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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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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y 25. 2022

40. 곡우에 차를 덖다.

곡우에 차를 덖다.    

 

 찻잎을 딴다. 파릇하게 솟은 햇순은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면 부드러운 아기 살결 같다. 마당가에 있는 차밭이다. 삽짝에서 마당가는 차나무 울타리다. 산기슭에 자리 잡고 화계 차밭에 가서 모종을 사다 심은 것들이다. 해마다 차를 따는 이맘때는 고사리 꺾기와 맞물려 차는 뒷전이었다. 틈새에 겨우 우리 먹을 차만 만들곤 했다. 올해는 여유가 있다. 고사리 농사를 남에게 줬기 때문이다. 찻잎을 따서 덖으면 집안이 온통 향긋한 차향이 오래 머문다. ‘이 차 한 잔을 마시면 마음의 분노와 슬픔, 고통까지 거두고 사랑만 가득 차게 하소서.’ 주문처럼 외우며 차를 덖었다. 


 찻잎을 따다가 건너편 고사리 밭을 본다. 두 사람이 고사리를 꺾고 있다. 저기 어디쯤 꿩알도 있을 텐데. 남에게 넘겨준 덕에 한가하게 찻잎을 따지만 내가 덖을 정도만 딴다. 찻잎 따는 것도 차 덖는 것도 힘에 부친다. 농부는 연일 화덕 만든다고 진땀을 뺀다. 차 덖는 무쇠 솥을 얻었다. 농사를 대폭 줄이니 시간이 남는다. 덕분에 차를 덖을 마음을 낸다. 며칠 후 찻잎을 따러 올 딸을 기다린다. 직접 차를 덖어보겠다고 벼르는 딸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을 보내고 싶어 안달하는 스카이 대학과 대학원 출신의 딸이다. 딸은 공붓벌레였다. 장학금 받아주고 우등상 받고, 온갖 상이란 상은 휩쓸어 주던 딸은 정작 직장에 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유인이다. 부모를 닮아서 그런 걸 어쩌랴. ‘돈 많이 벌어 뭐할래? 쓸 만큼만 벌면 되지.’ 돈 욕심도 없다. 시골 삶이 좋단다. 공부한 것이 아깝다. 배운 것이나 앎을 풀어주는 것도 사회를 위하는 일이다.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다. 


 아무튼 자식은 자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할 시기는 이미 오래전 지나갔다. 어떤 삶을 살든 딸의 몫이다. 부모는 그저 믿어주면 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재, 지금에 있다. 지금 딸이 행복하다면 행복한 거다. 찻잎을 딸 때는 오직 찻잎에 집중하고, 찻잎을 덖을 때는 오직 덖는 것에 집중하면서 ‘이 차 한 잔으로 마음의 때를 씻게 하시고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염원을 담는 것이 오늘의 행복이다. 


 두 시간에 걸쳐 차를 덖어냈다. 연둣빛 차 한 잔을 우려 놓고 창밖을 본다. 파릇한 마당, 풀이 자라기 시작한 마당 언저리는 온통 녹색의 장원이다. 야생 불두화가 하얗다. 부처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불두화라 부른다는 꽃송이는 순백의 아름다움이다. 마주 보는 곳에 불단 화도 있었지만 흰 꽃이 너무 많아 베어냈다. 조만간에 이팝나무 꽃도 필 조짐이다. 마당에 있던 이팝나무는 지난해 오월 강풍에 쓰러지고 삽짝 가에 있는 이팝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은행나무와 키를 맞추려고 안간힘 쓰는 것 같아 안쓰러울 때 있다. 


 차를 마시다 라디오를 켰다. 오늘이 곡우란다. 곡우에 찻잎을 따서 덖은 것이라 차 맛이 좋은가. 혼자 즐기기 아까워 감꽃 솎으러 간 농부를 기다린다. 누군가 벗을 청해 햇차 향을 즐기고 싶건만 마음뿐이다. 모두 바쁜 사람들, 한가롭게 산골 바람 쐬러 오라기엔 미안해진다. 손님 대접에는 서툴다. 가볍게 오면 반갑게 맞이할 따름이다. 법정스님은 혼자 마시는 차 맛을 적절한 맛이라고 했든가. 수시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를 읽는다.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은 늘 가까이 두고 본다. 이것 또한 산골 삶의 여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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