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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y 04. 2022

34. 카르페디엠과 메멘토 모리

 카르페디엠과 메멘토 모리   

  

 훤하게 보이던 숲이 조금씩 속을 채우고 있다. 자잘한 나무들의 푸른 잎이 갈색의 땅을 감춘다. 키 큰 나무는 키가 큰대로 제 구실을 한다. 상수리나무도 꽃을 피우려고 한다. 소나무도 순을 올린다. 꽃가루 날리는 철이 돌아왔다. 걷기 연습을 하려 나갔다가 너풀거리는 쑥 무더기 앞에 섰다. 건너편 산에 가서 홑잎과 취나물을 뜯고 싶으나 포기하고 쑥을 뜯었다. 쑥 버무리 해도 되겠다. 아직은 부드러워서 쑥국이 낫겠다. 엎드렸더니 자줏빛과 흰빛의 제비꽃과 봄맞이꽃이 곱다. 별을 닮았다 하여 어떤 수필가는 별꽃이라 하던가. 별꽃이란 이름이 더 예쁘다. 개별꽃이란 작은 꽃도 있다.


 아무튼 별꽃과 제비꽃, 냉이 꽃을 따서 작은 꽃다발을 만든다. 아직 내게 감성 한 줄 남았구나. 그 감성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지. 작은 것은 고개를 숙여야 보이고, 큰 것은 고개를 들어야 보인다. 봄은 꽃철이다. 진달래와 개나리, 싸리 꽃(조팝나무 꽃)이 피면 엄마는 여러 가지 꽃가지를 꺾어 한 아름 내밀며 ‘참 곱다.’하셨다. 작은 항아리에 푹 꽂아두면 꽃 그대로가 아름다웠다. 문득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란 말이 떠오른다. 오늘을 살라는 말과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이지만 두 단어를 합치면 삶과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짧든 길든 태어났으면 죽는 것은 정해져 있다. 다만 삶에 취중 해서 잊고 살 따름이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야 의미가 있다. 오늘을 즐긴다고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나와 내 그림자다. 항상 붙어있다. 숲은 계절에 따라 비웠다 채워진다. 인간도 마찬가진데 자각하지 못할 따름이다. 죽음을 생각지 않는 것은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죽기 싫다는 말은 내면 깊숙이 숨어있던 두려움의 실체를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죽음을 받아들이기 연습을 꾸준히 하면 달라질까. 

 

 반면교사인 시어른 두 분을 보면서 ‘죽음이 닥쳤을 때 나는 어떨까. 죽음과 맞닥뜨린다면 두렵지 않을까. 살고 싶다고 소리치지 않을까.’ 두려워서 떨거나 살고 싶다고 소리칠 것 같다. 죽음을 받아들여야지. 수시로 되뇌지만 잠깐이다. 의식을 못하는 사이 주검이 된다면 모르나 의식이 살아있다면 두려워하지 않을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진 않으니까. 자잘한 풀꽃이 예쁘다고 모가지를 똑 끊다 든 생각이다. 꽃이나 나무도 생명이다. 소리칠 수 없지만 아플 것이고, 살고 싶을 것 같다. ‘미안하다.’ 꽃대를 꺾어버린 후 미안하다는 말만 한다고 내 죄가 소멸되지는 않는다. 꽃을 꺾기 전에 꽃을 생각하는 마음부터 키워야겠다.

 

 문득 내 글쓰기를 생각한다. 배설하는 용도인가. 나를 정화하는 용도인가. 어떤 작가가 수필을 못 쓴다고 했다. 가족 이야기나 사생활을 까발릴 용기가 도저히 없더란다. 그렇다고 은유로 포장할 자신도 없고, 자기 치부를 드러낼 용기도 없고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될 것 같아서 시를 택했다고 한다. 육칠십 년대 청소년기를 거친 사람들은 그런 수필을 좋은 수필이라고 읽었다. 미사여구로 포장된 작품들, 관념어로 넘치는 작품들, 유난히 한국수필가의 작품이 그랬던 것 같다. 나도 그런 작품을 읽으며 문학소녀시절을 보냈다. 그땐 나도 시를 썼다. 

 

 그러다 소설과 수필을 쓰게 되었다. 저마다 강론한 수필론도 많지만 가장 진솔한 것이 참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읽고 어떤 반응을 할지에 관심을 두면 작가는 진솔할 수 없다. 무의식에 깃든 자기 포장을 하게 된다. 나를 정화할 수 있다면 분노도 구린내도 포장지를 찢고 맨살로 부딪혀야 한다. 글쟁이로 살려면 자아성찰이 우선순위라고 본다. 나는 가족 이야기를 주로 쓴다. 일기라는 형식으로 일상을 적다 보면 피해자가 가족이 된다. 어쩌면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인데도 글을 쓰다 보면 나는 늘 피해자 입장이 되거나 내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글을 쓴다. ‘자신을 철저하게 까발릴 용기가 없으면 글쟁이가 되려는 욕심을 버려라.’ 어디선가 비슷한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내면의 광기는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직접화법보다 간접화법을 구사하라지만 그것 또한 어렵다. 일상을 일기가 아닌 소설로 썼던 엘리스 먼로를 생각한다. 단편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평생 일기를 쓰지 않은 작가,  일기를 소설 형식을 빌어 표현한다는 것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녀의 짧거나 조금 긴 작품들 어느 것 하나 가슴에 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디어 라이프>는 요즘도 가끔 뒤적여보는 소설책이다. 

 

 내 삶의 흔적도 언젠가는 지워질 것이다. 내가 쓰는 글로 인해 가족이 마음고생을 했다면 지면을 빌어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내 마음에 진솔한 글을 쓰고 싶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큰 그릇이기보다 작은 그릇이고 싶었고, 작가와 시인, 수필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만의 것을 찾고 싶었다. 남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이기에 진솔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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