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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Aug 07. 2021

상트 페테르부르크 , “참혹함을 견디는 힘”

900일의 봉쇄

언젠가 미뤄뒀던 여행지 러시아를 다시 갈 수 있으려나?

The State Hermitage Museum @관광청

아름다운 도시 생트 페테르부르크를 간다면 함께 가는 이들에게 이 얘긴 꼭 해줘야겠다. 100년도 안된 과거에 있었던 참혹한 이야기.


2차 세계대전, 전쟁 통이었으니 당연히 비극 투성이었겠지만 가장 참혹했던 일을 꼽으라면 대부분 '레닌그라드 봉쇄'를 꼽는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지금의 생트 페테르부르크를 900일 가까이 봉쇄했던 사건이다. 거의 3년 동안이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히틀러는 러시아를 침공한다. 허를 찔린 셈이었다. 이때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은 도시 주변에 250Km의 대전차 참호를 파면서 응전에 나선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희생을 줄이면서 슬라브인을 말살시키는 방법으로 '도시 봉쇄 작전'을 결정한다.


“굶주림으로 숨통을 끊고 지구 상에서 흔적을 없애 버려라” 이게 히틀러의 명령이었다.


육상의 모든 탈출로가 봉쇄됐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를 견딜 연료나 외부 음식의 반입도 차단됐다. 독일군은 하루 네 번 규칙적으로 도시를 폭격했다. 당연히 병원, 박물관, 민가를 가리지 않았다. 공중폭격 107,158발, 포탄 148,478발, 하루에 300발씩 쏜 셈이다. 3년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널빤지, 헝겊 등으로 창문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밀가루가 동나자 바닥에 떨어진 톱밥까지 모아

빵 만드는 데 넣었습니다.

“빵이 다 떨어지면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다”

독일은 비행기로 전단을 뿌려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천천히, 조용히 죽어갔습니다.

하루에 1만 명이 죽는 날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망자 수를 세지 않았습니다.

거리의 시체도 치우지 않았지요.

길 가다 느닷없이 쓰러져 시체가 되었지만

가족들은 시신을 거둘 힘도 없었습니다.

거리에는 시체가 산을 이뤘습니다.

도시는 죽은 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라쇼 러시아p303

1944년 1월 27일 포위가 풀리기까지 정확하게는 872일이었다. 가죽을 삶아 먹고 썩은 밀가루도 먹었다. 도시는 지옥으로 변해갔다. 250만 레닌그라드 인구 중 64만 9천여 명이 추위, 굶주림, 질병, 독일군의 폭격이나 포격으로 숨졌다. 러시아 정부의 공식 발표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신원 확인이 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해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추정한다. 놀랍게도 80% 이상이 아사였다.


당시의 이야기를 일기로 남긴 사람이 타냐 사비체바이다. 러시아판 ‘안네의 일기’인 셈인데 한 대목을 소개한다.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 30분에 언니 제냐가 죽었다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할머니가 죽었다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 오빠 레카가 죽었다

1942년 4월 13일 밤 2시 삼촌 바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0일 낮 4시 삼촌 레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3일 7시 30분에 엄마가...

사비체바 사람들이 죽었다.

모두 죽었다.

타냐 혼자 남았다…"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


이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3년을 버틴 힘은 뭘까?


많은 사람들은 쇼스타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떠올린다. 장엄한 이 곡은 900일의 봉쇄 기간 중에 작곡됐는데, 놀랍게도 레닌그라드의 전장에서 초연이 이뤄졌다. 군악대를 포함해 몸을 가눌 수 있는 연주자를 모두 긁어모아 간신히 해낸 연주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연주회장에 밀려들어 주린 배를 움켜쥐며 이 연주를 함께 했다. 터지는 포화 속에 우리는 사람이란 걸 얘기하고 싶었던 이들. “너희는 전쟁을 하지만 우리는 예술을 즐긴다”. 놀라운 울림을 주는 메시지다. 당연히 파시즘과의 싸움이 곡의 테마다. '공포, 굴욕, 영혼의 속박'에 대해 노래하면서 이들은 끔찍하기만 한 현실을 자부심의 공간으로 바꿨다.


"치열한 전투가 이뤄지는 레닌그라드에서 전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저는 이를 전하기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 라디오 연설>


당시 라도가 호수는 유일하게 외부와 연결된 통로였다. 라도가 호는 레닌그라드 동쪽에 있는데 강원도 면적과 얼추 비슷하다. 이 호수에 얼음이 얼었을 때 러시아 수송대들이 트럭으로 물자를 전달했다. 물론 이동 가능한 물량은 매우 제한됐다. 얼음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고,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트럭이 수장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목숨을 걸고 시민들의 생명을 구하려 했던 이들. 호수를 넘나든 트럭 운전사들의 헌신은 지금 ‘라도가 호수에 대한 노래’로 남아있다. 이 길은 생명의 길로도 불렸다.

라도가 호

놀랍게도 폭격이 계속되는 중에 자원봉사자들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파편을 청소했다.


"1941년 나치의 침공으로,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큰 위기를 겪는다. 독일군이 진격해오자 미술관 직원들은 그림과 조각, 값비싼 소장품들을 나무상자에 담아 우랄 지방으로 보냈다. 잇단 포격으로 건물이 허물어지는 동안에도, 직원들은 미술관에 거주하며 문화재를 지켰다. 2000여 명의 직원 중 40여 명이 이곳에서 굶어 죽었다"

에르미타주의 성모 마리아중에서

미리 옮기지 못한 에르미타주의 작품들은 땅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삭 성당의 황금 돔이 공습의 표적이 될까 봐 회색을 덧칠했다. 도서관도 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도 많았다.


"봉쇄와 포위 기간에도 레닌그라드 공립 도서관은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레닌그라드 라디오 방송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공습을 알리는 것 외에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인력이 없어 대부분 시간에 째깍대는 메트로늄 소리만 내보냈습니다. 그 소리는 도시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맥박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하라쇼 러시아』p305


900일의 봉쇄를 견딘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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