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
<단편소설>
듬실에 깃든 혼백
1.
까막눈일 때도 인간은 의사소통을 하고 살았다. 몸짓, 손짓, 표정 등 몸으로 하는 말은 지금도 통용된다. 외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몸으로 하는 언어 덕이다. 인간에게 몸짓언어는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순간 저절로 습득하는 언어 아닐까.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나와 그 아이 사이에는 몸짓언어가 있었다. 아이는 웃통을 벗고 있었다.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뒤통수에서 땋은 머리채가 허리께에서 흔들거렸다. 짚신에 삼베쇠코잠방이를 입은 아이는 연분홍과 흰빛의 고마리꽃이 지천으로 핀 개골창에 엎드려서 낫질을 한다. 아이의 낫질이 지나갈 때마다 왼손에는 고마리풀꽃이 한 주먹씩 안겼다. 아이는 고마리 풀꽃을 한쪽 옆에 놓고 또 낫질을 한다. 나는 아이가 있는 개골창 위의 좁다란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다리 아래 있는 아이의 능숙한 낫질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봤다.
어느 순간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누런 코가 인중에 흘러나왔다.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더니 왼쪽 손등으로 코를 훔쳤다.
뭐 보는 겨?
아이의 눈짓이 묻고 있었다.
아무것도
나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는 아래위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낫질을 한다. 나는 아예 다리 난간에 퍼질러 앉아 두 다리를 다리 아래로 늘어뜨린 채 가만히 있었다. 지천에 널렸던 고마리꽃이 아이의 손끝에서 쓱싹쓱싹 사라져 간다. 아이는 베 놓은 고마리풀을 한데 모아 낫으로 착착 채더니 한 아름을 안고 개골창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개골창 둑은 제법 높다. 어디로 올라오나. 내 눈은 계속 아이를 쫓아간다. 아이는 익숙한 걸음새로 돌계단을 찾아 개울둑으로 올라온다. 고마리풀꽃 더미만 있고, 삼베쇠코잠방이만 흔들거린다. 아이는 둑 위에 세워져 있던 바지게에 안고 있던 고마리풀꽃 더미를 놓는다.
몇 살?
나는 턱짓으로 물으며 두 손을 쫙 편다.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란 뜻이다. 그럼
아홉 살?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지게를 바치고 있던 지겟대를 지팡이처럼 짚고는 바지게를 지고 일어난다. 나는 또 묻는다. 손짓으로 어디 사는지. 아이는 턱짓으로 개울가에 위치한 동네를 가리킨다. 아이는 신통방통하게 내 몸짓을 다 알아듣는다. 아이는 내 옆을 지나 다리를 건넌다. 그제야 나도 궁둥이를 털며 일어나 아이를 따라간다. 아이는 보이지 않고 바지게에 담긴 고마리풀꽃만 한들거린다. 가녀린 두 다리가 바지게 밑에서 성큼성큼 앞서 간다. 아이를 따라잡고 싶은데 이상하게 아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말을 붙여야겠다.
“꼬맹아, 저 동네 사니? 나도 저 동네 가려는데. 이극로 선생의 생가가 있다던데. 혹 아니? 같이 온 사람들이 먼저 가 버렸네. 지각생이거든. 근데 참 신기하다. 요새도 너처럼 머리를 땋아 기르는 아이가 있다니. 너 학교 다니니?
아이는 말없이 개울을 낀 동네로 들어간다. 자칫하다가는 아이를 놓치겠다.
“얘야, 너 이름은 뭐니?”
그제야 아이가 힐끗 돌아보더니
“계찬이”
아이는 골목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