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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과 매듭

<단편소설. 끝>

by 박래여

서툰 사랑은 불장난으로 끝났지만 채임의 뱃속에는 사랑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채임은 살아갈 의욕을 느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해준 남자를 그녀는 미워할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 아니, 꼭 끌어안고 살아갈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다.

밥상머리에서 구토를 했다.

니, 온제부터 그랬노? 속이 미식미식하제?

채임은 눈치 빠른 시어머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임신한 사실을 고백했다.

아이쿠 조상님, 부처님 고맙십니더. 아가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

우리 색시 참말로 이뿐 색시.

채임은 더 이상 회사에 다닐 수도 없었다. 임신한 여자가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처녀라고 속이고 시작한 직장 생활이 순탄할 리 없고, 배가 불러오자 어쩔 수 없이 집안에 틀어박혔다. 아이를 낳아서 집을 나가자. 나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우자. 그도 날 사랑했으니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기다리자. 아니 기다릴 거다. 미선의 남자 친구를 통해 그가 배치된 군부대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에게 편지를 썼다. 답장이 없었다. 그래도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속에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넣었다. 그래도 답장은 없었다. 그녀의 몸은 꼬챙이같이 말라가도 배는 나날이 불러왔다. 어쨌든 아이는 태어날 것이다. 그 동안은 남편 곁을 떠나려고 방법을 강구했지만 혼자의 힘으로 남산만한 배를 하고 세상 밖으로 나설 자신이 없었다.

채임은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그를 쏙 빼 닳은 아이였다. 아이를 안았다. 너무도 사랑스런 존재였다. 채임은 아이의 볼에 푸석한 얼굴을 비비며 펑펑 울었다. 왜 우는 지 이유를 모르는 남편은 그냥 싱글벙글 웃으면서 주절거렸다.

인자 우리 아들 호적에 올리야제. 임자, 우떤 이름이 좋것노? 작명가를 찾아가 보까? 우리 집안 돌림자가 호짠게네 정호, 우떻노? 이 애비가 이름 지었다. 이놈아. 니 이름이 정호다 정호.

채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좀 있다가 호적신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몸조리 좀 끝내고.

아이의 삼칠일이 지나자 채임은 결단을 내렸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무작정 아이를 들쳐 업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시간차도 오지 않는 까치 골을 벗어나기 전에 남편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이혼 해 주이소.

니 지금 무슨 소리고?

이 아이 당신 아이 아닙니더. 아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라예. 그러니 우리 모자를 내 보내 주이소.

남편은 웃었다.

니가 정신이 빼앵 돌았나? 자다가 봉창 두딜기는 소리나 하고 자빠졌으니.

진짭니다. 아이가 당신을 전혀 안 닮았잖아예. 그러니 우리 모자를 보내 주이소.

애걸복걸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구타와 욕이었다.

결국 남편 입에서

이 화냥년, 동네 부끄럽은께 나갈라모 니 혼자 나가거라. 우리 집 5대 독자는 몬 준다.

채임은 남편으로부터 쫓겨났다. 채임은 갈 곳이 없었다. 미선의 자취방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이가 눈에 밟혀 견딜 수가 없었다. 미친 여자처럼 거리를 쏘다녀도 보고, 억병으로 술에 취해도 봤지만 눈에 삼삼하게 밟히는 아이의 배내 짓이며,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따라다녔다.

채임은 시댁을 찾아갔다. 퉁퉁 불어서 줄줄 흐르는 젖통을 내밀며 아이에게 젖이라도 먹이게 해 달라고 애걸했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런 채임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어다 삽짝 밖으로 팽개쳤다.

내 아이, 내 아이.

채임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목구멍 밖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미선아, 나 어쩌면 좋지? 나 죄 받았나봐.

괜찮아. 아이는 뒤에 찾고, 일단은 몸 추스르고, 네 앞길부터 개척해. 그래야 담에 애 아빠를 찾지. 이 상태로 아이를 데리고 온다고 해도 키울 수가 없잖아. 직장이 있어? 돈이 있어.

그랬다. 채임은 이를 악물었다. 몸을 추스른 채임은 미선의 도움으로 화장품 대리점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호리 낭창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쌍꺼풀 진 눈이 이국적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예뻤던 채임은 화장품 대리점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아줌마들을 상대로 화장품 장사를 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채임이 전세 방 한 칸 마련할 정도가 되었을 때는 이미 아이가 세 살이 되어 있었다. 채임은 김해를 떠나 부산 변두리에 방을 마련했다. 아이를 데리고 올 만반의 준비를 끝내곤 이혼 서류를 꾸며 남편을 찾아갔다.

점심나절이었다. 채임은 살그머니 삽짝 너머를 봤다. 마루에는 어린 아이와 두 사람이 점심상을 가운데 두고 밥을 먹고 있었다. 정호야, 채임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입가에 밥풀을 덕지덕지 묻힌 시커멓게 탄 어린애가 바로 아들이었다.

정호야!

채임은 크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삽짝을 들어섰다.

이기 누고?

갓난쟁이를 안고 마루에 걸터앉아 숟가락질을 하다말고 벌떡 일어서는 사람은 바로 딸 한 명 데리고 혼자 살던 이웃집 과수댁이었다. 평소에 남편이 누님 누님하면서 따르던 여자였다. 친 누나보다 더 잘해준다고 입에 침이 마르던 여자여서 은근히 속이 상하기도 했던 그 여자가 남편과 겸상을 하고 앉아있었다. 갓난쟁이는 또 뭐란 말인가?

니가 와 온기고?

남편이 말했다.

내 아이 데리러 왔습니더.

정호는 이미 내 호적에 올랐다. 내 아들이란 말이다. 미친년이 오데 와서 행패고.

정호 아부지 참으이소. 정호 옴마, 일로 올라와.

채임은 축담에 올라섰다. 좁다란 마루에 놓인 상 너머에서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멀뚱멀뚱하게 채임을 쳐다봤다.

정호야 이리 온. 옴마다.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남편의 등 뒤에 가 붙었다.

당신도 큰 소리 내지 마이소. 넘 부끄럽은께 좋은 말로 해요. 정호 옴마, 놀랬제? 우리 살림 합친 거 한참 됐어. 지난 가실에 어머이 돌아가시고 바로 합쳤어. 척 보모 알낑께. 그 이약은 차차로 하고 일단 방에 들어가자.

알고 보니 그들은 오래 전부터 내연관계였다.

채임은 오히려 잘 됐다고 느꼈다. 갓난쟁이도 아들이었고, 과부는 이미 자신의 아이가 생긴 후 전처 아들인 정호를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채임은 전남편에게 이미 이렇게 됐으니 이혼을 해 달라고 했다. 과수댁 역시 제 욕심을 챙기기 위해 이혼을 해 주라고 종용했다. 모든 것은 생각 외로 쉽게 풀렸다. 남편은 이혼장에 도장을 찍었고, 아들의 호적문제는 전적으로 채임에게 일임을 한다는 각서를 썼다. 아이의 친 아버지 호적에 올리게 되면 자신의 호적에서 빼 주겠다는 약조를 했다.

채임은 아이를 데리고 까치 골을 떠났다.

그리고 정호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를 다시 만났던 것이다.


야야, 자나?

시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채임은 '아니 예' 하면서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니는 우짤래? 너거 집에 올라갈래? 여게 있을래? 애비가 너거 집으로 바로 갔는 갑다. 나는 마실이나 댕기 올란다.

어무이, 저 대구 형님 댁에 좀 댕겨 오까 예?

와!

형님하고 이약이나 해 보까 싶어서예. 어무이 말마따나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 쿠는데.

그래라 아랫사람이 먼저 청하는 기 예의다.

채임의 손을 덥석 잡는 소남댁의 눈에 눈물이 크렁크렁 해졌다.

채임은 하늘을 봤다. 가을 하늘이 깊고도 푸르렀다.

그래,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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