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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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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Feb 25. 2024

평온한 하루가 깊다.

평온한 하루가 깊다.  


   

 남매가 떠났다. 각자 한 보따리씩 챙겼다. 어미가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 싸 주는 것들이다. 내가 더 늙어 밥도 못 챙기게 되면 애들이 와도 어미 노릇 못하게 될 것이다. 차려주는 밥상 앉아서 받을 수나 있을까. ‘에이그, 명절 같은 거 없으면 좋겠다.’ 생전 시어머님의 푸념을 기억한다. 자식들 오기 전에 설음식 준비하는 것도 옆에 있는 며느리 오라 가라 하며 부렸는데도 어머님은 힘들어하셨다. 늙은 어머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애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노인들 우스개가 진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막상 명절이 되어도 찾아올 자식이 없으면 그 또한 서운할 수밖에 없다. 


 아무개 아주머님은 ‘우리 애들은 이번 설에 아무도 오지 마라 했다. 저거 가족끼리 여행 가든지 하라고 했다. 막상 설이 되니 진짜 아무도 안 오더라. 참 서운하더라. 영감과 둘이 떡국이나 한 봉지 사서 끓여 먹었지만 손자손녀도 안 온다니 세뱃돈 나갈 일도 없는데 와 그리 허전할꼬.’했다. 아무개 아주머니는 손녀가 전화를 해서 ‘할머니 영상으로 세배드릴게요. 세뱃돈은 계좌로 보내 주세요.’ 하더란다. 세상 참 말세란다. 물건 값이 두세 배 뛰었으니 세뱃돈도 올려줘야 할 것 같아 고민되더란다. 돈이 종잇조각 같다.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폭등하는 이 현상을 인플레이션이라 하던가. 


 농부는 감산으로 출근했다. 단감나무 가지치기할 시기다. 올해는 단감농사가 어찌 될지. 조금만 짓는 농사지만 칠순이 된 농부가 노동하기엔 힘겹지 않을까. 노느니 염불 한다지만 노동은 노동이다. 단감농사까지 접어버리면 생활비가 빠듯할 것이다. 부부 합쳐 국민연금과 노령연금이 백여만 원인데 그 돈으로 가능한 생활을 해야지. 아이들에게 부담주기는 싫다. 매달 연금을 받으며 풍족하게 생활했던 시부모님을 생각한다. 안 되면 주택을 담보로 주택연금 받자는 농부다. 그러자고 했다. 사는 날까지 애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애들이 집에 다녀가면 차비라도 챙겨줄 정도만 되면 괜찮다. 촌로는 씀씀이가 줄 수밖에 없다. 밖에 나갈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리라.


 집이 텅 비어버렸다. 물끄러미 마당을 바라본다. 깨끗하게 이발을 한 차밭이 눈에 들어온다. 읽다만 소설책을 잡았다.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에릭시걸은 대중소설 가다. 그의 소설 『특별한 만남』역시 대중 소설이다. 현대사회에서도 흔한 이야기다. 주인공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혼외 아들의 존재가 흔들어 놓은 파문은 컸다. 존재도 몰랐던 아들, 짧은 외도에서 생긴 아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화목한 가정이 깨어질 위기에 처한 이야기, 사랑과 배신, 결말은 화해지만 주인공 부부의 남은 인생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대중소설이 좋다. 사랑 이야기가 좋다. 전설이나 신화 이야기도 좋다. 어떤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해 보는 과정을 즐긴다. 평범하거나 특별하거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감정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에 주목한다. 다혈질이거나 진중하거나 타고난 성품에 따라 달라지는 반응을 글로 표현하는 재미도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무식한 자, 종이 한 장 차이다. 일자무식자도 한 우물을 깊이 파면 삶의 지혜를 깨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주관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철저하게 객관화된 상태에서 소설 속 주인공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도서관에서 에릭시걸의 『러브스토리』에 푹 빠졌던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특별한 만남』을 빌러 왔었다. 그 소설을 읽으며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푹 빠지기보다 빙긋 웃으며 읽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마지막 문장까지 스토리 전개가 빤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부부사이 진흙탕 싸움이라도 해야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 부부는 지성인이라 속내를 감출 따름이다. 소설은 또 다른 삶이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나,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절실한 삶을 이야기로 푸는 것이 작가다. 현실에서 못다 이룬 삶의 희로애락을 소설에 담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정체성은 아닐까. 


 에릭시걸의 『특별한 만남』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잡은 책은 무라까미하루끼의 동화 같기도 한 삽화가 든 『이상한 도서관』이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작가의 상상이 돋보인다. 작가는 중국 소설 『산해경』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을까. 나는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을 좋아한다. 한 때 열심히 섭렵했었다. 『상실의 숲』은 20대에 읽었지 싶다. 몇 년 전에 읽은 『기사단장 이야기』는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댄스 댄스 댄스』, 『태엽 감는 새』는 참 재밌게 읽었다. 다음에는 무라까미 하루끼의 최근 판 소설을 빌려와야겠다. 『이상한 도서관』은 금세 읽어버리고 기리노 나쓰오의 『도쿄 섬』을 폈다.  


 남매가 제 자리에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하루가 저물고 있다. 둘만 남은 집은 착 가라앉아 고요하다. 각자 책을 읽는 사이 밤이 평온한 하루가 깊어간다.

                   202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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