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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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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21. 2024

부부가 친구처럼

부부가 친구처럼   

  

  간밤, 폭설이 오는 지역도 있다지만 우리 지역은 비가 왔다. 비는 아침에 갰다. 텃밭에 심은 시금치 씨가 파랗게 돋아났다. 한겨울에도 푸른 싹이 돋아나는 것이 신기해서 수시로 텃밭을 둘러본다. 날씨가 따뜻하면 금세 자라지 않을까. 그는 비닐하우스에서 쓰는 보온 천을 덮어주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묻는다. 시금치는 추위에 강해. 겨울에 맛이 드는 거잖아. 그냥 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두는 것이 씨앗에 대한 예의 같기도 했다. 


 그는 점심 먹으러 나가잔다. 그냥 바람 쐬러 가고 싶은 눈치다. 따라나섰다. 나는 내심 디스크로 근 20일을 병원생활을 하고 나온 작은언니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디스크가 터져서 척추신경을 눌렀고 다리 저림 현상과 마비가 왔었다. 시술을 했단다. 허리 복대 차고 혼자 있을 언니다. 점심이라고 사 주고 왔으면 싶어 전화를 했지만 불통이다. 문자를 남겨도 답이 없다. 결국 농부에게 행선지를 맡겼다. 근교 절에 다녀오잔다. 


 가끔 들리는 곳이다. 월아산 아래 아늑한 산사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고 그 옆에 음식점이 있다. 다이어트를 원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식단이다. 예전에는 국산 팥으로 끓인 팥 칼국수와 팥죽이 맛있었다. 두 어른과 아이들과 드라이브 삼아 심심찮게 다녔던 곳이다. 지금은 비빔밥을 한다. 채식 위주의 식단은 맛깔스럽다. 비빔밥 한 그릇 깨끗하게 비우고 절에 들었다. 골짝이 황폐하고 어수선하다. 도시 공원화 작업이 한창이다. 벌목을 한 숲은 황량하다. 절을 폭 감싸고 있던 굵은 소나무, 상수리나무, 오동나무 등을 베어내는 중이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걸을 수 있겠나? 그가 묻는다. 당근이지. 걸어야 산다며? 그는 지팡이부터 챙겨준다. 지팡이를 짚고 일주문을 들어섰다. 이끼와 돌꽃이 핀 돌담은 여전하다. 내 두 아름은 됨직한 느티나무도 볼썽사납게 잘라져 둥치만 덩그렇다. 절간이 훤하게 드러났지만 왠지 황량해 보인다. 숲이 감싸고 있을 때 산사다운 운치가 있다는 것을 관공서 담당자는 모르는 것일까. 아님 주지스님이 원한 벌목일까. 절 살림도 살림이다. 돈벌이 수단으로 전략한 절 같아서 씁쓸하다. 박물관도 폐관됐다. 거기 지하에 걸린 거대한 탱화가 아름다웠는데.


 나와 보조를 맞추며 걷는 그는 날씨가 쌀쌀하다 하고, 나는 등에 땀이 난다 하고. 일주문을 지나 법당에 들어 부처님을 뵙고 요사 채를 빙 돌아 나왔다. 작은 못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한 바퀴를 걸어 너른 주차장에 닿았다. ‘장하다.’ 그가 말했다. 나도 내가 대견하다. 절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까지 왔으니까. 법당에서 잠깐 쉬긴 했지만 제법 먼 거리를 오래 걸었다. 무릎이 시큰거린다. 지팡이가 없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까. 그는 몇 번이나 물었다. ‘차를 가지고 올라올까?’ 나는 걸을 수 있다고, 걷겠다고 답했다. 걸었다.  


 돌아오는 길은 또 다른 숲길이다. 벚꽃이 피면 아름다운 길, 한적한 벚나무 길을 달리니 벚꽃이 그립다. 꽃눈이 내리는 그 숲길이 그립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온다. 텃밭의 시금치 씨앗이 파릇하게 자라는 것을 보니 봄은 이미 움튼다. 새 봄에는 웃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두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편안하고 행복한 사람은 소설가가 될 수 없다고 하던가. 절실하지 않으면 얻어지는 게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나는 왜 소설을 쓸까. 내게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자꾸만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꽉 잡아 단속하는 것도 마음에 빈 곳이 많아서일지 모른다. 남은 나날을 채워갈 일이 아득할 때가 있다.


 수영장으로 직행했다. 무거운 다리가 풀린다. 수영 안 하고 걷기만 해야지. 했던 마음은 수영장에 들어서면 싹 사라진다. 키 판을 잡고 발차기를 하던지 자유형, 배영, 평영을 번갈아가며 트랙을 돌던지,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긴다. 물에서 만나는 사람도 정이 든다. 그 시간대에 오던 사람이 안 보이면 궁금하다. 오늘은 강습이 없는 날인데도 사람이 많다. 도시 수영장에 비하랴. 맑고 깨끗한 물이다. 한 시간을 물놀이하다 나오니 무겁던 다리가 가벼워졌다. 운동의 효과를 바로 본 것 같다. 


 집에 왔다. ‘우리, 잘 다녀왔어.’ 텃밭의 파란 시금치 싹에게 인사부터 한다. 그는 또 보온 타령을 한다. 어린싹이 얼어 죽을까 봐 조바심친다. 아니야, 제 철이니까 더 강인하게 자라 줄 거야. 차게 자랄 것은 찬대로 놔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씨앗의 성질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는 것을 바라봐주기만 해도 사랑이다. 오래 산 부부도 서로 가만히 바라봐주는 것이 사랑이다. 적당히 무심한 것도 사랑이다. 남은 길, 그 길이 길든 짧든 함께 살아내는 일도 사랑이다. 나는 또 글이 쓰고 싶다. 그는 장작을 패러 나가고 나는 글밭에서 유영한다. 하루 잘 살았다.

                            202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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