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편하게 살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두가 안 났다. 너나없이 농가주택 개량 사업비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돈을 빌려 새집을 짓고, 헌 집을 뜯어내거나 부엌 개량 비니, 화장실 개량 비니 해서 쥐꼬리만큼 나오는 국가 보조금에 생돈을 빚내서 집을 고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이자가 싸다 하나 빚은 빚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가 맛이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아직도 그냥저냥 밥벌이하고 사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막내 장가 들이고 나서 보자고 아내를 달래지만 내심은 새 집을 지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막내가 제대해서 제 짝을 찾으면 아무래도 큰 방 하나는 있어야 할 것이고 아내가 노인이 되면 아궁이에 불 지피기 힘겨울 테니 부엌 개량은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봐서 말할 참이었다.
알고 보면 그는 무척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현실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는 모르지만 수십 년을 버텨온 방 두 칸에 마루와 부엌이 달린 일자형 오두막집을 헐어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 손바닥만 한 방에서 일곱 식구가 비비적거리며 산적도 있는 데. 자식들 다 타지로 떠나버리고 영감 할멈 둘만 남아 방 한 칸씩 지고 사는 데 뭐가 부족한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다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비좁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자리가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닌가.
“임자가 꿍치 논 돈뭉치가 있는가베. 밥은 전기밥솥에 하고, 가스렌진가 뭔가에 반찬 해 묵더니 간이 등어리에 가 붙는가베. 황새가 뱁새 따라 갈라쿠모 가랭이가 찢어진다는 말도 모르나? 군불 한 부석 때는 것도 귀찮아 여기모 인자 눠서 밥 떠 멕이라 안쿠것나.”
“우짠일이요? 당신이 그런 말도 다 할 줄 알고. 살다봉깨 당신도 목구녕에 철이 드는 갑소.”
아내는 묵묵부답 말이라곤 없던 그가 몇 마디 하자 그것이 신기한지 자꾸만 실실 웃었다.
말이 많아졌어. 그것도 변화라면 변화였다.
“요 참꽃을 따서 찹쌀가리에다 부쳐 부치미나 궈 묵어보까?”
그는 마루에 앉아 진달래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또 땅이 꺼지게 깊은 한숨을 쉰다. 조금 전에 느꼈던 감정이 생각나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아무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겠지만 지독히 부끄러웠다.
오늘도 그는 또 아랫마을에 가서 그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왔다. 돌담 너머로 그 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빨간 벽돌로 겉 마무리를 한 조립식 주택 옆을 지나면서 도둑질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병도 참 지랄 겉은 병이 들었어.”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양간을 느릿느릿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우짤라고 니가 이라노. 병신이 육갑한다는 소리 들을라꼬 이라나. 누가 알모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는 기라.
그랬다. 망신살이 뻗쳤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 처녀와 눈이 마주친 것은 지난가을이었다. 아랫마을에 사는 천평 댁 집에 가서 일을 해 준 적이 있었다. 부엌 개량을 한다고 헌 집을 뼈대만 세우고 헐었다가 기둥이 썩어 지붕이 내려앉는 바람에 조립식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며칠간 막일을 해 주었다. 그 품삯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다가 골목에서 그 처녀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는 길에다 말뚝을 박은 사람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긴 생머리를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약간 높은 굽이 달린 구두위로 쭉 뻗은 종아리가 눈부셨다. 무릎 위에 반 뼘쯤 올라간 자색 원피스는 풍만한 궁둥이의 선을 매끄럽게 드러내면서 허리에서 잘록하게 조여졌고, 하얀 깃을 단 자색 윗도리는 젖가슴 밑에 찰랑거렸다. 둥글게 파인 목선이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에 상큼한 눈이며 콧날이 오뚝한 것이 갓 터지기 시작한 꽃봉오리 같았다. 어깨에 걸친 검은색 가방조차 살아있는 것 같았다.
처녀는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고개를 까딱하고 눈인사를 하며 살포시 웃었다.
그 웃음에 넋이 나간 그는 그냥 멍청이가 되었다. 아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순식간에 그의 명치끝을 치고, 가슴을 쳤다. 현기증이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헛것을 보았는가 싶어 돌아보았다.
처녀는 골목을 나오는 이웃집의 두 아낙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편안하셨어요?”
“아이고, 니가 오나? 인자 시집 가야것네. 인물이 훤하구나.”
“천평 띠 딸이 온제 저리 미인 됐노?”
처녀는 부끄러운 듯이 바삐 대문 안으로 들어서다가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처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날 이후, 그에게는 변화가 찾아들었다. 무덤덤하던 일상이 살아서 숨쉬기 시작했다. 펄떡거리는 대어를 낚아 올린 낚시꾼처럼 모든 삶에 잎눈이 터지면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말이 많아지기도 하고, 갑자기 어깨가 축 처져서 방안에 처박혀 담배만 물기도 하고, 아내에게 염색약을 사 오라고 닦달을 하기도 하고, 군에 간 아들이 입던 옷을 내어 입어보기도 하고, 씻고 닦는 것도 부지런했다. 예전엔 아내가 좀 씻고 오라고 등을 떼밀어도 마다하던 사람이 사흘들이 목욕탕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무를 해 오지도 않으면서 지게를 지고 산에 간다며 나가기도 하고, 가게에 가서 사탕을 사다가 아내에게 내밀기도 했다. 할 일도 없으면서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소를 끌고 나가 갈아놓은 밭을 다시 갈기도 했다. 그는 힘든 일을 찾아가며 해 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더 가관이었다.
“내 근육 살이 좀 틔어 나온 것 같제?”
각방 거처를 하던 아내 옆에 베개를 들고 와 이불속에 나란히 눕는 것이며 쭈글쭈글한 젖을 만지려 한다든가 하면서 아내를 탐하려고 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눈빛에 생기가 돈다는 점이었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면서 바보스럽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자잘한 일상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가장 놀란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아내는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큰 바위 아저씨란 별호가 어울릴 정도로 우직하기만 하던 남편이 아니던가. 아무리 천둥 번개가 치고, 논밭이 벌물에 휩쓸러 가도 꿈쩍도 않았던 남편이 아니던가. 좋고 나쁘다는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바보 천치라는 뒷공론을 듣지만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도 아버지의 한 마디에 순종을 했다. 그래서 자식 교육은 반듯하게 시켰다는 사람들의 치하를 듣는다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리움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의문도 가져보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 속에 잉걸불에 달군 돌 하나를 던진 사람은 그 처녀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란 것을 그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이것이 짝사랑이라는 것일까. 내겐 사춘기가 있었던가. 없었다. 사춘기를 격어야 할 나이에 가난한 살림을 꾸려 가랴, 서툰 남편에 아버지 노릇을 하랴, 뒤 돌아볼 여가도 없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현실에 발을 맞추어 갈 때도 그는 외톨이처럼 다른 사람과 발을 맞출 수가 없었다. 모두들 바보 취급을 해 버리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가슴속의 응어리를 곰삭히며 일만 죽도록 했다.
그는 삶이 힘들다고 푸념한 적도 없지만,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은 어떤 향기를 음미할만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향기를 분명 맡을 수 있었다. 말로 설명을 해라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이 현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란 점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환갑을 눈앞에 둔 남자였다. 살아온 날이 결코 헛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란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는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그 마을로 마실을 나가곤 했다. 그 처녀의 집을 먼발치에서 쳐다만 보고 돌아오기도 하고, 운이 좋은 날은 그 집에 가서 술대접도 받았다. 주말이면 가끔 그 처녀를 보기도 했다. 처녀는 예의 그 수줍음과 미소를 가지고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며 지나쳤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천평 띠 딸내미가 행인물이 아니 더마. 큰 은행에 댕긴 담서?”
“중매쟁이들이 목을 매것네?”
“천평 띠 말이 애인이 있다쿤단다.”
그는 동네 아낙네들이 하는 말거리를 들었다. 과년한 처녀니 혼담이 오고 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 아마 그런 그의 심정을 그 처녀가 안다면 심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지게에 낫과 새끼를 챙겨 얹었다. 감태나무나 한 짐 해 와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물레미 뒷산의 개울을 따라 난 오솔길을 오르다가 그는‘참 곱기도 해라!’ 감탄사를 쏟았다. 활짝 핀 복사꽃이 개울을 따라 쭉 이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연분홍색의 복사꽃은 그 처녀의 볼 빛 같았다. 수 십 년 동안 그 산길을 오르내리며 본 복사꽃이지만 그 꽃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너무 예뻤다. 그는 손을 내밀어 꽃가지를 꺾었다. 냄새를 맡았다. 상큼한 꿀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미세하게 자극하면서 찌르르 통증이 왔다. 그는 깨어질까 두려운 보물단지처럼 꽃잎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꽃가지를 볼에 대어 보기도 하고, 입술에 맞추어 보기도 했다.
문득 막내가 생각났다. 천성은 제 어미를 닮아 부지런하지만 외모와 뚝심은 자기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아들이었다. 며칠 있으면 그 녀석이 제대를 해서 온다는 기별을 받았다. 읍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간 아들은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야간 대학 졸업장을 땄다고 했다. 아들은 젊은 시절의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지게를 벗어놓고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댕겼다.
“이십 대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아니, 여나믄 살 적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으면......”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담뱃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날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말과 웃음을 잃어버리게 했던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도, 잊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밤마다 가위에 눌러 괴성을 지르면서도 누구 한 사람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지금의 아들 나이만 했을 적에 6.25 동란이 터졌다. 아버지는 군대에 소집 영장을 받고 오른손 엄지와 금지 손가락을 잘랐다. 홀어머니와 어린 두 아이에, 배부른 아내를 두고 차마 전쟁터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산골에도 전쟁의 포성이 들리곤 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아마 칠월이었을 것이다. 물레미 마을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사 나흘을 버티다 하룻밤 새 자치도 없이 사라졌다. 그 마지막 날 그는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그날 밤에 인민군 장교는 아버지에게 등짐을 지웠다. 이동을 해야 할 처지라며 마을의 장골 대 여섯 명을 차출했다. 아버지는 등짐을 지고 인민군을 따라나섰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할머니는 지름길을 통해 내달렸다. 열 살짜리 소년이었던 그도 할머니의 뒤를 몰래 따랐다. 할머니는 먼저 재를 넘어가야 하는 산길 입구에 닿아 지키다가 인민군 장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이놈아, 날 쥑이고 우리 아 델꼬 가거라. 안 그라모 못 보낸다.”
“옴마 짐만 부라 주고 퍼뜩 올 끼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할머니와 실랑이를 하던 인민군 장교는 사정없이 개머리판으로 할머니의 머리를 후려쳤다. 할머니는 끄윽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풀썩 넘어졌다. 그는 할머니를 부르지 못했다. 총머리가 아버지의 심장을 겨누면서 앞으로 가기를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물레미 골짝을 싸고 있는 산의 구석구석을 손바닥 눈금 보듯 다 알고 있었다. 등을 넘다가 실수하는 척하고 벼랑으로 굴렀다.
아버지가 할머니 곁에 왔을 때는 이미 할머니는 절명한 뒤였다. 그는 바위처럼 꿈쩍도 않고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는 낙상사로 처리되어 동네 사람들이 초상을 치러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구분되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한 실어증에 걸려서 몇 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세월이 가면서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좀체 입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 말하는 것이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는 막내가 무척 보고 싶었다. 입버릇처럼 농촌에 살면서 부모님은 제가 모시겠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녀석이기도 했지만 왠지 그 처녀를 생각하면 아들이 생각났다. 그 처녀만 한 배필감을 구해 주고 싶었다.
“아부지 막내 며느릿감 있응 깨 걱정 마이소.”
아들은 군대 생활을 하면서 휴가만 나오면 팔을 걷어붙이고 집안일을 도왔다. 미처 갈지 못한 논바닥이 있으면 경운기에 쟁기를 달아 갈아주기도 하고, 외양간의 거름을 끌어내다 논바닥에 깔았다. 그는 막내 녀석이 자기를 닮아서 뚝심 하나는 세구나 싶어 대견했다. 산비탈 다랑이를 일구어 과실수를 심겠다고 벼르기도 하고, 아버지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농사를 짓다가는 평생 가난 못 면한다고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 녀석 색싯감이 참하모 올 가실에는 장개부터 디리야 할 낀데.”
그는 막내가 오면 누렁이 코뚜레 끼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든든했다.
이제 그도 중노동에 속하는 농사일이 힘에 부쳤다.
햇살이 너무도 화창한 날이었다. 농사철이 시작된 농촌의 나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볍씨를 물에 담그고, 논밭에 거름을 내고, 씨앗을 뿌리는 철이었다. 볍씨를 뿌릴 시기를 늦추면 일 년 농사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면에서는 직파를 해 보라고 농민들을 종용하지만 그는 직파를 거부했다. 오랜 세월 해 온대로 해야 실패가 없다는 것이 그의 농사 철학이었다. 그의 논이 경지정리가 안 된 다랑이라는 것도 물론 이유였다. 다만 소작하는 논에는 이앙기를 빌어 심을 수 있도록 볍씨 파종기에 의지했다. 질 좋은 황토를 파다가 플라스틱 묘판에 담고, 그 위에 볍씨를 뿌려 다시 흙을 덮어 싹을 틔운 후 못자리로 옮겨 키우는 작업이 수월하다지만 그는 더 번거롭고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와 둘이서 촉이 빼족빼족 난 볍씨를 소쿠리에 건져 놓고, 애벌갈이가 끝난 논의 물배미 곁에 못자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빨리 하고 가입시더. 벌써 갸들이 들이닥쳤시모 우짤라꼬 꾸물댑니꺼?”
“다 저녁때나 돼야 올 낀데.”
“점심 나절에 도착한다 캤단 말이오.”
그는 아내의 조바심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아내의 얼굴이 고와 보였다.
“임자도 꽤 이뿐 얼굴이네 그려.”
“야? 영감도 참 실없기는.”
아내는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과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에 막내가 제대를 하고 왔다.
“충성, 소자 임무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렁찬 막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가슴이 환히 열리는 것 같았다.
아들은 며칠을 쉬면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전에 다니던 직장에 다시 들어갔다. 아들은 이참에 도시 생활 접어버리고 농사짓겠다는 것을 그는 우선 장가부터 들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달래서 보냈다. 그는 농사짓는 일이 수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목조목 따져서 말해 주면서 섣불리 결정해서 후회할지 모르니 애초에 심사숙고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아들은 두 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아버지, 내일이 토요일이 지예? 참한 며느릿감 데리고 가겠습니더.”
간밤에 아들의 전화를 받고 잠을 설쳤다. 어떤 처녀를 데리고 올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잉걸불처럼 타고 있는 그 처녀에 대한 애틋한 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기에 그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 처녀와 비슷한 나이의 처녀를 며느릿감으로 볼 생각을 하니 자신이 무척 부도덕하게 느껴졌다.
못자리를 다듬어 놓고, 농기구를 챙겨 지게에 얹는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내는 잰걸음으로 논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얼굴이라도 씻고, 옷이라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막내며느리 감을 맞이하고 싶은 아내의 심정을 아는지라 그는 아내의 거동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녀석만 제 식솔 거느리면 남는 것은 늙은 아내와 그였다.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면서 살아야 할 사람은 아내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설렘을 갖게 해 준 한 처녀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남은 인생을 열어줄 고귀한 향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가까이 있어 줄 수도 없고, 말 한마디 나눌 수도 없지만, 어쩌면 먼 곳으로 시집을 가서 영영 바라볼 수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 향기는 늘 자신의 남은 생을 감싸줄 것이라 믿으며 천천히 논두렁을 걸어 나왔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며 어험, 어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
안방 문이 열리면서 싱글거리는 아들의 얼굴이 쑥 나왔다.
“일찍들 왔구나.”
그는 지게를 헛간 앞에 부려놓으며 말했다. 아들과 아내가 한꺼번에 마루를 나오고, 뒤 이어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인 처녀가 나왔다.
“우리 아버지 알제? 인사드려.”
“안녕하셔요?”
그는 지게 등태에 받치려던 지겟작대기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아부지, 놀라셨지 예? 집안끼리 서로 인사할 때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던 기라 예. 숙이 씨 집에도 다녀왔습니더. 허락받고 온 길입니더. 아부지, 어서 올라오이소. 어머니께서 아버지 오시면 같이 절 받겠다 해서 기다렸습니더.”
“얼렁 올라와 인사받읍시다. 천평 띠가 올매나 좋아하는지. 안사돈끼리는 벌써 전화로 수인사했소.”
그는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귀에서 웅 웅 하는 이명을 들었다.
“너거 아부지가 요새 부쩍 허약해지셨다. 못자리한다고 땡볕에 오래 있었더니 더우 마싯는갑다. 우짜노 이 일을. 퍼뜩 찬물 한 바가지 떠 오너라. 이 양반이 몸 생각함서 일하라 그리 일렀건만 들은 척도 않더니. 이기 무슨 일인지 모르것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자꾸만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수렁에는 깊이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