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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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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17. 2022

30. 벚꽃이 떨어질 때

벚꽃이 떨어질 때     



 꽃눈이 펄펄 날린다. 잔디 위에 사르르 앉는 꽃잎 눈송이가 눈부신 날이다. 바람은 벚나무를 놀리듯이 휘잉 불었다가 살살 달래다가 잠잠해지곤 한다. 그때마다 마당은 온통 꽃눈이 내려앉고 눈바람이 분다. 농부는 아침부터 전기온수기와 씨름 중이다. 불편할 것도 없건만 찬물이 싫단다. 수도꼭지만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온수기를 구입했다. 직접 설치하는데 고전을 면치 못한다. 아무리 만능 팔을 가진 가제트 형사라 해도, 아무리 맥가이버 라해도 완벽할 수는 없나 보다. 


 오전 내내 옷 한 벌 적셔내고 씨름하더니 설치는 했다. 문제는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는 거다. 뭔가 잘못됐다. 완벽하게 벽에 붙이고 온수 호스와 연결하고 전기도 설치해 꽂았지만 기계 잘못인지 연결이 잘못됐는지. 서비스센터를 불러야겠다며 밥 먹으러 가잔다. 어제 시댁에 온 시누이가 어머님께 벚꽃 구경을 시켜주고 싶다 하더란다. 전화를 했더니 이미 등 너머 벚꽃 군락에서 즐기고 있었다. 어머님 상태에 음식점에서 점심 해결도 할 수 없어 집에서 해결할 것이란다. 요양보호사가 점심 차려놓고 기다린단다. 


 농부는 누굴 청할까 묻는다. 아랫말 친구 부부를 청했다. 벚꽃 구경도 할 겸 합천호로 향했다. 합천은 우리 지역보다 추워서 벚꽃이 만개했을 줄 알았더니 먼저 피었나 보다. 이미 지는 중이다. 벚꽃 눈을 바라보며 합천호로 달렸다. 가뭄으로 인해 합천호는 저수량이 적었다. 벌겋게 드러난 호수 주변은 황량한데도 관광객은 제법 많다. 맛집으로 소문난 대구 찜 전문점에 갔더니 손님이 넘쳐난다. ‘코로나 시대에 이 정도 손님이라면 대박 났겠는 걸.’ 우스개를 했다. 역시 대구 찜은 푸짐하고 맛있다. 


 나는 찜을 좋아한다. 해물찜이든 아귀찜이든 대구찜이든 매콤한 찜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대구찜 대자와 공기 밥 세 그릇에 나는 라면사리를 시켰다. 넷이서 먹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푸짐한 찜이지만 접시 바닥까지 말끔하게 비웠다. 코로나 시대에 파산한 음식점이 수두룩하다 해도 맛집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아내들끼리 죽이 맞아 모아둔 수다 풀었다. 여자들 수다는 자식 이야기, 시부모님 이야기, 남편 흉보기 등, 살아온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두 쌍의 부부 공통점은 농사꾼으로 아이들 뒷바라지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시부모로부터, 자식들로부터 홀가분해질 때도 됐다. 농사도 힘에 부치고 몸도 여기저기 고장 날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어. 꽃구경할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말에 ‘우리 시어른처럼 살면 아직 30년이나 남았소.’ 내 말에 세 사람은 폭소를 터뜨린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 요양원 입소를 생각하는 나이에 근접한 것이다. 음식점에 앉은 사람들도 대부분 촌로다. 자식들과 온 팀도 있고, 이웃과 온 팀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닮은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 같아 짠했다. 


 문득 시어머니 생각을 했다. 행복하실까. 막내딸이 모시고 나가 꽃바람도 쐬어드리고 밥상도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챙겨드리고 기저귀도 갈아드렸을 것이다. 시아버님 눈칫밥도 없으니 홀가분하고 좋으실까. 막내딸도 마지막 효도라 생각할까. 요양원 입소를 고려하는 중이다. 시아버님은 어제 입원하셨다. 적어도 한 주는 시간을 벌었다. 막내딸이 한 주 정도는 시댁에 계시면 좋으련만 각자 생활이 있으니 어려운가 보다. 그렇다고 치매어른이자 기저귀 차는 시모를 혼자 둘 수도 없다. 자식들 중 누군가 함께 할 수 없으면 요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다. 요양원 입소하기까지 농부가 져야 할 짐이기도 하다. 


 시어머님을 모시기로 한 요양원은 지척에 있다. 자주 뵐 수 있도록 가까운 곳으로 정했지만 예약 손님이 많아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그 기간 동안 시어머님 혼자 둘 수가 없다. 농부도 환자다. 눈에 문제가 생겨 안과를 들락날락했는데도 이상 증후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대학병원에 종합검사를 예약을 해 둔 상태다. 농부도 정신적 외상이 몸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농부가 하는 대로 따르려고 했지만 할 수 없이 내가 또 깃대를 잡았다. 요양원에 전화를 했다. 다음 주 중에 요양원 입소가 가능할 것 같다. ‘기분 나쁘게 당신 말은 왜 잘 듣는데?’한다. ‘문제의 핵심에 어떻게 다가가느냐에 달린 거지.’ 웃고 말았다.


 두 노인을 모시면서 힘들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복이 많아서라고 만 생각했었다. 시어머님이 요양등급 받을 때도, 시아버님이 요양등급 받을 때도 ‘며느님이 너무 고생을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잘해 보겠습니다.’했던 의사 선생님들 덕이었다. 생각해보니 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두 어른의 틈새에 끼어 등이 터질 지경이 됐을 때마다 탈출구를 마련한 것도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때는 두 노인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두 노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무의식에 깃든 마음이 도움의 손길을 끌어당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젠 농부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 두 어른이 언제 이승 하직할지 모르지만 30년이 넘게  모셨고 그만큼 최선을 다했으니 이젠 우리 부부도 자유로워질 때가 아닌가 싶다. 두 어른도 요양원에 들어가 계시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시아버님도 병원에서 퇴원하시면 요양원으로 모셔야 하리라. 같은 요양원이 나을까. 따로 요양원이 나을까. 77년을 해로한 부부다. 서로 적대시하고 미운 정만 남았다 해도 그것은 자식들이 보는 관점이고, 두 노인이 서로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 않을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실 때까지 한 지붕 아래 계시게 하는 것이 효도일까. 생이별시켜놔야 효도일까. 다시 깊이 심사숙고해봐야 할 문제다. 


 합천호를 에돌아 오며 두 노인을 생각한다. 미운 정도 정이고, 고운 정도 정이지만 고운 정은 만개한 벚꽃으로 짧지만 미운 정은 꽃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이어질 것이니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오래 묵은 정이 아닐까. 두 어른의 일생이 시나브로 떨어지는 벚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나무로 같이 있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 아닐까. 두 어른의 바람처럼 며느리가 한 집에서 모실 자신은 없지만 마음이나마 두 어른을 위해 기도하련다. 남은 생 편안한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계시다가 떠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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