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은 까꼬실 마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영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둘 다 가정을 꾸리며 대도시 아파트에서 산다. 딸내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국가고시를 거쳐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시집을 갔지만 맞벌이를 하면서 잘 살고 있고 , 아들내미는 우리나라에서도 알아주는 일류대학 전자공학과를 나와서 재벌회사에 다닌다. 전자공학이 무엇인지 나는 통 모르지만 어쨌든 아들내미는 어려서부터 쭈욱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고, 아르바이 튼가 뭔가 해서 생활비를 벌었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섭섭했다면 그 회사 사장 딸하고 혼인을 하여 처갓집 이웃에서 데릴사위처럼 지내니 내가 아들네를 자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며느리가 부잣집 딸답지 않게 수더분해서 그나마 안심이 되지만 아무래도 편한 상대는 아니다. 시어머니 노릇도 제대로 못할 처지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래야 댓 마지기 되는 논밭에서 지은 양식거리나 양념거리를 챙겨다 주는 것이 고작이다. 말 그대로 저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산다.
“어머니 이젠 고집 그만 피우고 나오셔요. 그 촌구석에 뭐가 있다고 붙어 있어요?”
“야가 무슨 소리 하노? 땅 있것당, 집 있것당, 친구 있것당.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노? 콩깍지 속에 들어서 살다가 숨이 막혀 죽으라는 말하고 같제.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야 명 치레를 하는 기다. 공중에 부웅 떠서 우찌 사노 말이다.”
아들내미가 가끔 촌에 있는 집이랑 논이랑 다 팔아치우고 같이 살자 한다. 나는 펄쩍 뛰지만 말이 그렇지 어느 어미가 제 자식이랑 사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며느리 눈치 보여서 싫다는 것이고, 이방인의 도시에 익숙해질 수 없어서 싫다는 것이지. 손자손녀들 보고 싶으면 아들네 딸네 집에 찾아가면 되는 것이고 또 까꼬실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보고 상팔자가 따로 없다면서 청상으로 살더니 자식 복 터졌다고들 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남의 말이라고 우찌 저리 함부로 할꼬.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지만 마을 사람들의 그런 소리가 듣기 싫은 것은 아니다. 은근히 즐기기도 하고, 우월감도 느낀다.
네까짓 것들이 내 발바닥이나 따라 오것나. 내가 우리 아이들 도시로 유학 보내 공부 갈칠 적에 너거들이 내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한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뱁새가 황새 따라 갈라 쿠모 가랭이가 찢어진다꼬 해샀터니 인자 부럽을 거다. 하모 많이 부러버해 봐라.
사실 우리 아이들은 내 기대보다 더 나무랄 데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다만 두 아이가 혼인할 시기가 되자 은근히 걱정이 되긴 했다. 말이야 인물이 없어, 학벌이 없어, 직업이 없어. 좋은 혼처 잡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라고 했지만, 중매쟁이가 청상과부 어쩌고 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자식들이 인륜대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가난한 시골 무지렁이 홀어미 밑에서 자랐다는 것이 옥에 티였다.
그러나 어미의 그런 조바심과는 달리 딸도, 아들도 제 짝들을 스스로 찾아서 어미를 기쁘게 해 주었다. 저거들 보고 평생을 청상으로 살아왔으니 어미에게 그만한 보답은 해 주어야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자식 농사는 잘 지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우리 어머니 시집보내야겠네. 도시에서는 못 살겠다 하시고, 촌에 혼자 계시는 것을 생각하니 우리들도 불편하고. 그러니 이웃에 우리 아버지 될 만한 사람을 구해 드리는 수밖에 없겠어. 엄마, 어떻게 하실래요?”
“야들이, 다 늙은 에미를 갖고 놀아라. 놀아.”
그러나 지난 일 년여 심기는 몹시 불편했다. 우리 자식들이 제 살기 바빠서 혼자 있는 어미 걱정을 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식은 품 안에 있을 때만 내 자식이었지, 내 품 떠나면 남의 자식이라 진작부터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심기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남매가 제 어미 섭섭지 않게 매달 용돈도 두둑하게 통장에 입금을 시켜주니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다. 다만 이성에 눈 뜬 후 사십여 년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흔적을 지울 수가 없어서다. 마을과 떨어져서 혼자 기거하면 뭐가 달라지려나 싶어 내심으로는 무언가를 바라고 다진 터전이었지만 그는 내 마음 같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발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어찌나 속상한지. 모진 짝사랑은 나만의 것인지.
그때는 정산 할멈이 정말로 미웠다. 생사람 잡을 일이 있느냐고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고 싶었지만 죽은 듯이 동네를 떠났던 것은 양심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자 하나 때문에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정산 할멈 말대로 내가 상피를 붙은 것도 서방질을 한 것도 아니다. 간음도 죄라면 사람들의 돌팔매질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아무에게도 내 속내를 드러내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누가 알겠는가. 당사자인 그도 모르는 사실이다. 이제야 내가 속내를 보인들 청춘이 다시 돌아올 리 만무하고, 그와 떳떳하게 만날 처지도 아니다. 아니, 우린 항상 만나긴 한다. 그는 내 마음의 기둥이다. 나 때문에 그가 피해를 입은 것 같아서 가슴 아플 따름이다. 그래서 마을을 떠나 산 생활을 하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았다. 먼발치라도 그를 보는 낙으로 청상 과부살이를 견뎌냈다는 것을 새록새록 깨달을 따름이다. 얼마나 내가 마음으로부터 그에게 의지하고 살았던가를 알게 되면서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오빠, 동생 하면서 살고 싶다.
아마 내가 한창 물 오른 3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그가 바람이 났다. 상대는 멀리 있지도 않았다. 이웃 마을에 사는 과부였다. 나와 비슷한 동년배의 석실 댁은 남편이 논갈이 나갔다가 전봇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감전사로 죽은 지 이태 째 되는 여자였다. 딸내미 둘을 데리고 과부가 된 석실 댁은 참한 여자라는 소릴 들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그 여자가 그의 상대라고 했을 때, 나는 올케언니 보다 더 길길이 날뛰었다.
당장 올케 언니를 앞세우고 그 여자 집을 쳐들어가 난리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야, 이년아, 아무리 남자가 그리워도 그래 우리 오래비한테 알랑방구를 꿔? 뭇 잡놈을 상대할 여자 아이가. 니 겉은 년 땜세 내 겉은 요조숙녀도 욕을 먹는 기라. 너 오늘 혼 좀 나 봐라. 엉가, 그라고 섰지 말고, 이년 머리끄텡이라도 잡아 뽑아 놓으소. 동네 망신을 톡톡히 시켜놔야 우리 오래비 또 안 만내지.”
나는 석실 댁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마당에다 패대기를 쳤다.
“용서해 주이소.”
석실 댁은 사색이 되어 용서해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용서! 용서 바랄 짓을 말라꼬 했노?”
“고무야 인자 고마 해라.”
올케 언니가 말리는 바람에 석실 댁의 머리채를 놓은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 대다가 마당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는 석실 댁의 가냘픈 어깨를 보자 정신이 번쩍 났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당사자도 아닌 내가 흥분을 해서 우스운 꼴을 보이다니.
“참 니도 불쌍한 여편네다. 젊디 젊은 나이에 사내놈이 얼매나 그리벗것노. 노 없는 배 아무나 타모 탈나던가. 하지만 니캉내캉 둘 다 과부 소리를 듣지만 이래서는 안 되는 기라. 자식들 얼굴 깎일 짓 할라거든 도회지로 나가서 하든가. 손바닥 만한 촌 구석에서 이기 뭐하는 짓이고? 나도 청상과부다 마는 니 이러는 거 아니다. 남자를 얻을 라모 비슷한 처지에 의지할 남정네를 얻어야지. 한 이웃에 유부남인 줄 뻔연히 알면서 이기 말이 되는 소린가 말이다. 사실 과부 맘 과부가 안다꼬. 내 니맘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그리 헤푸게 굴모 안 되는 기라. 너거 딸들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우짜다 그리 됐어 예. 형님 용서해 주이소.”
“그라모 인자 우리 오래비 안 만내 끼가?”
“.......인자 그 사람 없시 살 자신 없어 예.”
“참말로 간뎅이가 부었구나. 너거 딸들은 우짜고? 우리 엉가는 우짜고? 동네방네 소문 낸기 다 그런 꿍심이 있었는 갑네. 니가 바랜기 이기가? 사실 20대 청상은 혼자 살아도 30대 과부는 혼자 못 산다는 말이 있다만 니 땜세 고통당할 양쪽 집안 어른들 생각은 안 해 봤나? 니 탓만은 아니제. 남정네라꼬 꼭 뽄을 보는 내 오래비도 참말로 몹쓸 사람인 기라.”
“그 사람 잘못 없어 예. 내가 원해서 그랬어 예. 형님도 겪었지 예? 남정네 죽고 나니 소나 개나 넘보는 거. 참말로 참기 힘들었지 예? 차라리 믿을만한 사람 옆에 있다고 선포하고 살고 싶디 예. 내가 이 나이에 딸내미들 데리고 시집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 살려니 이 꼴 저 꼴 더러운 꼴 봐야 하고, 소문난 김에 이대로 살게 해 주이소. 형님, 폐 안 끼치깨 예.”
나중에는 울면서 하소연을 하는 석실 댁을 보면서 나도 같이 울었다. 속이 시려서 울었고, 그와 한 몸뚱이로 뒹굴 수 있는 석실 댁이 부러워서 울었다. 두 과부가 목을 놓고 우니 올케는 어안이 벙벙하여 헛기침만 했다. 석실 댁도 나처럼 그를 향한 마음은 맹신적이랄 만큼 요지부동이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둘 다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 일은 석실 댁이 동네를 떠나면서 마무리가 되었지만 나는 한동안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올케는 어쩔 수 없지만 석실 댁을 가까이했다는 것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석실 댁이 차라리 나였으면 하고 날밤을 새우기를 수도 없이 했다. 안 되는 줄 알면 더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심성인지. 그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나는 평생을 망부석처럼 그를 가슴 안에 품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었고, 그런 나에게 석실 댁의 존재는 지옥 불에 타는 형벌 같은 것이었다.
오빠, 이럴 수 있어? 내게 이럴 수 있느냔 말이야.
그렇게 따질 수만 있어도 속병이 나서 구들장을 질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말조차 할 수 없는 나는 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다르게 살아가는 여자였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은 다중 인격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깊어지면 병이 되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이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게 된다고도 한다. 나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스물두 살에 치른 첫날밤에도 나는 그를 생각하며 남편을 받아들였다. 남편의 손길에서 그를 느꼈고, 남편의 더운 입김에서 그의 온기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의 고등학교 친구였던 남편의 줄기찬 구애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 독신녀를 고집했을 수도 있었다.
“그만한 친구 없어. 이제 그만 애 태우고 그 마음 받아들여라. 너 때문에 그 친구 군대 탈영하게 생겼다. 너 혹시 딴 남자 마음에 두도 있는 거 아니니?”
“내가 언제 연애하는 거 봤어?”
“그렇다면 왜 그 친구를 싫다고 해? 참 괜찮은 친구야.”
“오빠는 성실이가 그렇게 좋아?”
“갑자기 성실이는 왜?”
“결혼한다며?”
“별 여자 없으니까 그렇지. 그만하면 내겐 과분한 처녀지. 너도 알다시피 난 어른들 모시고 농사꾼으로 살아야 할 입장이야. 성실이가 따라와 주겠다니까 고마운 거지.”
“성실이가 부러워. 나는 오빠한테 시집갈 수 없을까?”
“농담을 해도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이 바보야. 넌 내 동생이야. 영원히”
그랬다.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무 살의 나는 괴로웠다.
어려서부터 나는 덜렁 꾼인 데다 선머슴아 같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런 내가 속에 말 못 할 옹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그라고 해도 내 속내를 짐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남녀 칠세 부동석이 엄연했고, 오지 마을이었던 까꼬실은 유난히 심했다. 다만 그와 내가 친척이란 사실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날 수도 있었고, 남의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그와 어울릴 수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나를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해 준 적은 없지만 내게 너무도 잘해 주는 오빠였다. 족보로 따지면 남이나 다름없지만 한 이웃에서 친동기간 같이 자랐다.
다만 언제였던가. 초등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까꼬실에는 한두 살 차이로 여남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날마다 솔버덩 아래 언덕에 모여서 숨바꼭질, 술래잡기, 소꿉놀이, 미끄럼 타기, 등을 하며 놀았다. 그날은 숨바꼭질을 했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짚동을 볏가리처럼 가득 쌓아놓은 틈새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포개게 되었고, 얼싸안은 꼴로 비좁은 짚동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더운 입김을 얼굴에 받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숨길이 가빠졌다.
“오빠, 좀 떨어져라.”
“쉿, 가만히 있어. 들킨단 말이야.”
그는 짚단을 얼기설기 빼어 입구를 막았고, 우리는 어두컴컴한 굴속에 들어앉아 숨만 새큰거렸다. 나는 부끄러웠다. 젖 몽우리가 겨우 돋기 시작한 가슴을 그에게 짓눌리자 얼굴이 불에 단것처럼 화끈거렸다. 그의 가슴도 심하게 벌렁거리고 있었다. 순간 그는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나는 얼결에 입맞춤을 당하고 말았다. 아찔한 현기증에 눈을 꼭 감았고, 그는 불이 나게 짚동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의 사춘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밤마다 잠을 설치며 그를 생각했다. 첫 입맞춤의 그 아련한 기억을 평생 가지고 살면서 생시였는지, 꿈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혼자 가슴 쓸어내리며 살았다. 내가 그를 생각하는 속내를 들킬까 봐 일부러 더 선머슴아처럼 굴었고, 그가 성실이와 연애질을 할 때도 연락 꾼 노릇을 야무지게 했다.
읍내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오빠와 성실이와 나는 까꼬실에서 40리 밖에 있는 읍내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만 해도 까꼬실 같이 오지 마을에서 여자애를 중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남의 입질에 오르내리고도 남을 일이었다. 성실이네처럼 알부자 소리를 듣는 집이라면 또 모를까 우리 집처럼 가난한 집에서 딸내미를 중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보통 아들도 초등학교 졸업하면 지겟다리 등떼기에 채워서 농사일을 가르치는 곳이 까꼬실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중학교를 다녔다. 여자라도 배울만큼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교육론이었다.
까꼬실에서 읍내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우리 셋뿐이었다. 우리는 까꼬실에서 새벽밥을 먹고 집을 나서야 면 소재지에서 읍내 가는 첫 차를 탈 수 있었다. 첫 차를 놓치면 40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가야 했고, 학교에 도착하면 첫째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 길이 즐겁고 재미있었던 것은 그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두 살이 많았던 그는 언제나 우리들의 경호원이길 자처했다. 그가 고등학생이 되자 장래 나의 남편이 될 그의 친구와 단짝이 되어 넷이서 자주 어울려 다녔다.
“오빠, 성실이가 오빠 좋아한다더라. 오빠는 성실이 어떻게 생각해?”
“그냥 그렇지 뭐.”
그런 그와 성실이 사이를 연결했다. 얌전하고 부끄럼쟁이에다 순종적이던 성실이를 솔버덩에 불러내 두 사람만 남겨두고 자리를 피해주기도 하고, 밤늦은 시간에 까꼬실 냇가로 천렵을 가자고 꼬여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 것도 나였다. 오빠와 올케의 부부 싸움에도 늘 나는 해결사 노릇을 자처했다. 그들 사이에 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인식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끔 나는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남편이 원망스럽다.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그에 대한 나의 연연한 정을 접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남편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 여자가 아닌가. 남자의 사랑은 밖으로 향하고, 여자의 사랑은 안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내 마음속 깊이 그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다 해도 살 붙이고 사는 남편의 알뜰살뜰한 사랑이 있었다면 나는 철없던 시절 잠깐 이성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대부분 여자들은 남편의 사랑으로 피어난다. 남편에 대한 애정에 갈등이 일게 되면 외간 남자를 꿈꾸게 되는 것이 여자의 심리다. 바람난 여자의 속내를 헤아려보면 남편에 대한 불만이기 일쑤다. 건전하고 다정다감한 남편을 가진 여자들은 외간 남자를 꿈꾸지 않는다. 비록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과거가 있는 여자였다 해도 일단 남편의 사랑이 있으면 과거의 남자는 잊히게 되어 있는 것이 여자의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게 남편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사방이 탁 터여서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같은 사랑이라면, 남편의 사랑은 사방을 따뜻하게 막아주는 울타리였다.
“당신만 두고 가서 미안해. 용성이가 도와줄 거야. 많이 힘들겠지만 우리 아이들 부탁해.”
“자신 없어. 당신 없으면 나 혼자 살 수 없어. 어떻게 살아.”
“그래도 살아야 해. 너만 믿는다.”
“싫어, 싫단 말이야.”
“불쌍한 사람.”
남편은 마지막 가는 길에 왜 나를 불쌍한 사람이라며 눈물지었을까.
남편을 산에 묻고 돌아오자 오빠는 지체 없이 살림을 정리해 짐을 샀다. 까꼬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까꼬실에서 백리 밖의 작은 도시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던 나는 청상이 되어 까꼬실로 돌아왔었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내가 까꼬실을 떠나 살았던 기간은 겨우 5년이 전부였다. 오빠는 남편이 죽기 전에 준비했다는 집과 땅문서를 건네주었다.
“수절 네야!”
옛 추억에 잠겨 멍 때리기를 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정산 할멈이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삽짝에 들어섰다. 어쩐 일이냐고 묻는 내 말은 퉁명스러웠고,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수절 네야. 내 진작 찾아올라 캤지만 면목이 없더라. 내 이약 좀 할라꼬 왔다.”
“흰소리 하지 마소. 올해 동신제 제주는 할매 소원대로 됐담서요? 올해 농사 풍년인거는 따 논 당상이것네요. 신령님이 보호해주낑깨 맘 푹 놔도 되것소.”
“가뭄에 꼬칫대 말라가딧기 배배 꼬지 말거라. 다 니를 생각해서 그랬던 기라.”
“그건 또 무신 소리요?”
“인자 말이지만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뭘 말이요?”
“용성이가 니 주위를 뱅뱅 돔시로 사는 걸. 니도 몰랐는지 모르지만 니한테 눈독 디린 남정네가 한 둘이가. 그때마다 니 모르고로 손 본기 눈 줄 아나? 바로 너거 오래빈 기라. 그날 밤에도 오밤중인데 너거 집을 한 바꾸 돌아 나오더라. 내가 괘심했던 거는 이태 전에 죽은 내 아들 알제? 그 아가 와 처자식 외면하고 내 옆에 와 있었는 줄 아나? 다 니 땜이다. 에릴 때부텀 니를 맘에 둔기라. 니를 맘에 두고 살다가 죽을병이 들었던 기라. 내가 귀에 못따가리가 백히도록 오르지 못할 낭구는 치다도 보지 말라꼬 그리 애걸복걸했건만 그놈은 평생 니를 가슴에 끼고 살았던 기라. 못난 내 자슥이라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원이라도 풀어주고 싶었제. 니한테 바로 말을 해 볼라꼬 벼렀지만 우리 아들이 입도 뻥긋 몬하고로 하드라. 혼자 힘으로 아그들 키움서 올매나 고생했것느냐고. 가로늦깨사 동네 망신당할 일 있느냐고 하드라. 하지만 죽어가는 아들 소원이 니캉 원 없이 이바구나 해 봤시모 좋것다는데. 어떤 에미가 가만히 있것노.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니한테 살째기 말이라도 건네 보모 우떻가 싶어서 먼저 너거 오래비를 찾아가 그간 사정을 말했던 기라. 내 아들 맺힌 한이라도 풀고로 해 도라꼬. 용성이가 뭐랬는 줄 아나? 니한테 그런 말 한마디라도 하모 노망 든 할망구로 몰아 부쳐 여기서 내쫓는다 쿠드라. 이 고장은 다 너거들 일가붙이 아니가. 내 겉이 애비도 모르는 자슥 하나 델꼬 들어온 타성받이 점쟁이 할망구 하나 쫓아내기는 식은 죽 묵기제. 너거 집안은 맘만 묵으모 못할끼 없는 세도 아이가. 시상이 좋아져서 나도 할 말 하고 살지만 너거들 맘 속에 든 천시 풍조는 가시지 않았다는 것도 모를 내가 아닌기라. 내 아들이 원 풀이도 못하고 죽고난깨 속에 옹이가 백히드라. 그래서 애궂은 수절 네가 피해를 본기라. 용서해 주끼제? 내 본심은 아니었싱깨 인자 맘 풀고 동네로 온나. 인자 내가 살모 올매나 살것나. 수절 네, 참말로 미안시럽지만 인자 날 용서해 주소. 죽은 우리 아들 봐서라도.”
“그래 예? 그런 일이 있었어 예?.”
“아이고 인자 속이 후련 하구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구마. 나는 할 말 다 했으니 갈라요. 수절 네, 죽은 우리 아들 이약일랑 못 들은 걸로 하소. 그놈도 이 에미 맘 알고 나도 그놈 맘 안 다요.”
참말로 사람 속은 모를 일이다.
나는 가슴이 아렸다. 나를 가슴에 품고 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 그가 나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을 알아서 인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아렸고 그만큼 서러웠다. 그리고 알았다. 정산 할머니의 아들이 꽃상여 타고 떠나던 날 나는 먼발치에서 그를 배웅하며 속으로 왜 그리 미안했던 지를. 그가 나를 가슴에 품고 살았듯이 나도 오빠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 꼭 무슨 운명의 장난 같이 느껴졌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 머슴애가 자꾸 생각났구나.
그 오래전, 숨바꼭질하던 날, 오빠와 나뭇단 속에 숨어서 첫 입맞춤을 하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나왔을 때 내 옆을 획 지나가던 아이가 있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았던 나를 잠시 차갑게 쏘아보다 그대로 획 지나쳐 달려가던 머슴애를 나는 왜 여태껏 잊고 있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