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 선로, 산책로로 다시 태어나다
지난 반에 와인 창고였다가 인기 많은 관광지로 바뀐 파리 베르시 Bercy 지구 얘길 적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이 처음 듣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 군데 더 소개할까 싶다. 우리에게 친숙한 파리는 사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변화 중인 도시다.
퐁피드 대통령은 퐁피두 센터를 지어 주차장을 광장과 미술관으로 바꿨고, 후임 데스탱 대통령은 방치됐던 오르세 기차 역사를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은 루브르를 현대화시켰고 국립도서관을 만들었으며 라데팡스 개선문까지 만들었다.
특히 라데팡스 개선문은 모든 교통을 지하화 시킨다는 파격적인 발상이 흥미로운데 기회가 되면 살펴보겠다. 산업화 시대에 쓰이다 버려지고 결국 황폐해진 곳을 다시 공공건축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늘 흥미롭다. 이제 관광 책자의 틀에 박힌 안내가 지겨운 분이라면 이런 '도시 재생'의 루트만 모아서 방문해봐도 좋겠다.
오늘 가보려는 곳은 '식물이 심어진 산책로' 정도의 뜻인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ee)이다. ‘플랑테 산책로’라고도 한다. 바스티유 광장에서 뱅센까지 이어지는 4.5km 정도의 산책로다. 우리도 북한산 둘레길이나 경의선 숲길에 익숙해졌는데 이런 둘레길이 파리 시내, 차가 다니는 도로 위 10미터 정도 위로 쭉 이어져있다고 보면 되겠다.
2017년에 '서울로 7017'을 만들면서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을 모델로 했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뉴욕 하이라인 공원도 비슷한 공원이다. 뉴욕타임스가 ‘하늘 공원’이라고 표현하면서 애정을 쏟는 곳인데 첼시 지구에 있다. 여기도 버려진 철로가 공원이 된 곳이다. 처음 버려진 땅에 어디선가 날아온 식물들이 싹을 틔웠다. 그러자 황무지에서 커나간 생명을 본 첼시 거주 예술인들이 나서서 폐 선로를 공원으로 만들자고 단체를 만들었다. 뉴욕시를 설득했다. 그렇게 해 공원이 만들어지는데, 이때 모델로 한 곳이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이다. 현지인들은 주로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 green course)라고 부른다.
아마 우리한테는 영화 ‘비포 선셋’으로 익숙해진 곳이다. 9년 만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Shakespeare & Company)에서 만난 두 사람이 르 퓌르 카페(Le Pure Cafe)를 들렀다가, 공원을 걸으며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장소다. 중간에 벤치에 앉기도 하고.
하지만 그 장면을 기억하며 이곳을 찾는다면 더 많이 볼 모습은 아마 조깅하는 파리지앵들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조깅하기 딱인 코스다. 거주지에서 접근성도 좋고 온갖 식물이 다채롭게 가꿔져 있다. 이 길이 원래 철로였다는 걸 잊을 때쯤이면 터널도 몇 번 나와준다. 중간중간 옆으로 새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질주하는 자동차를 볼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집 사이로 지나가는 코스도 생겼다. 아래로 넓은 공원이 있지만 산책로 높이를 맞추다 출렁대는 다리를 만들어 연결시킨 구간도 있다.
한 마디로 지루할 틈이 없는 산책로다. 단조롭지 않도록 연못이나 식생 등 조경에도 꽤 공을 들였다. 당연히 어린이 놀이터도 있다. 1시간 정도 맘먹고 걸어보면 좋겠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처럼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으면 더 좋겠고.
여긴 93년에 공사가 완료돼 시민들에게 오픈됐다. 얘기한 대로 파리 동쪽의 도심을 관통하는 철로가 1969년부터 기차가 다니지 않으면서 황무지로 버려졌다. 재밌는 건 이곳을 공원으로 만든다고 할 때, 파리 시민들의 반응이 냉담했다는 점이다. ‘돈만 버린다’는 게 반대의 주요 골자였다. 하지만 에펠탑 꼴도 볼기 싫다더니 파리의 상징이 된 것처럼 지금은 파리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 중 하나다. 그런 순위는 없겠지만 ‘입장료 없는 관광지로 가볼 만한 곳’을 꼽는다면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입체 보행이라고 하나? 도로 위 10미터 위에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은 또 다른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언젠가 말을 타본 적이 있는데 겨우 1m 정도 위에서 본 세상의 모습은 땅에서 볼 때와 확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여긴 도시 위 10m 공간이다.
또 하나 이곳에서 눈길을 끄는 건 기존에 철교 하부로 이용된 71개 정도의 아치 공간의 사용이다. 적벽돌로 쌓아진 구간을 복원하고 유리로 문까지 댔다. 덕분에 가게가 생겼다. 특별히 예술가나 공예 장인 들의 공방, 기념품점, 소품 상점, 악기점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을 특별히 ‘예술의 고가(Viaduc des arts)’라고 부른다. 버려진 시설을 공원화한 곳은 많지만 이렇게 특별히 예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공간까지 만들면서 지역 상권을 살리려 노력했다는 점은 이곳의 독특함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이곳 관리는 민관 협력으로 운영 중인데 이 가게들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공원 관리 자금도 쓴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을 선택할 자유가 있을까? 빈 터가 생길 때 아파트 대신 공공건축을 생각한 파리는 솔직히 좀 부럽다. 혁신적이면서도 시선을 달리하게 만들어주는 건축물은 우리에게 늘 뭔가 질문을 하니까. 나에게 오늘, 프롬나드 플랑테는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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