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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과 매듭

<단편소설. 중간>

by 박래여

채임은 몇 해 전에 농촌의 시댁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다. 시어머니와 남의 눈이 무서웠다. 아직도 그녀는 김씨 댁 며느리로 대접 받지 못했다. 집안 대소사에 불려 가면 부엌데기 노릇만 실컷 하다가 와야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역마살을 타고 났다고 믿었던 남편이 마음을 잡고 농사일에 매달리는 것이 신기했다. 한 시도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나돌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 때문에 억지 결혼을 했으니 그 마음이 오죽 할까 싶어서 채임은 십 수 년 동안 남편의 방임을 지켜만 보았었다. 일 핑계 대고 전국을 떠돌며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이기도 했지만 채임은 입을 봉하고 살았다. 오면 오는 구나, 가면 가는구나. 생활비라고 내 놓으면 고마워하고, 생활비를 주지 않을 때는 시간제 파출부도 하고, 요구르트나 우유 배달도 하면서 버티었다. 어차피 몇 년을 아이 데리고 혼자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생겼다. 큰 애와 터울이 많이 진 탓에 오히려 편했다.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든 큰 애가 동생을 무척 잘 보살폈다. 남의 일 가는 엄마를 대신 해 엄마 노릇을 잘 했다.

채임은 결혼하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엠에프가 터지면서 남편이 다니던 건설회사가 부도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친구의 빚보증을 섰다가 그 친구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빈 털털이가 되었다. 경기 침체로 건설업체가 줄줄이 도산하던 시기였다. 채임은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피땀 흘려 마련했던 부산 변두리 집을 팔아 부채 일부를 갚고 나니 살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차 시어머님이 쓰러졌다는 연락이 왔다. 시어머니는 풍을 맞으셨다. 한동안은 대구 형님네서 병 수발을 했다. 대구 근교의 한의원에 입원하여 중풍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시어머님은 회복이 되긴 했지만 풍을 맞은 오른쪽 수족에 힘이 없었다. 누군가는 모셔야 할 처진데 시어머니는 한사코 촌으로 가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채임의 농촌 행은 절대 반대였다. 작은 며느리에게 얻어먹는 밥은 목구멍에 넘어가기도 전에 체한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며느리로 받아들였지만 그 때까지 마음까지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땜새 들어올 생각은 말거라.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너거 살 도리는 너거가 해야제. 촌에 들어와서 우찌 살라꼬 그라노. 느므 눈이 더 무섭은 기라. 느므 입살에 올라 댕기는 거 나는 참아낼 자신 없다.

하지만 결국 채임은 농촌에 보따리를 풀었다.

처음 농촌으로 들어올 때는 하늘이 노랗다 못해 하얀 빛이었다. 입만 뻥긋하면 여편네 잘 못 만나 쪽박 찼다는 소리가 나오는 시댁에 들어와 살 것을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가재도구까지 몽땅 경매에 들어가고 몸만 오롯이 빠져 나왔으니 비빌 언덕이라곤 시댁 밖에 없었다. 대학을 다니던 아들은 휴학계를 내고 군대에 가고, 작은 딸만 데리고 시댁이 있는 못 골로 들어왔다.

꼬울 조오타. 늠 부끄러버서 우찌 사노.

말끝마다 따라 붙는 시어머니의 가시 돋친 냉대를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채임은 귀머거리 행세를 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농사라곤 지어 본 적이 없으니 들일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서툴기만 했다. 평생 농사일 밖에 모르고 살아온 시어머니 눈엔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채임에겐 힘에 부치는 중노동이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따라 논밭에 나가 들일을 배웠다. 삼태기를 들고 거름을 날랐고, 경운기 조작법을 배워 경운기도 몰았다. 도시에 살면서 따 놓은 운전 면허증을 요긴 하게 쓸 일도 생겼다. 시어머님이 쌈짓돈을 풀어 중고 트럭 한 대를 구입해 주었다. 읍내까지 딸을 학교에 보내려면 차가 필수였다. 못 골은 시간차가 하루 두 번 밖에 오가지 않는 산촌이었다.

그런데 사건의 발단은 시어머니의 쌈짓돈을 풀어 중고 트럭을 사면서부터였다.

알고 보면 처음부터 쌀 속에 섞인 돌처럼 버석거리던 손위 동서와 등을 지게 된 것이 순전히 트럭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서 사이에 골을 만들게 된 계기가 트럭일 뿐이지 오래전부터 앙금으로 남아있던 응어리가 터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시어머님이 트럭을 사 주셨다는 소식을 듣자 손위 동서는 대 놓고 빈정거렸다.

동서! 그건 우리가 사 준 거나 마찬가지야. 어머님 용돈을 대 주는 게 우리 잖니. 고마운 줄이나 알아. 참 시집 잘 왔네. 동서는 참 재주도 좋아. 사람 구워삶는 데는 뭐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새파란 총각 꿰찼지.

형님! 터진 입이라고 우찌 그런 말을 합니꺼?

왜? 내가 없는 소리 했어?

참 잘났네요. 그리 잘난 사람은 저거 집에 밥 빌어먹던 머슴하고 눈이 맞는 답디꺼?

뭐라고? 너 말 다 했어?

다 안 했시모 우짤랍니꺼? 내가 없는 소리 지어냈습니꺼? 식도 올리기 전에 배 부른 기 오데 내 뿐입디거. 잘난 가시나 둘이 키움서 유세는. 내사 마 장골 겉은 아들이 있응께 속이 편하지요.

뭐라고, 아들 있다고 유세야? 그게 삼촌 씬가 아닌 가 어찌 알아.

그 말에 채임은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다.

형님 딸들은 아무도 아주버님 안 닮았데예. 씨 도독질은 못한다는데. 우리 아들은 판박이라 쿠니 형님이 그렇게 말해도 씨도 안 멕히지예. 딸들은 누굴 닮았을까.

그날 이후 채임과 손윗동서는 앙숙이 되었다. 어차피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야 할 시댁 그늘이었다. 농촌에 들어와 살면서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손윗동서에 대한 응어리가 컸던 탓도 있었다. 시댁 잔치자리에 끼면 어김없이 뒷말이 나왔다. 큰 동서는 늘 상전 대우였고 채임은 늘 하녀 취급이었다. 생각해 준다는 것이'잘 산깨내 참 보기 좋네.'라던가. '정호 애비가 적신 한 기라. 너거 시어미 은덕 이자삐모 안되니라.'일가붙이 촌 노인네들의 생각해 주는 척 던지는 예사로운 한 마디도 그녀에겐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럴수록 '내가 잘 하면 잊어주겠지. 내가 더 잘해야지.' 하루에도 수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큼 시댁 식구들에게 죄인이 되어 살았다. 하지만 시집 온지 스무 해가 되어도 잊어주기는커녕 그 사실은 살아가면서 자꾸만 관솔같이 질긴 옹이로 자라 자신을 괴롭혔다. 더구나 더욱 더 채임을 괴롭힌 것은 형님이라는 여자였다. 한 다리 건너 천리라고 남이야 무슨 상관이랴 만 그녀의 비위를 늘 긁어대는 것은 큰 동서였다. 아이들이 다 자라 어른이 되어가는 데도 그녀의 과거를 덮어주기는 커녕 심심찮게 들추어내 복장거리를 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알거지가 되어 시댁으로 들어오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팔자 고쳐 봐야 그 복이 까짓것이지. 다 업 갚음 하는 거지.' 하면서 말끝마다 비웃음을 달았다.

얼마 전에도 대출 문제로 또 형님과 맞닥뜨렸다.

채임은 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살려니 장래가 불안했다. 아이들 뒷바라지도 문제지만 농사만 지어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다른 업을 해 보고 싶었다. 도시에 살면서 온갖 허드렛일을 한 경험도 있고, 음식 만드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조리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채임은 무릎을 탁 쳤다.

조리사 자격증을 딸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한 때 반짝 건축 붐이 일 때였고, 남편이 갖다 주는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아이들만 돌보던 그 시절에 이웃에 있던 여성회관에서 사람들을 모아 요리 무료 강좌를 했다. 음식 만드는 것에 취미가 있던 채임은 둘째를 업고 소일삼아 강좌를 들었다. 그기에 나왔던 요리 학원 원장이 곧 조리사 자격시험이 있다기에 심심풀이 삼아 응시했던 것이 합격을 했었다. 그렇게 딴 조리사 자격증은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채 장롱 서랍에 얌전히 모셔져 있었다. 무엇이던지 삼박자가 척척 맞아야 한다지 않던가. 채임은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고 직감했다. 슬그머니 남편의 의향을 물었다.

조그마한 음식점을 해 보고 싶은 데예. 당신 생각은 우떻십니꺼?

오데다?

아버님이 우리 몫으로 떼 준 논에예. 농지 전용하모 된답니더.

당신의 음식 솜씨야 내가 안다마는 돈도 돈이지만 이 산골짝에서 음식 장사가 되것나?

산골짝이니까 시작해 볼만 한기라예. 토속 음식점 같은 걸 열어 인근 도시 사람들을 끌어 들이면 될 것 같기도 한데. 요새는 마이카 시대 아입니꺼. 사람들이 경치 좋고 으슥한 곳을 찾는 추세라예. 전원생활의 낭만을 찾아 떠났다 오는 기 유행이라예. 요새는 한적한 시골구석에 세워진 러브호텔이 성업 중이라 안 캅니꺼. 예약 안 하모 낮에는 방이 없답니더.

허긴 그런 말들이 나돌기는 하지. 그 덕에 오쟁이 진 남정네들이 흔해 빠진 농촌이 되었지만.

설마 당신 마누라 바람 날까봐 그러는 거 아니지예?

꿈도 야무지요. 누가 절구통을 거들떠보기나 한다고.

채임은 우스개소리를 하는 남편의 팔을 꼬집었다. 그녀는 농촌에 들어와 살면서 행복했다. 결혼한 지 스무 해 만에 맞이한 신혼이었다. 잔정 많고 살가운 남편이란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나날이다. 빈손으로 귀농을 했으니 도시 생활에 비해 모자람 투성이지만 한 삼년 썩고 나니 그런대로 농촌 살이 정이 붙었다. 사사건건 시비 거리만 찾던 시어머니와 화해를 한 것도 같이 살면서 부대끼며 얻은 덕이었다.

채임은 남편과 머리 맞대며 장사할 밑천을 따져 보았다. 수중에 가진 것이 없으니 아무래도 농협에 빚을 내야 할 것 같았다. 채임은 남편 모르게 한 푼 두 푼 모아 두었던 통장의 액수를 헤아려 보았다. 더하기 빼기를 해도 큰 것 한두 장은 모자랄 것 같았다.

채임은 아무리 생각해도 농협에 대출을 받는 방법 밖에 없는데 빚내서 장사 시작했다가 이자도 못 갚고 나자빠지면 그 뒷감당을 어찌 하나 싶은 것이 지레 겁부터 났다. 채임은 그런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소심해졌나 싶은 게 어이없기도 했다. 큰 애 데리고 혼자 살적엔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다. 무엇이던지 해서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게 당면 과제였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우선 아이를 먹이고 자신도 먹어야 했다. 자기가 손수 벌지 않으면 굶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던 날들도 있었다. 남편에게 의지해서 사는 여자들을 부러워할 새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에겐 남편 복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과 합쳐 살게 되었고, 둘째까지 데리고 시댁에 들어오고 보니 오히려 속은 편했다. 첫째는 양식 걱정 하지 않아도 좋았다. 시어머님 혼자 꾸러 가던 농사를 맡으면서 그다지 돈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었다. 농촌이란 것이 희한하게도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아지고, 부자면 부자대로 살아지는 곳이었다. 돈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도시하고는 생판 달랐다. 젊은 농군이라고 이 집 저 집에서 부르니 알게 모르게 수중에 돈이 들어왔다. 남편이 고생해서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씀씀이도 도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넘어갔다. 살림 솜씨 여문 시어머니 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싶었다. 농사는 아무래도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자신의 옷을 만들어 입고 싶었다. 도전하는 삶이 아름답다지 않던가. 용기를 냈다. 아니, 없는 용기라도 끌어내어 일을 저지르고 싶었다. 더구나 손위 동서의 대 놓고 빈정거리는 소리에 기가 질렸다.

일단 남편의 동의를 얻자 채임은 머리를 싸매며 사업 계획을 착착 세웠다. 음식점을 할 건물을 짓는 것도 문제지만 어떤 음식을 할 것인지도 사전에 계획이 잡혀야 하고, 실습도 해 봐야 했다. 토속적이면서도 감칠맛 나는 입맛으로 도시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해야 했다. 채임은 시간만 나면 남편과 음식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맛을 봤다.

일단 음식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자 시어머니의 동의를 구했다. 수중에 가진 돈이 적으니 농협 대출을 끌어다 넣어야 하고, 농협 대출을 받으려니 땅이나 집을 담보로 잡혀야 했다.

어머이 음식점을 했으면 싶은데예.

채임은 어렵게 운을 뗐다.

니가 돈 안 벌어도 묵고 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될낀데 만다꼬 사서 고생길에 들라카노. 음식점이라니. 이 촌구석에서 장사가 되것나.

처음엔 반대하시던 시어머님도 나중엔 생각해 보자더니 돈 문제를 이야기하자 아무래도 큰아들과 의논을 해 봐야겠다고 하셨다. 농촌에서 장남의 위치는 확고했다. 더구나 시아버님이 안 계시니 뭐든지 장남과 의논을 하고, 장남의 허락이 떨어져야했다. 아무리 둘째 아들이 부모를 모셔도 부모 마음은 항상 큰 아들에게 가 있는 것 같았다.

소남댁이 큰아들에게 전화를 한 이튿날 아침이었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손위 동서가 전화를 했다.

참 동서는 욕심도 많네. 시어머님 모시고 있다고 뭐든지 맘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아? 그 큰돈을 대출 받아서 어떻게 갚겠다는 거야? 어머니 집까지 말아먹을 작정이지?

큰동서는 새끼줄처럼 꼬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며 전화를 했다. 참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본새는 여전했다. 맘 같아서는 그냥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 붓고 싶었지만 피익 웃으며 받아쳤다.

그럼 잘난 형님이 좀 빌리 줄라요? 재수 삼수 하는 딸래미들 학비 좀 깎아서 주모 더 좋고예. 이자는 안 이자삐고 갚을낑께 이 참에 형님 노릇 되고로 해 보이소. 그라마 내가 깎듯이 형님 대우 해 줄 요랑잉께. 혹 장사가 잘 돼서 형님 옆에 빌딩을 살지 우찌 압니꺼? 길고 짧은 거는 대 봐야 아니께 인심 쓰는 김에 팎팎 써 보지 그래예?

뭐야? 이게!

하이고 무섭어라. 지 고마 들어갑니데이

손위 동서의 가장 아픈 곳을 꼭 찔러놓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벨은 다시 울리기 시작했지만 채임은 받지 않았다. 화가 나서 펄펄 뛰는 손위 동서의 모습을 생각하니 고소하기만 했다. 채임은 그렇게 손위 동서의 속에 불을 질러놓고 휘파람을 불면서 오일장 보려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섰다.

시간차를 타고 읍내까지 나가서 시장을 봐 오니 점심나절이 지나 있었다. 집 앞에 오니 눈에 익은 차가 대문 옆에 서 있었다. 채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안에 들어섰다. 마루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의 눈이 일제히 채임을 향해 쏟아졌다.

아주버님 오셨습니꺼?

채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시숙은 채임의 인사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벌떡 일어서 축담을 내려서며 고함을 질렀다.

니 머하는 여자고? 니가 형수한테 머라캤는데 형님이 달려 오고로 만드노? 니가 조카들 흉을 봤담서?

야?

그 말이 참말이가? 딸아만 키움서 큰 소리 친다고 했담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예?

채임은 멀뚱하게 마당에 서서 시어머니와 남편과 시숙을 쳐다봤다. 그 여자가 또 무슨 소리로 속살거렸기에 시숙이 달려오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맘 같아서는 보소, 우찌 그리 귀가 야리요? 여편네 말만 믿고 쫓아오는 당신이 불알 달린 남정네요? 하면서 몰아 부치고 싶었지만 손 아프기로 치면 엄청 아픈 시숙 아닌가. 시아버지 없는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라지 않는가. 별것도 아닌 일로 그 먼 길을 오게 만든 손위 동서 행위가 괘심하지만 어쨌든 남편에겐 소중한 형님 아닌가. 차라도 끓여내야겠다 싶어 마악 축담을 올라서려는 중이었다.

근본이 더러운께 눈도 깜짝 안하고 거짓말 하는 거 보소.

나지막하지만 뼈가 있는 말 한 마디에 채임의 전신이 옥죄었다.

아주버님, 지 지 금 머 라 캤습니꺼?

눈을 똑 바로 뜨고 시숙을 쏘아봤다.

동생 니도 그라는 거 아니다. 아들 있다꼬 유세하지 마라. 그 아들이 니 안가 아닌가 우찌 아노?

형님!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없는 말 했나?

형제간에 다툼이 벌어져서 큰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살벌하게 변했다. 시숙은 아비 같은 형한테 눈 똑 바로 뜨고 달려들면서 여편네 편든다고 길길이 날뛰고, 남편은 아무리 형이지만 그 잘난 여편네 말만 듣고 쪼르르 달려와 잘 사는 집에 평지풍파 일으킨다고 삿대질을 해 댔다. 나중엔 케케묵은 구전재전 이야기까지 쏟아져 나왔다. '니 놈 공부 시킨다고 올매나 쎄가 빠졌는 데'부터 시작해서 '그래, 뉘 씬 지도 모를 애새끼 달고 온 여자한테 빠져서 형도 몰라보냐'고 시숙은 이 놈, 저 놈 하면서 남편의 멕살을 털어 쥐고 쥑이니 살리니 하면서 막말을 해 댔다. 고함 소리에 놀란 동네 개들도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놈들아, 늙은 에미 죽는 꼴 보려거든 어디 한 분 싸와봐라. 이 불효막심한 놈들!

소남댁이 악을 쓰며 마루를 탁탁 때렸다. 그제야 서로 잡았던 멕살을 풀면서 수굿해졌다.

채임은 기운 없이 축담에 퍼질러 앉았다.

고추잠자리 떼 나직하게 마당을 배회하고 있었다. '벌써 처서가 지났네. 세월 참 빨리도 간다. 우리 정호가 이번 주일에는 올란가.'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중얼거렸다. 아들은 군대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해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채임은 효심 깊은 아들이 무척 보고 싶다. 아들이 제 아비를 쏙 빼 닮지 않았다면 시숙의 험담이 고스란히 뼈에 사무치겠지만 누가 봐도 이 집 아들이구나. 알 정도로 남편을 쏙 빼 닮았다. 시숙이 한 말이 억울한 것은 아니지만 채임은 자신의 인생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천대 다 받으며 살아온 이십 년이 아닌가. 이젠 묻어 줄 때도 됐건만 묻어주기는커녕 기회만 있으면 들쑤셔서 그녀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채임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소나기 한 차례 쏟아 붓고 난 후 소강상태에 든 날씨처럼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마룻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채임은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신세타령을 했다.

아주버님, 해도 해도 너무 합니더. 이 집 사람 된 지 이십 년이라예. 인자 감싸는 못 줄망정, 잊은 척이라도 해 주모 서로가 좋을낀데. 참으로 질깁니더. 늠보다 더 합니더. 우찌 그리 사람 아푼 곳 가려가며 찌릅니꺼? 아주버님께 지가 무슨 그리 못할 짓을 했십니꺼? 형님 말만 듣고, 사람 너무 그리 괄시하지 마이소. 안 그래도 충분히 죄 값 받으며 살았십니더. 총각 사랑한 죄가 이리 큽니꺼? 내 저 사람 만내 맘고생, 몸 고생 참 많이 했십니더. 그걸 아주버님이 우찌 알것십니꺼. 다 내가 모지래서 그런데. 아주버님 말마따나 죄 많은 년이지예.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서방 몰래 총각하고 정분이 나서 배가 불렀으니 더러운 년이 맞지예. 그러니 인자 서로 보지 마입시더. 잘 가이소. 앞으로 내 집에 발붙이지 마이소. 어머이도 인자 집에 가이소.

결국 그 날 시숙은 '니 잘난 애편네 땜에 형제간에 의를 끊어도 좋다 이 말이제?'하면서 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후 손위 동서와 채임은 명절에도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채임은 마늘을 들기 좋게 나누어 망에 담으며 시어머니를 봤다.

머리가 하얀 노인네가 마당에 떨어진 마늘쪽을 일삼아 줍고 있었다.

어무이 배 고푸지예? 점심 채릴까예?

그래라. 근데 애비는 와 안 오는기고? 배 고풀낀데. 참 이분 추석에도 동서찌리 쌈박질 할끼가? 집안 불란은 여자들이 들어서 일어나는 기다. 서로 의 좋고로 지내모 넘 보기도 좋고, 너거도 안 외롭을 낀데.

형님이 형님답게 처신을 몬 한께네 그렇지예.

사돈 넘 말 하고 앉았구나. 니가 잘 해 봐라. 니가 먼저 본보기로 형님 잘 못 했십니더 그래 보람.

지는 머 창세기도 뭣도 없는 년입니꺼?

와! 내 말이 꼽나? 그래도 나는 니가 더 편한께 하는 소리다. 똑 같은께 싸우는기제. 한 쪽에서 죽은디끼 져 주모 아무 탈이 없을낀데. 에쿠! 내가 너무 오래 사는 갑다. 못 볼 꼴 보고 사니.

참 어머이도.

채임은 시어머니와 겸상을 해서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후 방에 들어와 번듯이 누웠다. 명치끝이 짜릿하게 아파왔다. 채임은 끙 앓으며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입은 여자 아이가 한과를 들고 치마를 나풀거리며 안채를 지났다. 할아버지가 긴 장죽을 빨면서 사랑채 지게문을 열어놓고 여자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온! 우리 예뿐 새끼.

아이는 할아버지 앞으로 쪼르르 달려 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긴 수염을 아이의 볼에 부비며 물었다.

니 옴마 보고 싶제?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부지도 보고 싶제?

아이는 더 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 불쌍한 거. 에미 애비가 보고 싶을 텐데. 우짜다가 이 지경이 됐던고? 못난 놈.

아이는 알고 있었다. 어미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고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비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고 떼쓰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배가 불룩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돌아와 축담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와 행랑 아범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실신한 어머니를 보듬어다 방에 뉘었고, 읍내에 산다는 의사가 커다란 왕진 가방을 들고 들락거렸다. 그 다음 날부터 집안에는 한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할머니는 자꾸만 피가 벌겋게 묻은 옷을 남의 눈을 피해 가며 개울에 나가 빨았다. 어미 보고 싶다고 떼쓰는 아이를 행랑어멈은 등에 업고 마실을 갔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차기도 하면서 수군거렸다.

아요? 돌이네 우찌 된기고? 이약 좀 해 봐라.

행랑어멈인 돌이 네는 아이를 멀찍이 내려 이웃 꼬맹이들과 놀게 하고는 동네 여자들과 수군거렸다.

우리 아씨가 정신이 오락가락 합니더. 우짜다가 옳은 정신이 들모 띄엄띄엄 한다는 소리가 '어머이 지는 인자 우짜꼬예?'그라다가 또 까무라치고. 뱃속에 아가 떨어져도 아직 모릅니더. 쉬쉬 하는 기라예.

그래, 부부가 떨어져 살모 탈이 나는 기라. 참한 새댁이 올매나 충격을 받았시모 아가 다 떨어졌것노? 죽으나 사나 늙은 시부모 봉양함서 촌구석에 쳐 박혀 있을 때부터 알아 본기라. 인물 훤한 남정네가 타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사는 지 우찌 알았것노.

아버지는 처음부터 어머니를 마뜩찮게 여겼다. 시골 유지로 살던 할아버지는 집안의 가문을 이끌어가야 할 장손인 아버지를 멀리 도시까지 유학을 시켰다.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에서 교편을 잡았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 이웃 마을의 참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물론 할아버지의 명령이었다. 혼인을 하고 아버지는 학교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시댁에 남아 시부모님을 모시며 독수공방을 했다. 아버지는 띄엄띄엄 집에 들렀다 갔다. 그 사이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내를 데리고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역시 며느리와 손녀를 멀리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가 세 살 되던 해 둘째를 가졌다. 온 집안 식구가 아들이길 학수고대할 즈음 아버지는 가뭄에 콩 나듯 집에 다녀갔다. 어머니는 남모르게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밤마다 아이를 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할아버지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아부님, 아무래도 부산에 한 분 댕기 와야겠습니더. 임이 애비가 많이 바뿐지 통 집엘 오지 않으니 걱정도 되고예. 곧 추워질낀데 가서 옷가지도 챙겨 디리고 왔시모 싶습니더.

그래라. 요새는 통 얼굴 보기가 심들구나. 인자 너거 살림도 내 놔야것다. 이참에 너거들 살 집도 알아보고 오니라. 둘째 몸이나 풀고 나모 내 보낼까 했더니 암만캐도 서두는 기 좋을 상 싶기도 하다.

할아버지도 뭔가 낌새를 챘던 것일까. 며느리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먼 길을 떠나보냈다. 시골 촌색시가 처음으로 도시 구경을 나섰다. 반찬거리며, 양념거리를 갖추갖추 담은 큰 보자기를 이고 물어물어 부산의 그 학교를 찾아간 날은 하필이면 일요일이었다. 어머니는 학교 일직 담당 교사를 만나 아버지의 집 주소를 받아서 산동네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본 것은 활동사진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속옷 바람으로 갓난쟁이를 안고 있는 행복한 남편의 모습과 그 옆에 예쁜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손에 끌려 친정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가고 싶어 울었지만

채임아, 옴마는 병 고치로 갔단다. 병 다 나스모 다시 올끼다. 그 때꺼정 할배랑, 할매랑 살자. 할배는 니가 없시모 몬산다 아이가.

여자 아이는 조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어머니 보고 싶으면 할머니의 빈 젖을 만지며 잠들었고, 아비가 보고 싶으면 할아버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일곱 살이 되도록 아이는 참 사랑스러운 작은 아씨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자신이 초등학교에 입학 할 시기만 되지 않았으면 영원한 일곱 살로 할머니 댁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 해 시월, 할아버지는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곧 이어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한 달 사이에 초상을 두 번 쳤다. 할머니, 할아버지 초상 날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아이는 대문간에 서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머니가 서야 할 자리에 다른 젊은 여자가 섰다.

여자 아이는 하얀 상복을 입고 자꾸만 어머니를 찾았다.

채임아! 인자 아부지랑 같이 도시에 나가 살자.

아부지 우리 옴마는?

너거 옴마는 병이 들어서 니도 몬 알아본다. 인자 아부지랑 같이 가서 살아야 한다. 학교도 가야제. 니 학교 가고 싶다고 했담서? 할아버지께서 편지에 그렇게 썼더라. 인자 아부지하고 살자. 어린 동생도 니가 잘 봐 줘야 한다. 알았제?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 댁을 떠났다.

아버지를 따라 간 곳은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갔다. 대문만 열면 푸른 논밭이 펼쳐지던 시골이 아니었다. 장난감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부산의 산동네였다. 아버지는 그 곳의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방 두 개짜리 전세방에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채임은 의붓어머니 밑에서 눈치 밥을 먹어야 했다. 새 어머니는 채임에게 냉정했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웃는 얼굴이다가도 아버지가 없으면 어린 채임의 손에 걸레를 들려 집안 청소를 시켰고, 갓난쟁이 동생을 등에 업혔다. 동생은 줄줄이 태어났고, 처음부터 그녀에게 애정이 없었던 아버지는 타인 같았다. 더구나 냉정하고 차가운 새 어머니는 그녀를 딸이라기보다 부엌데기로 부려먹었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다. 그녀는 눈치 밥을 먹으면서도 악착스럽게 학교를 다녔고,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산과 부기 1급 자격증을 땄지만 졸업과 동시에 채임을 기다리는 것은 결혼이었다.

새 어머니는 줄줄이 낳은 여섯 자녀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눈에 가시 같은 의붓딸을 내 보내고 싶어 했고, 그 즈음 이웃 아주머니가 중매를 섰다. 신랑 될 사람은 서른 살의 노총각이라 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보니 혼기를 놓쳤다고 했다. 김해평야의 땅 부잣집 아들이라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배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결혼하고 농촌에 들어가 살기 싫다면 땅 팔아서 도시로 나올 의사도 있다고 했다. 남자 구슬리는 것은 여자 하기 나름 아니냐고 중매쟁이는 은근히 새 어머니를 꼬드겼다.

어머니 제가 아무 회사나 경리 자리라도 알아보고 취직해서 동생들 뒷바라지 하겠습니다. 제발 결혼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해 주셔요.

니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니? 이참에 결혼 하는 것도 너를 위해서 잘된 일이다. 니 장래도 장래지만 동생들 생각해서 잘 생각해봐라.

아버지도 그런 좋은 혼처자리 구하기 힘들다며 결혼을 종용했다.

채임은 결혼식 날 도망갈 궁리까지 했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할머니께 양갓집 여자는 순종이 미덕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어린 기억 탓이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할머니, 할아버지께 불효할 자신이 없었다.

채임은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들어갔다. 김해에서 떵떵거리며 산다던 시댁은 김해 읍을 벗어나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산골로 들어갔다. 오십 호가 산다는 면 소재에서도 한 마장은 더 걸어가야 하는 두메 마을 까치 골이었다. 면 소재지까지 하루에 차가 한 번만 다니는 그 마을에서도 가장 허름하고 다 쓰러져가는 가난한 오두막에 도착하고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색시 구경 온 마을 아낙네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동냥 귀 하고 보니 남편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문맹이었다. 겨우 제 이름 석자를 쓸 수 있을 뿐이었다. 나이도 열 살이나 속였다는 것을 알았다. 스무 살의 새댁은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친정아버지께 연락할 길도 없었다. 주위엔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시댁 식구들은 그녀를 마을 입구에도 못 나가게 했다. 친정에 편지를 썼다. 하지만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왔다. 새어머니는 그 사이 딴 곳으로 이사를 가 버린 것이었다.

채임은 남편과 시댁 가족들의 감시 속에서 3년을 살았다. 어찌된 셈인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생겼다면 속절없이 묶여 살아야 할 형편이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자 은근히 안심이 되었다. 한편으론 조금씩 변해가는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녀를 집 밖에도 못 나가게 단속을 하는 남편이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자식 소식이 없자 애도 못 낳는 병신이라며 술이라고 한 잔 걸친 날은 손찌검까지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한 술 더 떠서 자식 못 낳는 여자는 칠거지악에 속한다면서 쫓아내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은근히 아들의 역성을 들었다.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남편의 정마저 뜸해지자 채임은 더 이상 그 곳에 살고 싶지 않았다.

그 즈음 동네 아낙네들이 공장으로 돈벌이를 나가기 시작했다. 읍내 가까운 곳에 큰 전자제품 공장이 생기면서 농촌의 여성 인력을 끌어들이고 있었던 탓이다. 채임은 남편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집안에만 있으면 뭐하느냐, 나도 배운 게 있으니 그 회사에 나가 돈 벌면 좋지 않느냐, 요즘 경리 사원을 뽑는다는데 시험이라도 쳐 보고 싶다.'며 남편의 속에 바람을 넣었다. 그렇잖아도 농사일이라곤 할 줄도 몰라 농촌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여자 취급을 당하던 아내 아니던가. 돈 벌어다 주겠다는데 싫어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채임은 읍내에 있는 전자제품 회사에 경리 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물론 자신이 유부녀란 사실도 속였다. 인사기록 카드엔 스물세 살의 처녀였다.

채임은 비로소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잃어버린 처녀 시절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회식이다 뭐다 해서 또래의 처녀 총각들과 어울려 나이트클럽도 다니고, 술집에도 들락거리며 세상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대신 봉급 봉투는 착실하게 남편에게 갖다 바쳤다. 자신에게 자유를 준 사람에게 그 정도는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 해 겨울 지금의 남편을 만난 건 나이트 클럽에서였다. 그는 대학 1학년 철없는 총각이었다. 같은 경리과 여자 친구 미선의 주선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미팅을 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채임은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그가 첫눈에 좋았다. 사랑이라곤 해 볼 틈도 없었던 그녀에게 그는 첫 정이기도 했다. 같이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면서도 채임은 가슴 한 쪽이 늘 아팠다. 처녀 시절의 낭만도 없이 늙은 남자의 아내가 되어 살았던 3년의 세월이 까마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그가 들어앉았다.

봄이 왔다.

그녀는 입덧을 했다.

나 임신했어.

그에게 말했다.

뭐! 난 학생이야. 낼 모래 군에 가야 한다구. 남은 학기도 마쳐야 하고.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께.

그는 떠났다.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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