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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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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12. 2022

28. 선산 사토 하는 날

선산 사토 하는 날    

 

  식목일이다. 선산에 사토를 한단다. 새벽부터 준비물 챙기기에 급급한 농부다. 농부는 이른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선다. 나도 마당 돌기를 하기 위해 운동화를 신었다. 삽짝을 나갔다 돌아오는데 ‘날 좀 봐줘’ 이층 베란다에 펄럭거리는 빨래들, ‘우짜노!’ 어제 널었던 빨래가 노지에서 밤을 새웠다. 밤새도록 수증기를 품어주었을 것이다. 건망증은 치매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하던가. 치매를 걱정해야 할 노년을 향해 가고 있는 내가 빨랫줄에 걸려 펄럭거린다. 

 

 예전에 할머니는 밤에 빨래를 널어놓으면 귀신이 해코지를 한다고 엄하게 나무라곤 하셨다. 그때는 흰옷이 대세였기 때문일까. 아무리 어두워도 흰 옷은 눈에 띈다. 밤바람이라도 불어 펄럭거리면 지나던 길손이 혼비백산하거나 놀라 저승길 가기도 한단다. 고갯마루 몽땅 빗자루 전설이나 마당에 널린 빨래 전설이나 우리네 구비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구전에서 구전으로 넘어오는 그 마을의 전설들, 지금은 입담 좋은 노인도 드물어졌고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꾸지람할 어른도 귀해진 세상이다.

 

 덕분에 오래전 떠나신 친정 할머니를 추억한다. 내가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돌아가셨다. 여든넷이셨다. 그 시대에는 장수하신 셈이다. 환갑을 못 넘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니 호상이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집 뒤란의 우물가에 있던 커다란 독이다. 내가 들어가 앉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큰 독이었다. 그 독의 쓰임새는 빨래 담그기였다. 집집마다 길쌈을 할 때였고, 일상 옷이 무명이나 삼베로 만든 것들이었다. 흰옷을 즐겨 입는다고 백의민족이라 했던가. 흰옷을 즐겨 입어서가 아니라 길쌈으로 직접 짠 베가 무명이나 삼베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무명은 잿물을 넣어 가마솥에 푹푹 삶으면 흰색이 되지만 삼베는 노르스름해야 제 빛깔이다. 

 

 독은 삼베의 빛깔을 내게 하는 용도였다. 베틀에서 마무리된 삼베를 왕겨와 섞어 독에 넣고 물을 붓고 그 위에 대나무 가지를 얼기설기 얹었다. 대나무 가지 위에 커다란 돌을 얹어 놓았다. 평상시 입던 삼베옷도 칙칙하게 빛이 바래면 왕겨와 섞어 그 독에 담가 놓곤 했다. 왕겨 물이 든 삼베는 개나리 꽃빛처럼 맑고 깔끔해 보였다.

 

 할머니는 평생 팬티라는 것을 입어보지 않으셨다. 속곳이라고 아는지 모르겠다. 속속곳, 단속곳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시골 노인들은 아직도 고쟁이라는 말을 쓴다. 고쟁이는 지금의 팬티 같은 거다. 일어서면 아랫부분이 겹쳐지고 쭈그리고 앉으면 밑이 터지는 속옷이다. 여자들은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하니 치마 안에 입는 고쟁이가 지금의 팬티보다 편리했을 것 같다. 평생 무명 치마를 입으셨던 할머니, 일제 강점기부터 유행한 몸빼라는 통바지도 ‘여자가 남정네 바지를 입어? 세상 말 세로세.’하셨던 어른이다. 새벽마다 우물에 가서 목욕재계를 하셨던 할머니, 후덕하고 오지랖 넓었던 할머니로 기억한다. 

 

 식목일이라 그런가. 일꾼들과 선산 사토 한다고 진땀 빼는 농부를 생각해서 그런가. 어지럽다고, 어지럼병 전문 병원에 가야겠다고 호소하는 시어른 때문에 그런가. 오래전 돌아가신 친정 할머니 생각만 간절해진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일 년 전쯤 눈이 어두워지셨다. 큰 병원을 들락날락했지만 노안이라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얼마나 답답해하셨을까. 처음에는 온갖 민간약도 써보고 병원도 다니셨지만 나중에는 포기하셨다. 더듬더듬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시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마침 큰언니가 전화를 했다. 할머니와 엄마 아버지 산소에 가고 싶단다. 언니도 노인이 되니 돌아가신 어른들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다.  ‘그래, 언니, 날 잡아서 가 보자. 우리 산 밑에까지 길을 넓혔다니 승용차로 갈 수 있을 거야.’ 할머니의 묏등 지척에 아버지의 묏등이 있다. 엄마는 화장해다 아버지 옆에 뿌렸으니 두 분이 같이 계실 것이다. 그 산에 들면 어린 추억들이 시냇물처럼 흐른다. 시댁 선산 사토 하는 농부에게는 어떤 추억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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