼼짝을 못 했다. 평소 허리가 아프다고 밤이면 끙끙 앓던 아내였다. 허리가 아프다 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법이 없는 아내여서 예사로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오면 괜찮을 줄 알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제 어미를 승용차에 싣고 읍내 종합병원으로 갔다. 뼈 사진을 찍은 의사는 인근 대도시 큰 병원으로 가라 했다. 척추 뼈 한 마디가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병원에서 레이저로 척추시술을 받았다. 척추가 삭은 데다 골다공증도 심해서 수술은 안 되고 콘크리트로 땜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아들과 며느리, 큰 딸과 작은 딸과 사위가 놀라서 모두 달려왔다.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온 어머니가 금세 죽을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의사는 석 달 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서 이틀 만에 퇴원한 아내는 평생 처음으로 호강을 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침대를 장만하고, 며느리는 곰을 고고 보약을 짓고, 아내에게 지극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강노인 역시 아내가 입이 심심하다면 과일을 챙겨 대령하고, 물이 먹고 싶다면 컵에 물을 담아 대령했다. 평생 남편의 부름에만 응하던 아내가 거꾸로 남편을 부리는 맛에 눈을 떴다. 물론 아내는 들일에서도 집안일에서도 손을 놨다. 삼시세끼 며느리가 차려주는 따끈한 밥상을 받았다. 며느리는 아내의 머리도 손수 감기고 목욕도 시켰다. 며느리가 두 집 살림을 살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가 아닐까. 딸은 아내가 밀고 다닐 수 있는 멋진 외제 유모차를 선물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동네 상노인은 지팡이를 짚었지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날씬하고 멋지게 생긴 외제 유모차를 밀고 골목을 다니며 으스댔다. 유모차는 쉴 때 앉을 수 있는 의자도 되고, 푸성귀 같은 것을 거두어 담을 수 있는 가방도 달려 있어 여러모로 편리했다. 처음에는 유모차 미는 것이 남세스럽다던 아내는 동네 할머니들이 부러워하자 기가 살았다. 아내로 인해 지팡이 보다 유모차가 훨씬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동네 할머니들은 너도나도 헌 유모차를 구했다. 우리 동네에 유모차부대가 출현하게 된 내막이다.
강노인은 아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라고 단정한다. 허리 병이 다 나아 다시 들일을 하고 집안일을 맡게 되자 아내의 입에서 자주 한숨이 나오고 넋두리가 이어졌다. ‘세상 헛살았다.’는 거다. 가끔 며느리에게 하소연이 늘어졌다. 아내의 말은 언뜻 들어도 강노인에 대한 불만이었다.
“요새 겉으모 너거 시아베랑 진작 갈라섰을 기다. 내가 만다꼬 그 고생을 함서 살았노 싶은 기 억울하다. 저 영감 뜻 받고 살먼서 오지게 고생만 했제. 일에는 베돌이 묵는 데는 악돌이라 쿠더이. 너거 시아베가 평생 그리 산 사람이다. 곰이나 보약이 떨어지모 불벼락이 났제. 인자 곰하는 것도 징글징글하다. 이래 살다 죽으나 저래 살다 죽으나 한평생 사는 긴데. 내가 만다꼬 그리 머슴맹키로 살았시꼬 싶은 기 또옥 억울해 죽것다. 지금이라도 갈라설 수 있으모 내 혼자 단 며칠이라도 편케 살아 봤시모 싶다.”
아내의 허리가 기역자로 꺾였다. 아내는 툭하면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만 했다 하면 2주간은 보통이었다. 긴 병에 효자 나고,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얼마동안은 아내가 입원했다 하면 자식들이 난리였다. ‘어머니가 오래 살아야 하는데. 어머니 오래 사세요.’하면서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해다 준다. 건강식을 사다 준다. 곰을 해다 준다. 병원이든 집이든 자주 찾아오던 자식들도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또 입원했어요? 제발 자식들 애 좀 그만 먹이세요.’하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들도 딸도 병원비 하라며 두둑한 봉투를 내놓더니 봉투가 자꾸 얇아졌다. 봉투만 얇아진 것이 아니다. 입원했다 해도 ‘알았어요. 몸조리나 잘 하세요.’ 한 마디로 끝이고 바쁘다는 핑계로 문병도 안 왔다. 결근도 없이 출퇴근을 하는 자식은 옆에 사는 막내아들 내외뿐이었다.
이번에도 읍내 병원 의사는 아내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단지 노인 우울증이 심하고 기운이 쇠했을 뿐이라고 했다. 한 일주일 입원해서 영양제 투여하고 몸조리만 하면 나을 것이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자꾸 속이 아프다고 했다. 죽 외엔 아무것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은 다시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내시경을 하고 자기 공영영상촬영도 했다. 내시경 결과는 위가 티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내는 속이 아프다고 했다. 자기 공영영상 촬영 결과 뇌의 일부가 조금씩 경직되어 가는 중인데. 그것은 노인성이라 누구나 죽어가는 세포를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아내는 읍내 종합병원으로 옮겨 입원했다. 일이 터지려면 함께 터진다더니 시골며느리도 아프다고 누웠다. 허리디스크라고 했다. 수술하는 방법 밖에 도리가 없다지만 아내 때문에 수술을 미루고 있단다. 2주면 퇴원할 줄 알았던 아내는 한 달 내내 병원에 있겠다고 했다. 강노인은 시골며느리에게 미안했다. 허리에 복대를 차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면서 가을걷이를 하고, 강노인의 수발을 들었다. 겨우 타작을 해 들인 아들은 논을 남에게 소작으로 내주고, 비닐하우스 특수재배로 겨울에 고추며 호박을 심던 것도 접었다. 축사도 비웠다. 아들은 일당벌이 막일을 하러 나가기 시작했다.
강노인은 서울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서울에 올라가 있겠다고 통고했다. 서울 아들이 데리러 왔다. 강노인은 시골며느리에게 아내를 부탁했다.
“내가 니 땜에 서울 간다. 니 몸도 빨리 나사고, 너거 어매도 잘 부탁한다.”
“여기 걱정은 마시고 형님 댁에서 푹 쉬세요.”
그러나 강노인의 서울 살이는 일주일 만에 파장이 났다.
“아버님, 동서가 고생이 많아서 당분간 아버님을 우리 집에 모셨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찬밥도 그런 찬밥신세가 아니었다. 며느리는 둘째 치고라도 아들이 더 냉대를 했다. 혹여 늙은 내외가 서울에 올라오겠다고 할까 봐 미리 연막을 치는 것이었다. 툭하면 경제가 어렵니. 어쩌니 하며 돈 때문에 자식 부부가 옥신각신했다. 바늘방석이 따로 없었다. 서울며느리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저축 많이 해 놓으셨죠? 우리가 많이 어려워요. 애비 하는 일이 잘 안 돼 우리도 많이 쪼들려서요. 아버님은 연금 나오니 생활비 걱정은 없잖아요. 큰 애가 곧 결혼을 할 것 같아요. 서울에서 전셋집 얻으려면 몇 억은 들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서울아들은 또 이렇게 염장을 질렀다.
“어머니 병은 아버지 때문이랍니다. 어머니께 자꾸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잔소리도 하지 마시고요. 어머니가 하는 대로 그냥 두세요. 꼬치꼬치 따지니까 어머니가 자꾸 병원으로 도피할 생각만 하잖습니까. 연세도 있으신데 왜 그리 사사건건 간섭을 하세요. 간섭을. 평생 일만 꿍꿍하시던 어머니 아닙니까. 이젠 좀 몸도 마음도 편하게 사시도록 해 주셔야지요.”
그날 낮에 강노인은 서울며느리가 출타한 틈을 타 시골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야야, 내가 집에 내려가야겠다. 니가 좀 낫나? 니를 고생시켜서 미안하지만 집에 가모 싶다.”
“아버님, 안 돼요. 그냥 형님 댁에 계세요. 형님이 잘해 주시잖아요. 어머님이 아버님을 딱 보기 싫어하세요. 속은 괜찮은데 그게 다 마음병이래요.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퇴원 안 하시겠다고 해요. 어머님이 아버님은 그냥 서울 형님 댁에 사시라는데요.”
“씰데 없는 소리, 니까지 그런 말을 해? 너거 어메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조선에 없는 못 된 것들이 한 통속이구나. 니도 시부모 모시기 싫다 이거제. 오냐, 알았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오시라 할 때까지 당분간 계시라는 말입니다. 어머님을 달래 봐야지요. 여태 아버님께 비밀로 했지만 어머님은 노인우울증을 넘어 치매로 접어든 지 오래됐어요. 치매 약 먹은 지 5년이나 됐다고요. 아버님께 쉬쉬했지만 알 거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머님은 아버님 시중들기가 죽기보다 싫대요. 아버님과 같이 앉아 밥 먹는 것도 싫다고 하세요. 이혼시켜 달라고 하세요. 그걸 여태 모르셨어요?”
“그럴 리 없다. 너거 어매가 그럴 리 없다.”
“어머님 병의 원인은 아버님이래요. 그러니까 당분간 내려오실 생각은 마세요.”
강노인은 방바닥에 철버덕 퍼질러 앉았다. 세상이 노랗다 못해 하얗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