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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14. 2022

29.  말벗을 가진 행복

 말벗을 가진 행복 


    

 사방에 꽃들이 터진다. 꽃을 보는 마음을 여심이라 했던가. 말벗이 그리웠다. 가까운 문우 둘을 청해서 저녁을 먹었다. 귀농한 부부가 하는 음식점은 말 그대로 꽃피는 산골이다. 온갖 특이한 꽃들이 반겨준다. 순결한 조팝나무 꽃과 새빨간 처녀 꽃이 나를 반긴다. 음식점에 들어서기 전에 사진 몇 장을 찍는다. 할미꽃 무더기가 다소곳하다. 허리가 굽은 꽃을 누가 할미꽃이라 했을까. 


 세 여자의 수다는 시간을 잊게 한다. 십 년이 훌쩍 넘긴 말벗이다. 두 여자는 직장생활을 하는 중년이지만 생기를 잃지 않아 곱다. 전국의 작은 학교는 다문화 가정이 주류를 이루지 않을까. 열 명 중 여덟 명이 다문화가정이란다. 외국인 엄마는 한국말이 서툴다. 아이 역시 한국말이 서툴 수밖에 없다. 그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이다. 공통점을 가진 그녀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도 즐겁다. 


 문학으로 만나 정든 여인들, 풋풋함을 잃어가는 중년의 모습에 머리가 하얀 노년의 나를 기대어본다. 오리누룽지 탕은 시원하고 맛있다. 거기에 산채비빔밥을 첨가하니 온종일 학생들과 부대끼다 온 그녀들이지만 얼굴에 홍조가 곱게 퍼지고 피로가 풀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자주 만나고 싶지만 직장인의 하루는 고단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진짜 멋진 노후를 보내는 겁니다.’ 온종일 삼시세끼 챙기고 책 보고 글 쓰고 컴퓨터로 세상보기 하는 나를 부럽다 하지만 전혀 부러워하는 얼굴은 아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자유로워진다. 퇴직할 나이가 되면 저절로 자유부인이 된다. 음식점을 나서니 어둠살이 깃들었다. 꽃향기가 사방에서 내려앉는다. 읍내 들어가 찻집에 앉았다. 음식점도 찻집도 저녁 손님이 별로 없단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니 모두 불안증세에 시달리는 것일까.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코로나에 걸려 고생한 경험담도 듣는다. 나도 적당히 앓다가 넘어간 것은 아닐까. 농부가 코로나 확진 자가 되어 고생을 했다. 면역성이 떨어진 사람에게 코로나는 치명타를 입히는 것 같다.   


  오늘도 이웃 마을에서 두 사람이 저승길 떠났다. 다른 도에 사는 문우의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단다. 화장터가 미어터지는 바람에 3일장은 엄두도 못 내고 5일장을 치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죽음 소식이 들리면 두 어른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두 시어른을 마음에서 놓아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되겠지. 노인요양원에 가시겠다는 어른이 또 무슨 변덕을 지을지. 평생을 살아온 집을 두고 죽어야 나온다는 요양원에 가시고 싶은 마음은 없으리라. 자식들 중에 누군가 두 어른을 거두어 보살펴주길 바라기에 억지를 부린다는 것도 알지만 나는 지쳤다. 


 벚꽃이 만개한 밤길을 달려 집에 왔다. 오랜만에 말벗들과 수다도 떨었지만 쓸쓸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의 일생이 서글프기만 하다. 한 해가 다르다는 노인의 말을 실감하면서 백 살이 코앞인 두 어른을 결국에는 요양원으로 모셔야 하나 싶어 마음이 무겁다. 다른 자식들은 지금처럼 우리가 모셔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당신들이 단 일주일이라도 모셔 보고 그런 소리 해.’ 꽁한 마음이 되다가 그 마음자리조차 업을 짓는 것 같아서 내려놓으려 애쓴다. 선한 마음으로 살자. 내 속에 날카로운 옹이를 키우면 나만 다친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게 살자. 삶의 모토를 생각한다. 모든 것은 저절로 풀려가는 것이 인생이다. 안달복달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순리에 따라 사는 것,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바라봄이 최선일 때도 있다.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말벗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두 말벗이 새삼스럽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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